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을 즐기고 있을 당신에게
마흔의 문턱을 넘은 제가 가끔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옷에 딱 맞게 입었던 교복과 어두컴컴할 때 집에 갈 수 있었던 야자시간이 그리워서가 아니겠지요. 친구들과 종종 다투면서도 학업으로 나름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언제든지 원하면 자유로운 시간들을 꺼내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내 시간을 타인을 위해 할당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시절의 시간이 그리운 겁니다.
네, 네, 결혼식장에는 제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누가 등 떠밀지도 않았고, 옛날 그 시절 결혼이 유일한 탈출구였던 신파극이 통하는 시대는 아니니까요. 남편이요? 물론 사랑합니다. 지금도 여전히요. 남편의 살이 내 살 같고, 남편의 얼굴이 곧 내 얼굴로 여겨지는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시절입니다. 남편의 단점도 못난 것도 제 일부로, 고통스러워도 품고 싶어 지는, 중년 부부의 삶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남편도 저와 같은지는 물어봐야 알겠습니다.
마흔의 문턱을 넘은 제가 셋째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산부인과 병동에서 최고령 산모로 지내다, 며칠 전 조리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제왕절개를 하기 전날, 회진을 돌던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하시더군요. "원래 할수록 무서운 거예요, 파이팅!"
정말 그랬습니다. 할수록 알수록 두렵다고 했던가요. 수술대에 올라가 마취 주사를 맞고, 두 다리가 소실되는 듯한 신비한 마취의 고통 속에서 셋째 '희망이'가 세상으로 조그마한 발을 내디뎠습니다. 남편은 휴가를 내고 이미 세상에 태어나 뛰어노는 9,6살 두 아들을 돌봐야 했기에 산부인과 병동에서 보호자 없이 시간을 견뎠습니다. 제왕절개 수술 후 부축해주는 보호자 없이 병실에서의 4박 5일은 엄청난 사고를 당한 후 첫 발을 떼내야 하는 첫 재활의 무게만큼 무거웠습니다. 병상에서 홀로 일어나 처음 화장실에 가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렸으니까요.
지금은 조리원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끊임없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듣기란 또 얼마나 새롭게 낯선 일인지요. 첫째와 둘째 때와는 달라진 게 있다면, 제 마음에 여유 한 줌이 스며 들어온 것이라고 할까요. 전에는 조리원 생활을 할 때 잘 짜인 스케줄을 충실하게 잘 따르는 산모였습니다. 스케줄을 따르지 않는다거나 더 게을러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덜 다급해지고, 더 편안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신생아와 같이 지내는 모자동실 시간이 끝나면 잠든 아기를 번쩍 안아다 신생아실에 데려다주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옆에서 그냥 기다려줍니다. 이 지점에서 무얼 떠올리게 되냐면. 이런 겁니다.
젊은 엄마와 나이 든 친정어머니 혹은 시어머니의 양육 방식이 늘 서로 달라서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9년 동안 경험하면서 느낀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참 달라진 것들이 있더란 겁니다. 9년 동안의 시간 속에서 저는 가끔 젊은 엄마이기도, 나이 든 할머니 같은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는 겁니다. 한 사람에게서도 시간의 숙성으로 다른 모습이 나오는데, 세대 차이가 나는 두 사람에게서 나오는 다른 모습들의 양상은 얼마나 넓고 광범위한지요. 인간 세상에서 갈등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게 맞는 가 봅니다.
두 아이 양육하면서 가족 간 갈등이 있었느냐고요? 네, 그럼요. 친정어머니가 오실 때, 시어머니가 아이 돌보러 오실 때 두 분의 양육방식이 달라서 무척 어려웠죠. 두 분의 공통점이라면, 젊은 엄마인 제 의견이 쉽게 무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셋째는 양가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제 안에도 양가 부모님의 다른 두 모습이 혼재해있고, 원래 젊은 엄마였던 저도 늙어가고 있더라는 겁니다. 물론 양가감정 같은 인간의 두 모습을 내치지는 않습니다. 두 모습 다, 저 인걸요.
인간이 인간을 만나면서, 먼저 앞서서 태어난 인간이 뒤에 태어난 인간을 헌신적으로 길러내면서, 인간은 성장합니다. 뒤에 태어난 인간은 앞서 태어난 인간에게 사랑의 빚을 듬뿍 지었고, 곧 다가올 생명을 길러야 하는 사랑의 빚을 갚을 차례가 닥쳐오고야 말 것입니다. 인류의 대서사시는 이렇게 작은 방에서 한 여름의 땀을 닦아내며 이어져오고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