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닌 삶을 갈구하며 뛰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엄마가 되기 전에는 무엇을 주제로 글을 써왔나 싶을 만큼 엄마가 아니었던 시절이 그저 까마득하다. 물론 엄마가 되고 나서 삶의 바탕이 되는 생활의 어휘는 다양하게 그러나 좁디좁게 ‘엄마’를 주제로 한 우물을 파는 글을 향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로 살아가게 된 일이 놀랍고 신비로우며 환희와 기쁨을 가져다주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환희와 기쁨 사이에는 경멸, 증오, 짜증, 무력감이 밀푀유나베처럼 배추와 배추 사이에 낀 고기처럼 그렇게 한자리를 턱 하니 차지 한다는 사실이었다.
삶의 고통은 가장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될 때 경감된다는 책의 어느 구절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고통의 칡뿌리를 갈아 마시는 사람처럼, 두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틈틈이 메모장에 연습장에 육아가 내 삶을 얼마나 비틀어놓았는가를 고발하는 글을 써댔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책 한 권까지 나왔으니, 책 제목은 ‘엄마일기’. 육아의 고됨을 책 한 권으로 쏘아 올린 내 자신을 자랑스럽고 기특하게 여겼는지 모르겠다. 육아라는 것도 하나의 목표와 주제로 수렴되지 않으면 성취감을 느낄 수 없어 육아 담당자는 무기력에 빠지기 마련인데, 나는 그 무기력의 힘에 대한 방패로 글을 써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돈이 되지 않고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고, 보상이 없는 일에 매달리는 일이 인간에게는 쉽지 않다. 이 사회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는 건지 개개인이 그렇게 향해 달려가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많고 많은 신간 육아서들이 서점 진열대에 놓인 걸로 보아 육아라는 영역이 인간에게는 결코 쉬운 분야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나는 지난해 셋째를 출산했고 다시 옹알이와 앉기, 기어 다니기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를 곁에 두게 됐다. 쉽지 않은 여정 속에서 나는 가장 쉬운 육아를 하고 싶다는 욕구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내 몸에는 이유식 설거지하다가 튄 얼룩, 아기가 흘린 밥풀이 붙어있지만 그 모든 것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어서 뛴다. 앞치마를 훌훌 벗어버리고 운동화끈을 조여매고 달리기 시작하면 앞치마를 훌훌 벗어진 속도보다 더 빠르게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깊은 호흡, 땀, 바닥에 닿았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발바닥의 뜨거움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준다. 또 뛰다 보면 몸이 가벼워지고 생각이 가벼워져서 집에 돌아가 난장판인 부엌을 봐도 다리 근육처럼 마음의 근육도 단단해져서 ‘이것쯤이야’로 넘겨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는 생존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