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MBC 예능프로그램 중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2018년 각광받는 인물 중 한 명을 뽑으라고 한다면, 마마무의 ‘화사’ 일 것이다. 그리고 ‘화사’가 보여준 다양한 콘텐츠 중에 ‘먹방’은 요식업계에 큰 영향을 주기까지 했다. 최초로 화사가 보여준 먹방은 ‘소곱창’이었다. 이후 소곱창의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고, 소곱창의 수요를 공급이 따라잡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간장게장’이었다. 화사가 주문한 간장게장집이 줄을 서서 먹어야 될 가게가 되었고, 요식업계에서도 간장게장의 붐이 한 번 일어났다. 단순히 TV에서 보여주는 광고의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다. 바로 TV의 이런 연출이 지금부터 우리가 알아볼 ‘시뮬라크르’의 한 모습이다.
오늘날 사회는 ‘이미지’와 ‘영상’으로 뒤덮인 사회이다. 그리고 TV라는 큰 기계가 없어도, 핸드폰만 손에 쥐고 있다면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을 접할 수 있다.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은 원본을 모방하는 차원에서 바로 시뮬라크르의 범주에 속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 시뮬라크르가 사회 전반을 통제하고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뮬라크르가 본래적 의미에서 더욱 발전하여 현대정보통신 사회에서 신에 상응할 정도의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주장이 괴변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무시할만한 주장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는 장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그의 저서 『시뮬라시옹』을 중심으로 알아볼 것이다. 먼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개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보드리야르 이전에 논의되었던 시뮬라크르의 개념과 보드리야르의 개념을 비교해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뮬라크르 개념이 가진 특수성을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장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시뮬라크르의 연장선인 시뮬라시옹에 대해서 3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알아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개념에 대한 비판을 ‘박치완’의 주장을 통해서 살펴보고, 오늘날 시뮬라시옹 체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생각해볼 것이다.
2.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
2-1. 존재론적 시뮬라크르(장 보드리야르 이전의 개념)
시뮬라크르는 고대 플라톤 철학에서부터 등장한 개념이다. 플라톤은 모방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모상과 시뮬라크르이다. 전자는 현실과 동일한 비율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후자는 작품을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시뮬라크르가 부정적인 이유는 현실의 감각을 오히려 더 방해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국가•정체』 10권에서 시인과 화가의 모방을 시뮬라크르라고 했다. 플라톤의 존재론적 도식은 ‘원형-모방-시뮬라크르’이었고 화가와 시인의 작품은 세 번째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시인과 화가와 소피스트는 각각 시와 그림과 화술로 모방을 만들어내어 현혹하는 존재들로 평가절하 된다. 결과적으로 플라톤에게 가장 상위 개념은 이데아, 가장 완벽한 실재성을 가진 것이고 가장 하위 개념은 어떠한 실재성도 가지지 못하는 감각적 차원의 시뮬라크르이다.
반면에 들뢰즈는 현대에 와서 플라톤의 존재중심, 이데아중심, 재현중심의 시뮬라크르 해석을 역전시킨다. 들뢰즈는 완전한 실재를 전제하는 시뮬라크르를 비판한다. 그는 완전한 실재를 상정하는 것은 삶을 숨 막히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들뢰즈는 원형과의 동일성보다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시뮬라크르 자체를 강조한다. 들뢰즈는 “오직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하다.”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사물은 차이에 의해서 생성되고 동일성은 차이의 부가적인 그림자와 같다. 플라톤은 동일성을 중심으로 차이 나는 것을 비정상이나 괴물로 취급했다. 그래서 세계를 이데아의 ‘재현’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들뢰즈는 차이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데아라는 본질이 없는 ‘환영’이라고 제기한다. 이는 존재보다 생성을, 동일성보다 차이를 강조하는 그의 주장이다.
플라톤과 들뢰즈는 철학에서 원형과 재현의 문제로 논의되었던 존재론적 시뮬라르크에 집중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의 재현, 완전한 실재와의 동일성, 존재를 강조했고 들뢰즈는 시뮬라크르 자체, 완전한 실재를 부정한 차이성, 생성과 순간을 강조했다. 하지만 둘은 공통적으로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자연적/본래적 시뮬라크르를 탐구했다. 하지만 오늘날 TV, 사진, 각종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인위적/제작된 문화적 시뮬라크르를 비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적 차원에서 시뮬라크르를 전개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들뢰즈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는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사건과 기표를 강조하며 이것들이 문화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둘은 인공적 시뮬라크르를 설명할 때 구분되어야 한다.
2-2.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보드리야르의 경우 모방이 반복되어 시뮬라크르가 되는 것에서 플라톤과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를 설명할 때 세계의 중심에 이데아는 없다. 그는 시뮬라크르에 의해 세계의 본질과 실재는 감추어졌고, 세계는 오히려 시뮬라크르로 가득 차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시뮬라크르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이기보다 사회•문화적인 분석이었다.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모든 상품의 가치는 상품의 내용이나 실재가 아니라, 상품의 이미지나 기호 가치에 의해 평가된다. 예를 들면 꼼데 가르솜이라는 브랜드의 플라스틱백은 실제로 상품내용이나 성질로 따져보면 고가의 상품이 아니다. 하지만 그 상품을 출시한 브랜드 가치와 로고로 인해서, 나아가 광고와 이미지로 인해서 고가의 상품으로 유행처럼 거래되고 있다. 이와 같이 보드리야르는 상품의 기호와 이미지가 상품의 실재보다 더욱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시뮬라크르 제작자들은 일종의 제국주의로서, 한발 더 나아가 모든 실재를 그들이 시뮬라시옹에 의해서 만든 모델들과 일치시키려하기 때문이다.” 즉, 이미지가 실재보다 우선하게 되며 실재의 가치도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 진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저서 『시뮬라시옹』에서 이미지의 단계를 4단계로 나누고 그중 3단계에서부터 그가 강조하는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설명한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 이미지는 자기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그가 주장하는바 첫 번째의 경우는 선량한 외양을 갖는다. 선량한 외양이라 함은 이미지가 자신이 지시하고 있는 실재를 재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첫 번째 이미지를 신성계열이라고 한다. 두 번째 이미지는 일종의 악한 외양으로서 저주의 계열에 속한다. 이미지가 실재를 지시하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재의 형상을 더욱 왜곡되게 단계이다. 이는 조금 후에 언급하겠지만 산업혁명 이후 시뮬라크르의 질서와 연관된다. 모조품들이 대량생산되어서 무엇이 실재인지 ‘코드넘버’로만 확인 가능한 현실의 단계이다. 실재라는 의미가 희소하지 않고 오히려 원본과 모조품의 가치가 사실상 동일해지는 시점이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은 세 번째, 네 번째 단계에서 탄생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실재와 무관한 이미지들이라는 점이다. 차이가 있다면 세 번째의 이미지가 실재<-인 체하기>로서 스스로가 외양임을 연출한다. 이것은 실재가 없으면서도 스스로 실재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을 마법계열이라고 설명한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는 이 이미지는 ‘드라마’와 같은 가상의 캐릭터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보드리야르는 이 단계부터 ‘파생실재’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실재를 넘어선 실재라는 의미이다. 네 번째의 이미지는 실재라는 범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실재와 무관하며 시뮬라크르가 스스로 주체적인 역할을 한다. 사람이 인식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뮬라크르가 인식을 하게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미지의 단계구분에서 나아가 시뮬라르크의 질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연을 모방하는 자연주의자의 시뮬라르크, 에너지와 기계에 의존하는 생산주의자들의 시뮬라르크, 정보와 정보통신학적게임 위에 세워진 시뮬라시옹의 시뮬라르크로 구분하였다. 이는 각각 산업혁명 이전의 시뮬라크르, 산업혁명 이후의 시뮬라크르, 현대정보통신사회의 시뮬라크르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이미지 단계와 같이 산업혁명 이전에는 시뮬라크르는 바로크식 모조품처럼 여전히 원본과 관계 안에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시뮬라크르 질서에서는 앞서 설명한바와 같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원본의 특별함이 사라지게 되었다. 모조품의 대량화로 인해 희소성은 사라지고 원본과 모조품 사이의 등가가치가 동일하게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뮬라크르의 질서는 시뮬라시옹 모델이다.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는 파생실재가 사회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미디어가 지시하는 실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디어에 의해서 모든 소비를 선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드라마에서 어떤 배우가 먹던 음료수를 먹게 되고, 등장했던 차들을 선호하게 된다. 소비주체는 더 이상 자아가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 통제당하고 선택당하는 현실이 되었다.
결국 보드리야르가 생각하는 이미지의 네 번째 단계, 시뮬라크르의 세 번째 질서는 시뮬라크르가 주체가 되어 모든 사회전반이 작동되는 ‘시뮬라시옹’ 사회가 된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하기’라는 의미이다. 즉 시뮬라크르가 동사의 주체가 되는 사회시스템을 의미한다. 대화보다 SNS가 편한 사회, 사진과 영상이 어떤 수사학보다 설득력 있는 사회 그래서 가상이 실재를 앞서고 시뮬라크르가 자전하는 사회이다.
3. 시뮬라크르-하기, 시뮬라시옹의 특징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에 마력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성상파괴주의자들이 했던 절망이 시뮬라크르의 마력적인 힘에서부터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성상파괴주의자들의 절망은-이미지가 원래의 모델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미혹으로부터 영구히 빛을 발하는 완벽한 시뮬라크르였다는 사실로부터 온다.-비잔틴 시대의 성화상이 신의 동질성, 즉 신성을 살해할 수 있었듯이, 이미지에 걸린 문제는 항상 자기자신의 모델인 실재를 죽이는 이미지의 살상력일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늘 지시로서의 가치를 부정하고 재현이 아닌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진 실재너머의 실재가 된다. 시뮬라크르가 주체가 되어 삶을 구성하는 시뮬라시옹 체계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3-1)자기증식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파생실재를 모델들을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다.” 시뮬라시옹에서 파생실재들은 끊임없이 팽창하고 자기증식 한다.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해보자.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오늘날 영화는 자신의 모든 재능과 기술을 그 자신이 사라지게 하는 데 공헌하였던 것을 다시 살리는 데 사용한다. 영화는 환영들만을 부활시킬 따름이고, 거기서 영화자신이 상실된다.” 영화는 가장 대표적인 파생실재 중에 하나이다. 영화는 허구와 상상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지만, 그 이미지는 시대에 새로운 소비와 삶의 패턴들이 증식한다. 보드리야르는 <차이나 신드롬>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건들이 연출되었다고 말한다. 특별히 <하그리버어그> 핵사건의 유발에 ‘차이나 신드롬’의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뮬라크르로부터 실재의 새로운 모방들이 2차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재에 대한 시뮬라크르의 우위성과 더불어 자기증식을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그리버어그>사건은 또 다시 TV를 통해서 방영되며 2차적인 시뮬라크르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하태환에 의하면 “대중매체에 실린 어떤 거대한 사건은 잠시 후에 다시 그와 거의 유사한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모델이 있으면 나머지는 이상하게도 그 모델화되어 간다. 이것은 또한 유행의 매커니즘 이기도하다.”
위의 논리는 광고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자기를 흉내내는 존재들을 확산시킨다. 예를 들어보자. 최근 한 명품회사에서 50만원 상당의 수영복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수영복의 주의사항은 절대 그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이없는 주의사항이다.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지 말라니, 실재의 본래적 기능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수영복은 광고를 통해 다양한 연예인들에게 거래되었고, 연예인들은 이 수영복을 입고 수많은 이미지들을 남김으로서 수영복 구매가 확산되도록 했다. 수영복이 한 벌 팔릴 때마다 이 수영복에 대한 이미지는 증가했다. 광고는 자기를 흉내내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들어낸다. 즉 시뮬라크르는 스스로 자기증식을 한다. 그래서 모두가 시뮬라크르에 뒤덮여 파생실재에 의해 사유하고 살아가는 시뮬라시옹 체계를 구축한다.
이런 성격의 시뮬라시옹은 이전의 기호와 전혀 다른 기호들로 뒤덮이게 된다. 본래 기호들 간의 차이를 통해 무한히 증식되던 상상계는 붕괴되고 오히려 상상과 실재의 간극 또는 참과 거짓의 사이가 사라지며 동일자가 무한히 증식하는 세계가 만들어진다. 무엇이 원본인지 모조품인지 구분할 수 없으며, 네트워크에서 무한히 이미지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엄연히 말하면 시뮬라크르는 오직 그 자체에 의해서만 자족, 자기증식 하는 ‘완전 존재’이나 토대가 없기에 결국 비-존재나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토대가 없는 가상의 존재인 시뮬라크르가 사사건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든 기존의 이론, 세계관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하며 도전하고 있으며 모든 것에 간섭한다.
3-2)저지와 은폐
보드리야르는 실재나 원본과는 상관없는 비본래적이고 인공적인 문화가 자연세계를 덮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영화<매트릭스>와 같이 우리는 인공의 세계 안에서 구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시뮬라시옹에서 “실재가 그의 기호들로 대체되는 세계”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세계를 감추기 위해서 시뮬라시옹은 저지와 은폐의 기능을 수행한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를 예시로 사용한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다고 말한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디즈니랜드의 상상 세계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실재의 허구를 미리 역으로 재생하기 위하여 설치된 ‘저지기계’이다.” 디즈니랜드라는 더 허구적인 현실을 통해서 파생실재에 대한 저항감을 상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더 진실한 것이고, 순수한 것이며, 실재와 밀접한 것이라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시뮬라시옹의 특징을 ‘저지와 은폐’라고 말할 수 있다.
시뮬라크르는 파생실재 속에 있는 대중을 실재 속에 있다고 착각하도록 저지하고, 자신의 존재를 은폐한다. 그래서 연출된 스크린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더욱 본질적인 삶으로 생각하게 된다. 북극의 빙하가 녹는 삶에서 불쌍한 북극곰을 보게 되면 최고포식자인 북극곰은 잊어버리고 일상 속에서 자연의 가치에 더욱 더 집중하게 된다. 매일 아침 러닝을 하며 요가를 통해 정신 수양하는 캐릭터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자기 삶에서 잊고 있었던 신체의 기능들을 걱정하게 된다. 시뮬라크르는 파생실재를 통해서 우리의 현실은 실재 속에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저 시뮬라크르에 의해서 생각하게 되는 시뮬라시옹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생사실성과 시뮬라시옹은 모든 원칙과 모든 목적에 대해 저지적이다. 이것들은 권력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이 저지를 권력에 반대하여 돌려놓는다.-우리는 실재적인 것이란 없고 조작만이 전능한 힘이라는 감각을 가졌으며 조작의 목적도 어떤 사실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감각을 가졌다.” 시뮬라크르는 실재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빼앗았다. 다만 그는 실재의 권력이 빼앗겼다는 감각마저도 저지함으로 그 사실을 은폐한다. 시뮬라크르의 조작은 모든 실재의 권력을 저지하고, 그 부재를 은폐한다.
3-3)통제와 감시
저지와 은폐는 자연스럽게 통제와 감시로 이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은폐된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을 적절하게 통제하므로 저지의 기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저지와 통제를 위해서 시뮬라크르는 ‘함열’을 수행한다고 한다. 함열은 팽창이나 폭파의 반대개념으로서 블랙홀과 같이 모든 것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함열을 예로 들기 위해 프랑스의 보부르를 이야기한다. 보부르는 흩어져있던 모든 현대예술품들을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통합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곳에서 작품의 개별적인 가치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저 하나의 ‘전체화’만 남게 되었다.
박치완에 따르면 “보드리야르에게 있어 동굴은 모종의 기계신이 통제하고 지배하는 ‘현실보다 더한 현실’로 기능하려 한다.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는 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시뮬라크르들로 구성된 전자동굴이다. 벤담이 구상했던 원형감옥인 파놉티콘이 보드리야르에 이르러서는 보다 강력한 형태의 전자•정보 감옥으로 부활한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전자정보 감옥은 자유로운 개방 사회와는 아주먼 완전통제사회의 모델을 부활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박치완은 보드리아르의 시뮬라시옹 세계를 ‘기술•정보적 전체주의’라고 한다. 즉 모두가 미디어와 네트워크 속에서 자신의 주체적인 삶과 결정들을 통제받고 있으며, 나아가 그 결정들이 네트워크의 흔적들을 통하여 철저한 감시체제에 들어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거대 전자•정보시스템에 아무런 저항없이, 생각 따위를 지우고 접속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손에 쥐어든 작은 핸드폰에 의해서 하나의 또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다.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내가 핸드폰을 통해서 가상의 세계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앞에 있는 현상을 내가 원하는 형태의 시뮬라크르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시뮬라크르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나를 동영상으로 찍어서 SNS로 올릴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시뮬라크르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고 늘 감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4.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대한 비판적 사고
보드리야르는 실재의 세계가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잡아먹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산 채로 시뮬라크르 속으로, 저지의 저주받은, 저주조차도 아닌 무관심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허무주의는 기묘한 방식으로 더 이상 파괴 속에서가 아니라 시뮬라시옹과 저지 속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 시뮬라크르는 무한히 자기증식을 한다. 그리고 대중이 파생실재 속에 있다고 깨닫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자신의 존재를 은폐한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시뮬라크르는 이미 우리 세계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고, 실재의 세계를 조작하여 통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세계 속에서 허무주의자가 된다. 이미 세계는 잡아먹혔다고 말한다. 기껏해야 시뮬라시옹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실재에 대한 ‘향수’정도로 말한다.
과연 우리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삶에 대한 허무함 속에서 갈 길을 잃은 대중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인가? 전체주의에 대항했던 한나 아렌트의 울부짖음이 기술•정보 전체주의에 사로잡힌 오늘날의 대중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비판을 박치완의 주장을 통해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박치완은 보드리아르의 사회학자로서 자질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시뮬라시옹 이론은 디오니소스적 광기로 대변되는 현대소비사회의 파행적인 현실에 대해 최소한 그가 ‘사회학자’라면 우리에게 응당 보여주어야 했을 반성이나 비판은 간과한 채 이를 이론적으로 적극옹호하고 나선다.” 보드리야르는 사회학자로서 사회현상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야하는 학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보드리야르에게 시뮬라크르는 실험단계에서 벗어나 이미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 응당 보드리야르는 시대에 알맞은 대안과 혜안을 제시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하지 못했다. 물론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극단적으로 긍정했다는 것에는 많은 이견이 있다.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을 소개하고, 허무주의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대중들에게 많은 경각심을 주기 위한 극단적 조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의 대안을 ‘적극적인 순종’이라고 말한 측면에서 사회학자다운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는 부분은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다.
두 번째 비판은 보드리야르의 주장이 기술결정론에 근거한 종말론이라는 것이다. 박치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 가상공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서 자연세계는 물론 인간 세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가 하면 다분히 인위적 기술정보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가 청산내지 파괴되어야 한다는 기술결정론에 근거한 종말론을 전개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기술과 가상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마치 기술이 전능이라도 되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폐쇄적인 시뮬라시옹 세계 안에서 어떠한 저항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결국 보드리야르는 허무주의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삶의 다채로움과 다각적인 측면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보드리야르의 글을 읽으면 모든 해석을 시뮬라크르로 환원시킨다. 해석과 의미에 대한 개인의 욕망과 삶의 환경 한 사람의 실존에 대한 분석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모든 삶의 의미들을 시뮬라크르로 환원하며, 폐기해버리는 보드리야르의 서술은 ‘기술적 종말론’이라는 자기의 해석 프레임에 스스로 갇혀버린 자가당착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드리야르에 대한 마지막 비판은 삶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이다. 박치완에 따르면 “그는 단지 기술,정보 중심으로 흘러가는 우리 시대의 단면을 성급하게 일반화시키고 있을 뿐이며 그 때문에 그의 구상이 설사 기발해도 우리 시대의 전면을 대변한다고 믿거나, 예언대로 될 것이라고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차이가 동일의 개념에, 시뮬라크르가 실재의 개념에 의존하듯이 가상은 현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드리야르는 비약적으로 이 의존관계를 끊어버린다. 그의 책에서도 다양한 예시를 사용하면서 ‘현실’에 일어난 사건을 기술하는데 어느 순간 결론은 시뮬라크르만 가득찬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 사이에 논리적인 비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세계가 미래에 실제로 구현되어도, 심지어 그 매트릭스 세계 밖에는 지옥과 같은 실재의 세계, 현실의 세계가 있다. 그는 논리적 서술에서 본인도 실재의 개념과 현상에 의존하면서 모순적으로 모든 것이 실재의 반대 극단인 시뮬라크르에 함열된다고, 시뮬라크르가 모든 실재를 집어삼켰다고 말한다. 이것은 수사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이지 논리적인 표현이 될 수 없다. 그는 실재의 세계에서 정보화시대의 미디어 영향력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미디어와 이미지, 시뮬라크르에 과도하게 무게를 집중시킨 나머지 삶을 해석하는 하나의 프레임만을 제공하였다. 결국 이것은 섣부른 일반화와 전체주의적 성향을 나타내도록 만들었다. 아직도 우리의 두발은 땅을 딛고 있는데 가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보드리야르는 수사적인 기법들을 사용한다. 박치완은 가브리엘 마르셀과 하이데거를 인용하며 기술자체의 문제보다 기술을 다루는 인간의 가치관, 기술의 무비판적으로 대하는 태도경계 등을 강조한다. 일전에 이어령이 AI와 관련된 주제로 인간이 말보다 빠르지 않지만 말을 타는 것은 인간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과제가 있다면 보드리야르와 같이 성급한 일반화와 허무주의적 태도로 일괄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문명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훈련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본 글을 통해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중심으로 시뮬라크르의 개념과 특징,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점들을 살펴보았다.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 시뮬라크르는 원본과 실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실재보다 더 실재가 되기까지 발전을 거듭한다. 이를 우리는 파생실재라고 칭했다. 특별히 이미지의 네 가지 발전단계와 시뮬라크르의 세 가지 질서를 통해서 시뮬라크르가 추구하는 세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시뮬라크르가 추구하는 세계가 무엇인가?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하기), 즉 시뮬라크르가 주체가 되어 인격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세상이다. 그래서 동사의 주어가 시뮬라크르가 되는 세계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미 세상이 시뮬라크르의 악마적인 힘에 의해서 이끌려가고 있다고 전망하며 세상을 허무주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다음으로 시뮬라시옹 세계에서 시뮬라크르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증식과 저지와 은폐, 통제와 감시가 그 특징이다. 세 가지는 유기적으로 서로 연관되어있으며, 특징의 상호작용으로 시뮬라시옹 세계를 형성해나간다. 시뮬라크르는 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가는 이미지로 자기와 비슷한 삶의 패턴을 무한히 증식시켜나간다. 우리는 이를 흔히 유행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정작 시뮬라크르가 지시하는 실재여부는 의심하지 않고 모두가 시뮬라크르의 모조품과 같이 살아가며 이차적인 시뮬라크르들을 생성한다. 이런 세계 속에서 시뮬라크르는 자신의 실재가 없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허구와 상상의 세계를 연출한다. 디즈니랜드와 같은 허상의 세계를 연출하면서 인간의 현실이 실재라고 그들의 생각과 감각을 마비시키고 저지한다. 인류는 이미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매커니즘에 통합되어 들어와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를 ‘함열’이라고 한다. 인류는 블랙홀에 빠져들 듯이 시뮬라시옹의 세계에 흡수되어있고 그 속에서 주체적인 삶이 빼앗긴 채 통제와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박치완의 주장을 토대로 시뮬라시옹 세계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해보았다. 그는 세 가지를 중점적으로 비판한다. 보드리야르가 사회학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허무주의로 일관한다는 점, 삶의 다채로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술적 종말론을 전개한 점, 연장선에서 시뮬라시옹을 성급하게 일반화하고 기술•정보 전체주의를 주장한 점이다. 보드리야르가 전개하는 시뮬라시옹 세계관은 분명히 21세기 현대사회를 표현하고 묘사하는 중요한 통찰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이미 인류는 보드리야르가 전망하는 것처럼 점점 미디어와 이미지에 의존하여 자신의 선택과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가짜 뉴스’가 판치고 그 ‘가짜 뉴스’에 대한 해석이 난무하면서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 가치판단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허무주의를 전개하는 보드리야르의 심정에 우리는 충분히 동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박치완의 비판지점은 상당히 유효하다. 철학자는 사회의 허무와 공허를 조장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인류가 환기해야할 가치관과 대안, 방법론과 노력, 무엇보다 희망과 용기를 전해주어야 한다.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모두가 시뮬라시옹 세계에 갇혀있어도, 누군가는 ‘네오’와 같이 그 미디어 세계 안에서 『시뮬라시옹』을 읽고 실재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다. 미디어는 양날의 검이다. 다만 이제 인류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문제이다. 인류는 ‘실재’에 대한 새로운 정립, 인간다움에 대한 새로운 정리가 요구되는 과도기적 패러다임에 돌입했다. ‘아드-폰테스’, 본질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고전적인 고민을 시도하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우리는 마주해야한다. 정보미디어 세계는 인류의 삶을 흡수하여 획일화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인류가 인류다울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사고’가 요구되어진다. 한나 아렌트의 말과 같이 사고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은 또 다시 비인격적이고 폭력적인 전체주의를 만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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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하태환역, 민음사, 2001)
-질 들리즈, 『디알로그』(허희정 역, 동문선, 2005)
-질 들리즈, 『의미의 논리』(이정우 역, 한길사, 2006)
-박치완,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서울 :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2016)
-배영달, ‘보드리야르 : 시뮬라크르라는 악마’『한국프랑스학논집 80』(한국프랑스학회, 2012)
-김희봉, ‘현대사회의 가상성과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철학과 현상학 연구 60』(한국현상학회, 2014)
-김기정,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를 통한 문화분석 시론’『인문콘텐츠 22』(인문콘텐츠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