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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Aug 15. 2022

조선을 살린 두 분의 충무공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조선시대에 외부의 적이 침략해온 큰 두 번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중 첫 번째인 임진왜란은 정확히 말해 임진년에 침략한 임진왜란과 잠시 휴전 후 정유년에 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으로 나뉘어야 하지만 우리는 통칭 그냥 임진왜란이라고 표현합니다. 7년 동안 이어진 이 참혹한 전쟁에서도 조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시호가 충무공으로 같은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바다의 영웅이고, 다른 한 분은 육지의 영웅이죠.


1. 이순신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의 한 문반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는 서른 살이 넘은 조금은 늦은 나이인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합니다. 그의 이름은 이순신으로 이후 삼군수군통제사.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해군참모총장과 비슷한 지위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관직 초기에는 북쪽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여진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다 전라관찰사인 이광에게 발탁이 되어 전라도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고, 1589년 당시 정읍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유성룡의 눈에도 띄게 됩니다. 이후 유성룡은 선조에게 이순신을 적극 추천했고 엄청나게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됩니다. 승진의 과정을 잠시 살펴보면 1589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를 통해 한 번 승진을 했는데 다음 해인 1590년 8월에 종 3품으로 승진하려다 진급이 너무 빠르다는 이유로 잠시 멈춥니다. 하지만 몇 달 뒤인 1590년 12월에 미리 종 6품인 정읍현감으로 발령 나는데 이는 1591년 2월에 종 4품 진도군수로 임명할 예정이니 단계를 거치기 위한 임시 과정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발령지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종 3품인 가리포 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고, 가리포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정 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됩니다. 유성룡에 눈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이루어진 초고속 승진으로 요즘에 맞게 비유를 하자면 대위에서 별을 달기까지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전라도 수군의 총책임자가 되어 1년 동안 거북선을 비롯한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면서 전쟁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초고속 승진을 강행한 선조는 정작 이순신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고, 실제 만난 적도 없다고 합니다. 

 1592년 5월 1일(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여 척이 오후 5시 정도에 부산을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되고 이후 정유재란까지 7년 동안 이어진 전쟁. 이순신은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의 첫승을 시작으로 1598년 음력 11월 18일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2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둡니다. 이를 두고 '이순신은 이기는 전투만 한다'며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짜는 '이길 수 있게 만들고 전투를 한다'라고 보아야 합니다.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참패를 한 것만 봐도 지휘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죠.

 전투 승리의 횟수를 두고선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해군사관학교의 제장명 교수는 지난 2007년에 23전 23승은 드라마에서 나온 이야기이지 실제로는 '43전 38승 5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제장명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해전 횟수는 총 47차례이고 그중 이순신이 참가한 해전은 43차례라고 합니다. 이후 2012년에는 난중일기와 선조실록 등의 자료를 다시 조사한 결과 이순신의 총전적은 '45전 40승 5무'로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제장명 교수는 수군이 한 번 출전해 귀환할 때까지 치러지는 대표 해전과 일시 장소를 다르게 대응하는 세부해전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첫승을 거둔 옥포해전은 대표 해전 1회에 세부해전 3회로 기록합니다. 이렇게 나누면 이순신은 임진왜란 대표 해전 21회 중에 17회, 세부해전 49회 중에 45회에 참전했기 때문에 23전 23승이라는 말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순신은 전쟁 중에도 기록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특히 전쟁 중인 1592년 2월 13일(음력 1월 1일)부터 노량진에서 전사하는 1598년 10월 16일(음력 9월 17일)까지 2,539일 동안 총 7권의 일기와 서간첩 1권, 임진장초 1권 등 9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전쟁에 대한 단순 기록에서 그치지 않고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 기록은 정조 19년(1795년)에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2013년 6월 18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정되었습니다. 


영국인에게 Nelson과 견줄 수 있는 해군 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영국 해군 준장,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참전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뿐 그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 川田功 )>


2. 김시민


임진왜란 때 벌어진 전투 중에서 우리가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 3개를 말할 때 흔히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진주성 대첩을 말합니다. 진주성에서 큰 전투가 2번 있었는데 그중 첫 번째 전투에서의 큰 승리는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 전투를 이끈 사람이 바로 충무공 김시민입니다. 

진주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전쟁에서 전투병력만으로는 전투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우선 병사들이 먹어야 할 식량이 필요하고, 싸울 무기나 방어구와 같은 보급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이야 전투식량과 같은 것이 개발되었지만 옛날 전쟁에서는 식량을 거의 현지에서 조달한다고 보면 됩니다. 전투 병력이 5만 명이라고 했을 때 그 인원이 매일 먹을 수 있는 쌀과 다른 음식들을 출발할 때 챙겨본들 충분하게 가지고 갈 수도 없었고, 이동하기에도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역시 보급, 특히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호남의 곡창지대를 점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해군이 막았고, 육지에서는 바로 김시민이 진주성에서 막았기 때문에 실제로 싸우는 병사들의 힘을 많이 뺄 수 있었습니다.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무진주 무호남, 無晉州 無湖南)’ 이 한마디로 진주의 전략적 가치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호남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은 두 차례나 진주를 공격했습니다. 1592년 1차 전투는 3800여 명의 조선군이 장장 6일간에 걸쳐 일본군 3만 부대를 물리쳐 대승을 거뒀고, 이듬해 2차 전투는 9일간 무려 10만의 대군을 동원한 일본과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함락됐다. 하지만 성을 함락시킨 일본군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호남 진출을 포기해야 했다.

특히, 진주성 1차 전투가 가진 또 하나의 의미는 개전 이후 연일 패퇴만 거듭하던 조선 육군이 대규모 육상 전투에서 처음으로 이긴 전투라는 점입니다. 

이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충무공 김시민은 1578년에 음서제도를 통해 관직 생활을 시작해 1581년에는 부평 부사가 됩니다. 하지만 흉년에 백성들의 구휼에 힘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583년에 함경도에서 여진족 정벌의 공을 인정받았고, 다음 해인 1584년에는 무과에 급제를 해 다시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훈련원의 판관으로 있을 때 병조 판서에게 병기 수선과 군사 훈련에 대해 건의했지만 평화로운 시기에 군사력을 강화할 필요가 없다고 오히려 질타를 받게 되자 화를 참지 못해 사직해버립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년 전인 1591년에 진주 판관으로 발령받아 진주로 가게 되었고, 전쟁이 시작되자 진주목사인 이경과 지리산으로 피신했다가 이경이 병으로 죽자 초유사인 김성일의 명령으로 진주목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진주로 다시 돌아와 진주 전체를 총괄 책임지게 된 김시민은 바로 성채를 보수하며 사람들이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사람이 모이자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과정은 더 탄력을 받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성벽을 보수하고,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진주 밖으로는 함께 항전하는 세력들과의 공동 전선을 준비합니다. 먼저 곤양 군수 이광악과 상주 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합니다.

이어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을 이끌고 가서,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군을 맞아 승전하였으며, 이 공으로 1592년 음력 7월 26일에 진주목사로 관직을 승진 제수받게 됩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진주를 지나 호남을 점령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1592년 11월 8일(음력 10월 5일)에 다시 2만 대군이 진주성을 공격합니다. 성이 포위되자 김시민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여자는 모두 남장을 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조직된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쳐 퇴각시켰습니다. 조선군의 위대한 승리였다. 하지만 1592년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마지막 날의 전투를 끝내고 전장을 둘러보던 중 김시민은 시체 속에 숨어있던 한 왜군의 총에 왼쪽 이마를 맞고 쓰러지고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에 39살의 나이로 전사합니다.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봉해졌으며, 상락군(上洛君)에 추봉 됩니다.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고, 1702년(숙종 35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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