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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Dec 30. 2021

[한국사] '현모양처'에 가려진 능력자 신사임당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신사임당은 1504년 10월 29일에 태어나 1551년 5월 17일에 숨을 다했으니 채 50년을 살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 알려졌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본명이 따로 있다는 것은 '사임당(師任堂)'이 이름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임당이라는 호는 스스로 지었는데 이는 중국의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의미로 앞글자만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여성들이 따로 지내는 별채를 당(堂)이라 불렀기 때문에 '사임당(師任堂)'이라고 스스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고려 개국 공신인 신숭겸의 먼 후손이기도 하고, 고조할아버지 신개는 세종 시절 좌의정까지 했던 집안입니다. 할아버지 신숙권도 영월군수를 지냈지만 아버지 신명화는 다른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진사에 그칩니다. 하지만 신명화는 딸에게도 한자와 성리학을 가르칩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고 재능이 뛰어난 사임당은 아버지가 각별히 아꼈다고 전해집니다. 성인이 되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이원수와 결혼을 합니다. 이때만 해도 사위가 처가에 머물러 지내는 관습이 남아있어 이원수가 처가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라고 표현하는 말이 이런 풍습 때문입니다. 


결혼한 그 해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친정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강원도 강릉에 있는 친정에 자주 내려가기 시작해 나중에는 그냥 친정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 친정이 바로 '오죽헌'입니다. 친정에서 아버지 3년 상을 마친 후 한성으로 올라갔지만 시댁이 있던 파주에서도 지냈고, 강원도 평창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교통이 쉽지 않았던 옛날에 한성과 강릉을 오가기 어려워 중간 정도 되는 평창에 살 곳을 만들기도 한 것이죠. 

남편 이원수 사이에 자녀는 여덟입니다. 5남 3년 중 가장 유명한 아이가 셋째 아들인 이이입니다. 지금도 오죽헌에는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중 1명으로 추앙받는 율곡 이이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다섯째 아들인 이우 역시 정 3품으로 관직 생활을 했고, 큰 딸 이매창은 시와 그림으로 유명한 재주꾼입니다. 이매창은 작은 신사임당이라는 의미로 '소사임당'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고액권인 5만 원권의 주인공인 신사임당. 조선시대 다른 유명한 여류 인물들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장녹수 등에 비교해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존경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현모양처를 단순히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출세시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신사임당은 이원수와 결혼 후 8남매를 두었지만 남편인 이원수는 과거에서 번번이 낙방합니다. 공부를 위해 10년 간 별거를 약속하며 보냈지만 이원수는 아내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되돌아왔고, 신사임당은 그런 남편을 많이 나무랍니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비구니가 되겠다는 협박까지 하며 남편이 다시 공부하도록 만들었죠. 남편 이원수는 결국 과거가 아닌 음서(蔭敍) 제도로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 이원수가 바람을 피울 때도 해박한 지식으로 조곤조곤 나무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원수는 바람도 피우고 끝내 첩까지 들입니다. 현모양처에서 흔히 생각하는 순종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죠. 


글과 그림에도 뛰어난 능력을 가졌습니다. 7살 때 어머니의 자수를 보고 흉내 내는 것을 본 외할아버지가 안견의 산수화를 사줍니다. 어린 신사임당은 그 그림을 교재로 삼아 열심히 실력을 키웁니다. 

어른이 된 어느 날 잔치집에서 국을 나르던 하녀가 실수로 넘어지며 어느 부인의 치마가 젖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부인은 빌려온 치마라 매우 난처했는데 신사임당은 그 치마에 그림을 그려주었고, 치마는 원래의 가격보다 더 비싼 값에 팔려 해결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풀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 역시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림 속의 벌레를 본 닭이 그림을 쪼았다는 초충도는 아들인 이우가 그린 초충도입니다. 


자식 교육에 헌신적인 이미지로도 알려져 있지만 신사임당 특유의 자식 교육에 대한 것은 따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8명의 자식 중 셋째인 이이가 15살이 되던 해에 신사임당은 심장병으로 고생을 시작합니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이미 남편의 외도로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심장병이라는 큰 병까지 얻게 되어 힘든 상황에 아직 어린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 특별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죽자 남편인 이원수는 첩인 권 씨를 본댁으로 들이며 아들과 마찰도 일으킵니다. 이때 15살의 이이는 아버지에 반발해 승려가 되겠다며 출가를 하기도 합니다. 셋째인 이이가 15살이니 그보다 동생들인 이우나 이매창은 더 어린 나이입니다.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이이, 이우, 이매창 등의 능력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자리보다는 본인의 노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사임당은 2009년에 새롭게 출시될 고액권인 5만 원권을 만들 때 화폐 인물로 선정됩니다. 당시에 최종 후보로 신사임당과 장영실이 올랐는데 당시에 여성계에서 반발이 컸습니다. 그 이유는 신사임당의 개인 능력이 아닌 현모양처 이미지를 부각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성계는 유관순을 후보로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이전 화폐 인물들이 모두 남성인 점을 생각했을 때 여성 인물이 화폐 인물이 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큰 이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구려와 백제 건국의 소서노를 비롯해 신라의 선덕여왕, 제주의 거상 김만덕과 일제강점기 만세운동의 상징 유관순도 있는데 왜 굳이 '현모양처' 이미지를 고집하는 것인가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사임당을 추대할 때도 조선시대 뛰어난 문인이자 화가로 추대가 되었다면 조금 나을 수도 있었겠죠. 


신사임당은 친정에서 오래 생활을 하며 절대 가부장적인 사회에 순종적이지도 않았는데 어쩌다가 순종적인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아들인 이이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가 되었기에 자식 교육을 잘 시킨 어머니이고, 조선시대이니 당연히 시댁에 순종했을 것이라고 오해한 탓은 아닐까 생가해봅니다. 

역사와 인물들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그동안 배웠던 것들에 대해 한번 정도는 의문을 품고 다시 생각할 것들이 꽤 많습니다. 삼천궁녀의 오해를 받은 의자왕처럼 신사임당도 개인의 뛰어난 능력이 그저 자식 교육을 잘 시키고 남편과 시댁에 순종하는 이미지의 현모양처라는 허울에 가려진 것이 가끔은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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