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뜰밖 Feb 01. 2021

904호의 편지

"얘들아, 뛰지 말자, 제발!"

퇴근했는데 부엌 수납장에 웬 장문의 편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너덜너덜 공책을 찢은 종이 한 장에는 검은색 글씨가 빼곡했다. 첫 줄은 이렇게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904호입니다.”

아래층에서 현관문에 붙여 놓은 쪽지를 남편이 수납장에 옮겨 붙여 놓은 것이었다. 한 줄 한 줄 읽어내려 갈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건강을 조심하라는 둥, 새해 복을 많이 받으라는 둥 인사치레의 문장들도 보였지만, 결론은 층간소음 때문에 못 살겠다는 내용이었다.

쪽지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마음에 가시처럼 걸린 문장을 다시 들여다봤다.

“저희 안방에서 애들 악쓰고 우는소리까지 들려요. 화장실에서 아빠랑 아이들 대화하는 소리도 들리고요. 그런 소음에 주말 아침 강제 기상할 때도 많습니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각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고, 재택근무로… ”




7살 4살, 아니 해가 2021년으로 넘어왔으니 8살, 5살이다. 남자아이 두 명. 나도 자매로 커서 남자아이들이 이렇게 활동적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집에서 뛰어다니는 걸 용인해본 적이 없다. 식탁에 앉아 식사를 마친 후, 키가 작은 둘째가 의자에서 내려갈 때 점프를 위한 준비 자세를 하기 직전에 “뛰려고 하는 거지? 뛰지 마”하고 제지를 한다.


화장실에서 아이들과 씻으며 노래도 부르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건,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 너무 당연한 일상이 아닌가. 웃긴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대기도 하는 것은 흔한 일상이 아닌가. 물론, 아이가 씻다가 다쳐서 세면대에 부딪혀 울기도 하고, 형제끼리 티격태격하기도 한다. 둘째는 영유아의 보행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아직 남아있다. 걷는 세월이 오래지 않아, 뒤뚱거리기도 하고 문에 부딪히는 것도 흔한 일. 자기 몸의 반쯤 되는 양장본 동화책을 들고 방으로 걸어가다 책을 떨어뜨리기도 하는 일이 그야말로 허다하다.


영유아 책이 대부분 양장본이고 두꺼운 표지로 되어 있어, 책이 떨어지면 ‘쿵’ 소리가 절로 난다. 아이가 있으면 당연하게 들이닥치는 일상의 소음들을 904호가 원하는 수준으로 나는 제거할 자신이 없는 거다.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는 재택근무를 하고,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가정보육을 하는 상황.




최근 한 유명 개그맨의 아내이자 방송인인 M씨가 층간소음 문제로 SNS에 사과 글을 올린 것을 봤다. 문제는 M씨의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층간소음 좀 개선해달라는 댓글을 달았고, 그 댓글은 일파만파 SNS의 파급력을 타고 많은 이들의 피드로 도달했다.


M씨의 사과 글에는 오만가지 댓글이 달렸고, 댓글에 댓글, 댓글에 대 댓글이 꼬리를 물었다. 평소 층간소음을 낼 수밖에 없는 집과 층간소음으로 죽을 것 같은 집에 사는 불특정 다수가 떼로 몰려들어 왈가왈부했다.

대 댓글이 시작된 첫 뿌리 댓글을 찾았는데, 그 댓글은 M씨를 옹호하는 글이었다. “아이들이 뛰지 말란다고 말을 듣나요. 엄마 목만 터집니다”였는데, 댓글 부대가 이 말의 꼬리를 제대로 잡은 거다.

“목이 터지더라도 아이들을 뛰지 못하게 하는 게 맞다”부터, “애들이 저능아이거나 부모의 훈육이 부족하고 잘못됐거나”, “강아지들도 훈련시키면 이렇게는 안 뛴다”는 댓글들이 무성했다.


눈은 이 문장에서 멈췄다.

“아이들을 통제하고 야단쳐야 하는 거 아녜요? 코로나 때문에 날씨가 추워서 갈 데도 없다를 층간소음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이야기하시는 거 같아요. 누구는 갈 데가 있어서 층간소음 안 만드는 거 아니잖아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갈 데가 있어서 층간소음을 안 만드는 일’과 ‘갈 곳이 없어 층간소음을 만드는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코로나 시대의 층간소음이 갈 곳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는 일이었나. 하나의 의견일 뿐이었지만, 심지어 반려견, 반려묘와 비교당해야 하는 아이들은 번지수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은 무엇인지.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나오는 이들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강아지야, 너는 집에서 안 뛰는구나. 우리 집 애들은 뛰는데….”


대전에 출장을 다녀온 날, 손에 성심당 빵을 들고 퇴근했다. 904호로 내려가 초인종을 눌렀다. 중년 남성이 허겁지겁 마스크를 낀 채 현관문을 열었다. 그 짧은 한 층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마음에 가득했던 건 “나는 아이들을 뛰게 하는 엄마가 아니다, 성장 발달 과정에서 아이들의 뒤꿈치가 잘 안 들려지는 보행이 서툰 시기다. 너희는 조카도 없느냐? 고모도 이모도 그 무엇도 아니냐?”로 일관할 예정이었으나, 현관문 사이로 아이 없는 집의 조용한 정적이 현관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나는 곧장 그 공기가 전하는 조용함의 기본값을 이해하게 됐다. 우리 집의 조용한 기본값과 아이 없이 부부 둘이서 사는 그 집의 조용한 기본값은 애당초 그 값이 다른 거였다.


“제가 장문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우리 아이들이 뛰어서 강제로 기상하시고, 너무 힘드셨겠어요. 재택근무는 언제까지 하세요?”


조용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나는 헬륨가스를 마신 아줌마처럼 마음과는 다른 말을 뱉어 버렸다. 넉살 좋은 아줌마가 되어. 다만, 4살 된 아이의 발걸음은 온전치 못하며 수시로 넘어지고, 물건을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떨어뜨린다는 설명은 해주었다. 그리고 빵을 건넸는데, 배고픈 시간이어서 그런지 중년 남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돌아서는 내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까지 건넸다.


나약한 인간인지라, 그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원래의 내가 됐다. 나는 우리 집 공기가 익숙한 사람이니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다시 새롭게 다가온다. 사랑하려는 노력이 타인의 마음을 바꿀 순 없겠지만 사랑하면 마음이 편해져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편안하게 바라보게 된다는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서로의 아픔과 고생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봐주기라도 한다면, 가끔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이라도 할 수 있겠지.


작가의 이전글 방학이 준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