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1. 3·1운동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전후처리 원칙 14개 조항 중에 나라로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합니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 민족자결주의인데 윌슨은 이 내용을 1차 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 적용할 생각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다시 승전국들이 나눠 갖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길 수 있으니 그냥 독립시키자는 의견이라 당시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의 정신은 전 세계로 퍼졌고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소식은 전해졌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유학 갔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먼저 움직였고, 결국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됩니다.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시작된 '2·8 독립선언'이후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손병희를 중심으로 동학의 정신을 잇고 있는 천도교가 주축이 됩니다. 독립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이라는 3대 원칙을 정한 후 불교, 기독교, 유림 등 다른 교단으로 연락을 취합니다. 만해 한용운이 주축이 된 불교와 개신교 세력은 바로 합류를 했지만 유림 세력은 당시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처음에는 강력하게 결집하지 못하고 나중에 따로 움직였습니다. 천주교 세력은 흥선대원군의 박해로 인한 앙금도 일부 남아있었고,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한국의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공식적으로 참여는 하지 않았습니다. 국내의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고종황제가 68세의 나이로 갑자기 붕어를 합니다. 당시 건강했는데 갑자기 붕어를 하고, 중병에 의한 붕어라는 발표가 있자 사람들은 독살에 의한 살인이 아닌가 의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D-day로 잡은 날이 바로 고종의 장례식 날짜인 1919년 3월 1일입니다.
비폭력 원칙을 지킨 만세운동은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가 106만여 명이었으니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파가 함께한 대대적인 독립운동입니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잔인한 진압으로 미국 지식인들이 일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었고, 조선총독부 역시 통치의 방법을 바꿉니다. 철저한 강압 통치를 벗어나 단체 활동과 언론, 초등교육 등을 허가하기 시작됩니다. 이를 문화통치라 부르지만 속내는 친일파 양성을 통한 한민족의 분열 조장 정책입니다.
그리고 만주와 상하이로 넘어간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제정하고, 9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합니다. 이때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결정합니다.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비폭력 독립운동은 해외의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인도입니다.
2. 인도의 간디
인도는 300년 정도 지속된 무굴제국이 산업혁명 이후 신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없애고 인도제국을 세우며 직접 통치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시기에 인도의 작은 공국인 포르밴더의 총리의 셋째 아들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영국 런던 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1890년에 중퇴를 했지만 1891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습니다. 이후 년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인도로 귀국해 노동운동과 민족 해방 독립운동 지도에 전념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 이후 독립시켜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영국을 지지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영 운동을 하면 체포영장 발부와 같은 절차 없이 무조건 체포할 수 있는 롤래트법(Rowlatt Act)이 제정됩니다. 이후 간디는 1919년 봄부터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하며 비폭력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1922년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출옥하고, 1925년에는 국민 회의파 의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1942년에 다시 투옥되었고, 석방 이후에도 계속 인도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간디는 신실한 힌두교도이지만 같은 민족이 이슬람과 힌두교로 나뉘어 서로 싸우지 않게 노력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7년에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끝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가 됩니다. 두 종교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급진적인 힌두교도에게는 이슬람의 편을 드는 것으로 보여서 1948년 1월 30일에 뉴델리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암살당하고 맙니다.
간디는 1930년에 미국의 타임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고, 노벨 평화상에도 4번이나 후보네 올랐지만 수상은 못했습니다.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유명한 시인 타고르는 간디를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을 담은 '마하트마(Mahatma)'라고 노래했고,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를 맡으면서부터는 마하트마 간디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디의 생일인 10월 2일은 인도에서는 국경일이고, 전 세계적으로는 국제 비폭력의 날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3. 발트 3국의 발트의 길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소련은 공산주의 사상을 앞세워 주위의 나라들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는 1944년에 강제로 병합된 발트 3 국도 있습니다. 발트 3국은 유럽의 북쪽에 있는 발트해에 있는 나라들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를 말합니다. 이 세나라는 1939년 독일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이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각자의 지배 영향권을 서로 인정하면서 소련으로 흡수된 나라들이며 다시 독립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소련의 경제가 힘들어지고 연방에 속해 있는 나라들의 불만도 쌓여가는 시기인 19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당선됩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 부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개혁 개방 정책을 해야만 했고, 개혁 개방 정책은 각 연방 국가의 민족주의 운동도 자극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1986년에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는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 사고까지 발생합니다.
여러모로 소련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 발트 3국은 다시 독립을 요구하지만 고르바초프는 통제를 풀어주되 분리 독립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87년이 되자 소련 내부에서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선거도 비밀투표를 통해 다수의 후보들 중 한 명을 뽑아야 한다는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발트 3국은 독소 불가침 조약 48주년이 되는 8월 23일에 대대적인 강제 병합 반대 시위를 펼칩니다.
1988년에는 발트 3국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이 매우 약해지고, 인민전선을 만들어 정치적인 준비부터 국기와 언어를 정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 준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198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강제 병합의 발단이 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
발트 3국에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가로지르는 675.5km의 인간 사슬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기준으로 세 나라 인구의 합이 약 500만 명인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움직일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 시위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한 인간 띠를 '발트의 길' 또는 '발트의 자유의 고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0년에 발트 3국은 모두 독립해 지금의 독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1990년에는 발트 3국 이외에도 몰도바, 아르메니아, 조지아도 모두 선거를 통해 독립했습니다.
소련 역시 고르바초프 다음으로 공산당의 서기장이 된 보리스 옐친이 1991년에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바로 독립을 선포하며 무너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