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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Aug 12. 2022

벼슬 없는 영웅들 '의병'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592년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항복을 받아내며 사실상 일본의 일인자가 됩니다. 그리고 못된 망상에 사로잡혀 칼 끝을 일본 밖으로 돌리게 되니 그게 바로 임진왜란입니다. 

100년이 넘는 내전으로 실력이 다져진 왜군들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초기에 관군들은 맥없이 무너지고, 왜군들의 진격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물론 선조가 도망간 것 역시 왜군들의 상상을 초월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군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은 또 있습니다. 바로 관군이 아닌 평민들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만들어 대항하는 모습입니다. 일본은 사무라이 체계가 만들어지며 무사 계급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에 평민이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을 생각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정규 관군은 아니지만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군사행동을 하신 분들을 우리는 '의병'이라 부릅니다. 

수많은 의병들이 계셨고, 이름도 남기지 못하신 분들도 많지만 오늘은 노래에서 들려주는 두 분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 홍의장군 곽재우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는데,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송나라의 뛰어난 유학자인 팔 학사 중 한 명인 곽경(1117~1179)으로 고려에 귀화를 한 중국인입니다. 곽경은 1138년 고려에서도 과거에 급제를 했고,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어도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하며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해왔습니다. 곽재우는 영남의 유명한 유학자인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고, 나중에는 조식의 외손녀 사위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번번이 낙방합니다. 그러다 1585년(선조 18년)에는 별시문과의 정시 2등으로 뽑혔지만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상하게 해 합격이 취소되기도 합니다. 곽재우는 그때부터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지냅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은 부산 동래에 상륙해 2갈래의 방향으로 나누어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7군 3만 명은 경상도로, 고바야가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6군 1만 5700명은 전라도로 향합니다. 경상도를 점령하는 부대는 그대로 한양까지 진격하는 주력부대라면 전라도 방향으로 온 부대는 곡창지대를 점령해 보급을 담당할 계획이었습니다. 

전라도 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남강을 지나는데 곽재우는 왜군의 침략 소식을 접하고 바로 병사들을 모아 매복을 하고 기다렸다가 왜군을 전멸시킵니다. 이 전투는 정암진 대첩이라 부릅니다. 정암진은 남강 줄기 중에서 의령 부근에 있는 곳으로 곽재우가 선조에 의해 합격이 취소되어 낙향해 낚시를 하며 마음을 추스르던 지역입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오랜 기간 동안 식량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쟁에서 식량은 현지 조달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면 군대가 이동하는 길목의 모든 마을이 식량을 강제로 군대에게 빼앗기기 때문에 해당 지역 전체가 초토화됩니다. 왜군 역시 한반도에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점령해야 보급이 무난하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곽재우가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인 남강 정암진에서 막아버렸기 때문에 왜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잠시의 휴전 이후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왜군이 다시 침략할 기미를 보이자 조정은 곽재우를 경상좌도 방어사라는 직책을 주며 방어하게 합니다. 곽재우는 창녕의 화왕산과 현풍의 석문산에 성을 쌓고 방어를 준비합니다. 왜군은 처음에 창녕으로 공격하지만 여의치 않아 전라도로 진격하는 부대와 합류하기로 합니다. 이때 왜군을 이끌던 자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가등청정)는 화왕산을 지키는 장수가 곽재우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군사를 돌렸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임진왜란 때는 정암진 대첩으로 1만 5천이 넘는 왜군의 진격을 막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성에서 6만의 왜군의 진격을 막은 곽재우는 전쟁이 끝나기 전인 1597년 계모 허 씨가 사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 3년 상을 치릅니다. 상중에 전쟁은 끝났고 1599년 경상우도 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고, 같은 해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특별 승진되었지만 다음 해인 1600년에 다시 고향으로 낙향합니다.  

1604년부터는 창녕 낙동강변에 망우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지냅니다. 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도 죽고, 죄 없는 김덕령은 모함으로 죽는 것을 본 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와 수군통제사 등의 고위 무관직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사양하다 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2. 중봉 조헌


1544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부터 글을 읽었고, 21살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23살이 되는 1567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수재입니다. 하지만 1572년에 왕의 불공이 잘못되었다고 말해 파면됩니다. 조선은 유교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도 못마땅해서 절들이 산으로 숨어 들어가야만 했던 시대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왕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불교에 대해 긍정적인 행보를 보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선비들에게는 질책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2년 뒤에 질정관이라는 관직을 받으며 정계에 복귀하여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東還封事)라는 책을 씁니다. 질정관(質正官)은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중국에 가서 물어보는 역할을 하는 임시 벼슬입니다. 동환봉사는 명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소개한 것으로 조헌은 이 책을 통해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공·사노비를 양민으로 만들어 징병 자원을 증대시키면 20년 뒤 100만의 정예 병사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도 함께 펼칩니다. 그렇지만 경기도 통진(通津, 현재 김포시 통진읍) 현감으로 재직 중 법을 어긴 공노비를 취조하는 도중 노비가 죽어 부평으로 귀양을 갑니다. 

이후 율곡 이이 등의 선비들과 친분은 유지했지만 관직에 복귀하고 파면되기를 몇 차례 더 반복하다 충북 옥천으로 내려가 살게 됩니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게이테스 겐소를 보내 명나라를 공격하자는 뜻을 밝히자 조헌은 겐소를 죽이고 전쟁에 대비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조헌은 따로 준비를 하였고, 다음 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바로 의병을 일으킵니다. 왜란 초기부터 의병을 일으킨 분들이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에서는 곽재우, 정인홍. 호서에서는 조헌입니다. 

조헌의 의병활동은 옥천에서 시작해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홍성으로 지역을 옮기기도 하다 승병인 영규와 힘을 합쳐 청주성을 수복하는 등의 큰 전과를 올립니다. 문제는 청주성 수복 이후부터 관군의 시기와 방해가 더 심해졌다는 점입니다. 이미 보은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해 전과를 올릴 때부터 순찰사 윤선각의 시기 때문에 홍성으로 옮긴 것인데 관군이 못해낸 일을 의병이 해내니 관에서의 시기는 더욱 심해지고 결국 활동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관군은 나름대로 이유는 있습니다. 싸울 수 있는 장병들이면 군대에 입대해서 정식으로 나라의 군대로 싸우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무기도 관에서 방출한 것들이 많으니 이제는 더 이상 따로 싸우지 말고 관군으로 입대하기는 종용하지만 의병들이 따르지 않고 따로 싸우고 있어 불만의 소리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병들의 입장에서 보면 관군으로 싸워야 하는 정식 전투가 있는가 하면 게릴라 방식으로 전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의병들의 전투는 대부분이 소규모로 치고 빠지는 방식의 전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조헌의 경우에는 전면전 형식의 전투를 진행합니다. 청주성 탈환 이후 선조가 피난을 간 의주로 북상하려 했지만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많이 흩어지고 700여 명의 병력이 남습니다. 금산에 진주한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히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권율 장군과 함께 협공을 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권율을 현재 상태로의 전면전은 불리하다는 생각에 계획의 수정을 요구하며 합류하지 않습니다. 조헌은 권율의 정규군이 없는 상태로 승병 영규가 이끄는 2,000여 명의 승병과 함께 금산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고 맙니다. 지금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이 바로 조헌과 700여 명의 의병들이 전사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영규와 2,000여 명의 승병들이 빠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승병들도 우리나라를 위해 함께 싸웠고, 함께 전사를 했는데 선비인 조헌의 의병만 기억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조헌의 위패를 모신 옥천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이 하사됩니다. 그리고 1648년(인조 26년)에는 김포의 생가터에 서원이 건립되고, 1675년(숙종 1년)에 '우저(牛渚)'라는 편액이 하사되어 지금 김포에는 우저서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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