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난장판...
아주 작은 일에 참 쉽게 불이 붙는 사람이 있다. 작은 성냥개비 하나를 던졌을 뿐인데 그 작은 불은 화약고에 불을 붙인 듯 활활 타오른다. 나는 적어도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내가 삶아온 생에서 그렇게 많이 인내하고 버텨내야 하는 일이 많이 없기도 했거니와 나름 화를 잘 참는다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아들 셋을 낳고 알았다.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내심이라는 그릇의 크기는 터무니없이 초라했다.
좋아서, 원해서 낳았다. 셋째를. ‘혹시 셋째가 딸은 않을까’ 기대하면서 임신, 출산을 강행하지 않았다. 작년 여름, 세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마흔 하나에. 초등학생 큰 아들과 유치원생 둘째 아들 틈으로 작은 아기가 들어왔다.
막내가 자는 시간이 길었던 신생아 시기에는 좀 할만하다 싶었다. 두 형들은 혼자서 옷 입고 밥 먹기가 충분히 가능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막내가 고개를 들고, 뒤집고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육아는 그야말로 마라탕 3단계맛으로 상승했다. 남편은 밤 늦은 근무로, 아침에는 자야했으므로 혼자 아들 셋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이 고단했다. 미칠 지경에 가까웠다. 울다가 웃다가 화를 냈다가를 반복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큰 아이가 큐브 맞추는 걸 봐주며 “대박 잘한다”는 리액션을 해주면서, 소파에서 뛰어내리는 둘째를 말리면서, 보행기에서 안아달라고 우는 아기까지. 동시다발적으로 팔다리를 쓰면서 동시에 정신적으로 영혼도 털려 나가는 그런 경험이었다.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다 아이 셋이 잠들면 나는 순한 양이 됐다. 나를 해치러 온 사냥개들도 아닌데, 마치 그들이 물러난 평온한 들판에 홀로 남아 산들바람 한 줌을 쐬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 육퇴의 맛이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막내의 자그마한 손바닥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고, 동생이 생겨 자동으로 형의 자리로 올라간 두 아들의 이마를 쓸어주며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통통한 볼은 구운 계란처럼 탱탱했다.
그러니까 나는 참 쉽게 불이 붙는 사람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알았다. 통제와 조절이 필요할 때 나는 힘을 꽉 주거나 확 푸는 것은 익숙했지만 항상 그 가운데 어디서쯤 헤맸다. 적당히 나사를 조이고 푸는 일을 몰라서, 감정도 그렇게 왔다갔다 했다. 화가 끝까지 나서 뚜껑이 열리거나, 아예 체념을 돌아서서 침묵하는 양극단의 감정을 쉽게 오갔다. 세상에서 가장 짧고 쉬운 길인 듯.
3개월째 대기 중이었던 아이돌보미 서비스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돌보미 선생님이 배정되었다고. 설거지를 마치고 고무장갑의 물기를 털며 생각했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요즘 아무리 출산을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라고 한다지만, 분명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돌보미 선생님은 거룩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느 소설가가 “소방관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면서, “남의 재난에 몸을 던져 뛰어드는 직업은 거룩할 수밖에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 생이 다른 생을 구하러 온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선생님은 따뜻했다. 두 자녀를 키워본 ‘엄마 경력’은 보증수표였으며, 아기들도 돌보미가 자신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인지 다 안다고 하셨다. 아기가 잠들 때 곁에서 아기를 가만히 보고 계시는 선생님의 따뜻한 돌봄에 여유 없던 내 일상에 햇살 한 줌이 내비쳤다.
우리 집에 생명을 구하러 오신 선생님의 돌봄으로, 나는 알았다. 세 아들과 봄의 꽃나무 아래에서 뒹굴며, 찬란하고 눈부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즐기지 못하고 그저 치워야 할 꽃잎들, 더러워진 옷을 보느라 제대로 이 순간들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