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 역대기서를 보면 역대 왕들을 평가할 때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내용이 있는데, 바로 "산당(High Place, בָּמוֹת)"입니다.
산당을 제거했다, 혹은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표현이 되는데요.
이 산당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말 그대로 '산당'은 높은 곳(주로 산 위)에 마련된 제단이나 예배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 이 산당이라는 것은 딱히 부정적인 곳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성전이 만들어지기 전, 고대 이스라엘 시대 - 이를 테면 아브라암/이삭/야곱의 시대 -는 높은 지대에 돌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때에는 제사의 방식과 절차에 대한 율법도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죠.
이런 풍습은 율법이 주어지고 언약궤와 성막이 주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 사무엘 역시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거든요.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오셨나이다
당신들이 성읍으로 들어가면 그가 먹으러 산당에 올라가기 전에 곧 만나리이다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그러므로 지금 올라가소서 곧 그를 만나리이다 하는지라
그들이 성읍으로 올라가서 그리로 들어갈 때에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 나오더라
(삼상 9:12~14)
이 때에는 산당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로써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 성전 이후의 산당 - 혼합주의
그러나,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건축된 뒤에는 산당은 부정적인 의미로 변합니다.
첫째로, 산당이 가나안의 우상 숭배 신앙과 여호와 신앙이 섞이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나님에 대한 제사가 드려지는 때에, 산당에서는 당시 가나안 민족들의 이방신 대한 숭배가 같이 이뤄졌던 것이죠.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왕상 11:6~7)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서 왕실의 종교행사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국가 의례와 같은 행위로만 남게되고, 일반 백성들은 산당에서 자신들의 토속적인 가나안 신앙으로 섬기는 현상이 굳어지게 됩니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나라의 근본 종교는 유교였지만 백성들은 자신들이 대대로 섬겨왔던 불교나 무속신앙을 계속 따랐던 것과 비슷하죠.
그렇게 되면서 왕실에서 이뤄지는 여호와 신앙은 점차 형식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악한 왕이 들어섰을 때는 그런 형식적인 제사마자 끊어지고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하고 낡아버리기 까지 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성경에서 한 왕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산당을 제거했다,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계속 평가를 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언급했고, 앞으로도 다루겠지만, 남유다 왕국에는 '선한 왕'들이 있습니다.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같은 왕들이 그들인데요. 그들은 개언적으로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찾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평가의 마지막에는 항상 '그러나 그들은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로 끝이 납니다.
이들의 개혁이 예루살렘 수도 주변으로만 제한적이었거나, 백성들의 반발을 두려워 하여 어느정도 타협한 개혁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반면 구약 성경 내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일컬어지는 두 왕이 있습니다. 바로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인데요.
이들은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는"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윗 왕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왕들이고 유다 왕국의 역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가장 많이 경험한 왕이기도 합니다.
요약하면, 산당은 처음에는 단순히 높은 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 였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뒤에는 우상 숭배와 종교 혼합주의의 장소이자, 민간 신앙(우상숭배)의 온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그 왕이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왕실과 수도 주변까지는 회개운동과 신앙 개혁을 일으켰지만 나라 전체, 지방 구석구석까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온전히 세우는 데에는 실패한 한계가 있었음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