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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호 May 30. 2019

폴 틸리히의 문화와 성령의 관계

1 자기실현의 모호성과 요청되는 성령


    궁극적 관심의 발현은 문화를 형성하고, 문화는 존재의 근원을 가리킨다. 즉 문화를 형성하는 실존의 모든 생명은 ‘존재자체’를 지향하는 존재이며, 틸리히는 이 상태를 생명의 ‘자기실현’이라고 한다. 폴 틸리히에게 생명의 자기실현은 세 가지 차원을 가진다. 이는 각각 자기통전(순환)과, 자기창조와 자기초월이다. 틸리히는 각각의 영역을 통해 자기실현이 자기 안에서 어떻게 운동하는지, 그리고 역사 속에서 어떻게 운동하는지, 마지막으로 존재의 근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한다.

    세 가지 차원, 자기통전과 자기창조와 자기초월은 각각 도덕(자의식 형성), 문화(세계의 창조), 종교(세계의 초월)를 통해 구현된다. 틸리히는 세 가지 차원이 서로 침투하면서 정신의 통일성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도덕은 종교로부터 정언명령을 받고, 종교는 도덕적 자아의 구성 속에서 자기초월이 가능하다. 종교는 문화의 깊은 근원을 제공하고, 문화는 종교의 형태로 창조세계 구현된다. 문화는 도덕의 프락시스(praxis)를 구현하고, 도덕의 힘은 문화의 논리적, 미학적, 공동체적 형태의 기초가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차원에 모호성이 존재하고 그렇기에 관계성에도 ‘모호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통일성은 늘 긴장의 상태에 놓인 실존에서 온전히 구현되지 못한다. 틸리히는 자기실현을 하는데 있어서 실존의 ‘모호성’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모호한 실존이 ‘모호하지 않은 생명’이 되도록 돕는 것이 성령이라고 강조한다. 

    특별히 틸리히는 ‘자기초월’을 강조한다. 자기통전과 자기창조는 수평적 움직임이라면 자기초월은 근원과 연결되는 수직적인 생명의 역동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그 자신 안에 있는 자유의 요소로 인해서 그 자신 유한성(운명)을 넘어서 나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틸리히에 따르면 “생명의 모든 자기초월의 행위는 항상 세속화(=자기초월저항,)의 위협에 의해서 실패할 위험 속에 놓여있다.” 즉, 생명의 자기초월은 자기를 초월하는 대신에 자기 안에 머무르려는 생명의 세속화의 경향과 늘 대립하며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틸리히는 ‘자기초월의 모호성’을 생명의 네 가지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예시한다.

    우선적으로 무기물의 영역 안에서 생명은 위대함과 왜소함의 모호성을 가진다. 무기물이 ‘존재자체’를 지향하는 거룩성을 가지고 있으면 위대하지만, 잠재적인 거룩성을 감추면 단지 유한한 ‘먼지’나 ‘재’일 뿐이다. 둘째, 유기물의 영역에서는 서로의 생명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먹어야 생존할 수 있기에 생명의 존엄성과 침범의 모호성이 존재한다. 셋째, 자의식의 차원에서는 쾌락과 고통의 모호성이 존재한다. 자아는 자기를 의식함으로서 쾌락의 주체가 된다. 하지만 자의식이 존재는 이유만으로 고등동물은 다른 존재가 자신의 존엄성을 침해할 가능성에 노출되고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간 실존의 차원에서 생명은 위대함과 비극이라는 모호성을 가진다. 인간의 자기초월은 실존의 영역에서 비극이라는 모순된 모습을 늘 보여준다. 예를 들면, 인간의 소외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단어는 ‘휘브리스’인데 자기의 위대함에 심취한 인간의 ‘자기높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가장 위대해질 때, 가장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비극은 자기초월을 자기높임으로 왜곡시켰다는 점이다.

    틸리히는 네 가지 자기초월의 차원이 종교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는데,  ‘종교’도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종교는 생명의 위대성과 존엄성의 최고표현이다.” 그러나 자기초월의 구현으로서 종교는 두 가지 모호성을 가지는데, 첫째는 자기초월과 세속화 사이의 모호성이고 둘째는 자기초월과 마성화의 모호성이다. 세속화는 종교가 세상의 많은 요소들 중에 하나의 기능으로 환원되는 것이고, 마성화는 종교가 세상의 절대자로 독립성을 가지고 군림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기초월의 주체나 자기초월의 매개가 모두 모호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호성의 통일을 위해 ‘성령’이 요청된다.  

     

2 폴 틸리히의 ‘성령’과 ‘황홀경’ 개념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은 피조물의 생명 속에 나타난 신적인 생명의 현존을 의미한다. 이 영은 ‘현존하시는 하나님’(God present)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은 분리된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상징의 완전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영적 현존’(Spiritual Presence)이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유장환은 틸리히의 성령을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체 또는 존재의 근거이듯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하나의 존재자나 실체가 아니고, 인간의 영에 거하며, 뒤흔들고, 영감을 주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라고 해석한다. 즉, 성부가 존재의 기반이라면, 성령은 실존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성령은 인간의 실존에 역사해서 자기초월을 실현하고 자기실현의 통일성을 만든다.

    성령은 정통적으로 ‘인간의 영’과 관계에서 인간의 영에 거한다고 은유적으로 묘사되었지만 틸리히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안으로 침투하여 하나님의 영은 바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만일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으로 꿰뚫고 들어간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곳에서 안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은 그 자신 밖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에서의 ‘안’은 인간의 영에 있어서는 ‘밖’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영은 본질 그대로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영향에 의해 자신 밖으로 나가는 현상을 경험한다. 이를 ‘황홀경’(=탈아, ecstasy)과 같은 전통적인 상태로 표현할 수 있다.

    황홀경은 ‘주-객’의 구조가 초월된 것이다. 황홀경에 있는 자는 자의식 안에서 이미 신적인 방향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마치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성의 빛 속에서 선포하듯이, 자아는 영적 현존의 영향아래에 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도는 주-객의 구조에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에게 말하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주-객의 구조가 초월되었다. 그래서 틸리히는 기도를 ‘황홀경의 가능성’(ecstatic possibility)이라고 말한다.

    황홀경의 특징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령은 인간의 영의 본질적인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자신을 초월할 수 있도록 이끌어간다. 만약 자신이 파괴된다면 그것은 마성적인 사로잡음이 성령의 사로잡음을 대체한 것이다. 둘째로 성령의 경험은 인간의 합리적인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 성령은 궁극적인 실재와 자기초월의 결합 속에서 ‘모호하지 않은 생명’을 창조한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사로잡는 존재이지 인간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 인간이 성령을 강요하거나 부릴 수 없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사로잡을 수 없듯이 인간은 성령을 내려오라고 강요하거나 부릴 수 없다.


3. 모호성을 극복하는 성령의 역동성


    성령은 모호성에 가득한 인간과 문화의 실존을 초월적인 연합을 통해 ‘모호하지 않은 생명’으로 창조한다. 모호한 생명은 성령에 의해서 실존과 본질의 결합, 즉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었던 자기초월로 이끌려진다. 틸리히는 성령에 사로잡힌 상태를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설명한다. 황홀경이 성령의 구조를 설명한다면, 믿음과 사랑은 성령의 내용을 설명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믿음은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인 통일성에 의해서 붙잡혀져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초월적인 통일성 안으로 이끌려져 있는 상태인 사랑을 구현한다.” 즉 믿음은 존재의 근원과 실존이 통일된 내적 상태를 의미한다면, 사랑은 그 상태가 발현된 외적 상태를 의미한다. 둘은 성령에 사로잡힌 ‘자기실현’의 통일성을 보여준다. 틸리히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을 통해서 성령에 사로잡힘의 잘못된 경우(12장)와 자기초월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경우를 설명한다. 그는 12장의 은사주의를 ‘휘브리스’, 자기높임의 마성화에 빠졌다고 설명하며, 온전한 성령의 내용은 아가페 사랑 안에서 영적 현존과 도덕적 현존의 통일성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유장환의 해석에 따르면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는 상태로서의 믿음과 사랑은 인간의 유한한 영이 ‘모호하지 않은 생명’의 초월적인 통일성에 참여하는 것을 창조한다. 그리하여 성령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곳에서는 성령은 종교의 모호성을 극복한다. 세속화와 마성화는 성령에 의해서 저지된다. 성령은 세속화를 꿰뚫고 나가고 마성화에 저항한다.” 결국, 틸리히는 종교의 모호성이 유한한 인간의 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이며, 자기초월을 거부하고 자신 안에 거하려는 세속화나, 유한한 자기를 절대적으로 높이는 마성화를 꿰뚫고 돌파하는 일은 오직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원리(Protestant principle), 즉 모든 자기안주를 돌파하고 자기절대화에 저항하는 예언자 정신, 성령의 승리이다.

    ‘모호성’에서 ‘모호하지 않은 생명’으로의 변화에는 통일성의 단초인 ‘성령’의 역할이 주도적이다. 성령은 ‘자기실현’의 세 가지 범주인 ‘자기통전’, ‘자기창조’, ‘자기초월’에서 각각 모호성을 통일시킨다.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신율’이다. 신율은 자기 이성에 의해 정해진 기준인 ‘자율’이나, 보편적인 기준에 의해 의무로 주어진 ‘타율’과는 다르다. 신율은 자기의 내면에서 뿌리를 내려, 자기실현의 근원이자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주어지는 내적인 법이다. 성령은 자아에게 신율을 회복한다.

    ‘자기통전’에서 자아는 영적 현존에 의해 ‘도덕성의 신율적 기초’를 회복한다. 도덕적은 늘 추상적인 법과 구체적 상황의 양면성 속에서 자기욕망과 자기희생의 모호성을 가지는데, 영적 현존의 내용인 사랑은 정언명령이 부여하는 바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함으로써 도덕적 요구와 실천의 갈등을 극복하도록 한다. ‘자기창조’에서 문화는 영적 현존에 의해 ‘신율적 문화’를 통해서 회복된다. 곧 문화는 종교의 형식으로서 그 역할을 회복한다. 마지막 ‘자기초월’에서 종교는 ‘영적 현존’으로서의 공동체가 된다. 즉 교회를 회복한다. 여기서 교회는 종교적 단체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를 선취한 공동체를 의미한다. 종교는 성령에 의해 독립된 종교 단체로 존재하고자하는 ‘마성화’, 세상의 기능에 일부가 되는 ‘세속화’를 극복한다. 결과적으로 성령은 세속과 종교의 모든 문화적 구별이 통일되는 종말론적 성취를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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