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황 May 01. 2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재수를 결심한 건 무언가 대단한 결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믿었던 수시 전형에서 쓴 맛을 보고 수능에서 그리 대단치 못한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점수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고, 난 아무 생각 없이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생활이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었던 동기들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준비가 잘 되었던 동기들도 우울해 하고 눈물을 흘렸던 때였다. 내게 그때만큼 대학이 멀어 보였던 순간은 없었다. 남들은 대학 가고도 걱정하는데 아직 대학도 멀게만 느껴지는 난 뭐 하는 녀석인지. 나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했다.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성적은 오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점점 낮아진 자존감은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때쯤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한 달 넘게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았다. 오는 연락도 대개는 무시하곤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던 어느 날 난 차가 달리는 횡단보도 한복판을 아무 생각 없이 건너고 있었다. 차가 내 발끝을 스치고, 이와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이 날 때렸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난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난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 드는 생각. 힘든데 이럴 수도 있는 거 아니니. 그때 들려온 마음의 소리에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라고?  


그 날 내가 점점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보다 만족하기 위해 한다고 생각했던 일이 결국 날 조금씩 부서트리는 중이었던 거다. 그리고 내 주위를 돌아봤다. 내 옆에는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빛나는 벚꽃이 있었다. 만개한 벚꽃은 은은한 분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벚꽃을 멍하니 봤다. 불현듯 이 모든 문제를 혼자 껴안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난 그동안 나의 우주에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공기와 중력이 없는 고요한 곳에서 홀로 떠다니는 작은 존재.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우주는 나만 있기에는 너무나 큰 공간이었다. 빛나는 무언가를 동경하며 천문학자를 꿈꿨던 어린 시절, 우리에게 혼자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행성들은 사실 몇 없다는 걸 듣고 놀랐다. 나머지의 행성들은 사실 다른 행성들의 빛을 받아 함께 빛나고 있었다. 지구를 감싸고 있는 우주가 수많은 행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듯 내 주위에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난 나에게만 집중하던 눈을 내 주위로 돌렸다. 그렇게 난 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보이게 된 거다. 출근 시간을 바꿔 가면서까지 새벽같이 일어나 날 학원까지 태워다 주시는 아버지가, 아들 아침밥은 먹여야 하지 않겠느냐며 갓 밥솥에서 지어진 따뜻한 밥으로 아침을 차려주시는 어머니가. 내색은 결코 안 하지만 오빠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생이 보였다. 매일 새벽 어머니가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시는 이유가 새벽 기도를 위해서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물론 난 자느라 전혀 몰랐다. 잠결에 문소리 듣고서도 그냥 쓰레기 버리러 나가시는 줄 알았다.

내가 무관심하게 살 동안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매일매일을 그렇게 잠 잘 시간을 쪼개고 한번 더 쪼개 아들을 위해 기도한 후 아침을 시작하신 거였다. 난 아무것도 몰랐는데. 내가 누굴 신경쓸 상황인가, 그리고 날 누가 신경쓰겠어. 하는 하는 마음가짐대로만 충실히 살아온 나인데.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왔다.

일부러 거리를 뒀던 친구들은 내 근황을 듣고 시간을 쪼개 달려왔다. 시간 여유가 없는 나를 위해 공부하는 학원 앞까지 온 그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몰골의 내게 아무 말 없이 밥 한 끼, 차 한 잔을 대접했다. 그리고 잊을 만 하면 날라오는 기프티콘과 응원 메시지. 그러고도 힘든 너에게 더 해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왜 이 아이들과 거리를 두려 했는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오래도록 난 주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주위를 한 바퀴 돈 난 마지막으로 내 자신을 돌아봤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결국 난 나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시련에 좌절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쓰러질지라도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동안의 난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도움만을 바랬다. 해보기도 전에 겁부터 집어먹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알고 보니 내 마음이라는 공간의 유일한 주인은 바로 나였다. 결국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능력도 내 안에 있었던 거다. 물론 혼자서는 깨닫지 못했다. 그 가르침은 내 마음속 모래밭에 깊이 파묻혀져 있었다. 어디 있는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으니. 다행히 날 생각하는 그들의 응원과 배려는 모래 속 커다란 손이 되어 내가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난 힘껏 일어났다. 마음껏 기뻐했고 짧게 슬퍼했다. 그렇게 두번째 수능을 봤다. 목표는 소박했다. 그저 떨지 않으며 보고 싶었다. 주위 사람들의 응원을 담뿍 받으며 난 수험장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해피앤딩을 맞이하나 싶었으나, 삶은 꼭 생각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더라. 난 한 과목을 통째로 밀려 썼다. 그 사실을 성적표가 나와서야 알게 되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내 걱정을 무지 했다. 물론 꽤 힘들었다. 딱 며칠 동안만. 그리고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할 일을 했다. 난 그런 일로 좌절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난 재수 생활 동안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신 부모님을 위해 일을 시작했다. 거의 매일 출근해 돈을 벌었다. 그리고 고급 가죽 지갑을 사드림으로써 마음의 빛을 약간이나마 갚았다.  


난 알고 있다. 앞으로 내가 마주할 미래가 어떨지. 그것은 어두운 길 속 희미하게 빛나는 등불을 찾는 일이라는 것을. 내 목표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은 너무나도 작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난 금방 체념하고 좌절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누군가 내게 이런 상황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난 더더욱 등불을 찾고 싶다. 그 희미한 작은 등불을 껴안고 어두운 길을 함께 걷고 싶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장애물에 끝없이 부딪히고 도무지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가는 길을 막아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턱밑까지 차올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꿈 꿀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기밥 하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