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나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호 Jul 04. 2019

나와 너

근원어 ‘- ‘ 근원어 ‘-그것 나와는 다르다. 근원어 ‘-그것 ‘ 개적 존재로서 나타나고 자기를 (경험과 이용의) 주체로서 의식한다. 근원어 ‘- ‘ 인격으로 나타나고 자기를 (종속적인 속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주체성으로 의식한다.”(나와 , 93)

마르틴 부버의 역작 ‘나와  읽고 있으면 철학서적이 아닌 한편의 시집을 읽고 있는듯한 몰입감을 받는다.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은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가보다. 부버는 삶의 이중적 양식(근원어) 소개한다. ‘라는 주체가 객체를 나와 분리된 ‘그것(대상)’으로 여기느냐, ‘(인격적 존재)’ 대하느냐에 따라 다른 존재양식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에리히 프롬은 이런 부버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서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기록하지 않았을까....라고 예측해본다.

근대이후로 이성은 분석의 주체로 급부상했고 현대에는 분석하는 이성적 주체마저도 해체되어 존재의 모든 것이 분석과 해석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무엇인가와 맺는 모든 관계는 심리학적으로, 정치역학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는 시대이다. 그래서 진정한 만남과 관계라는 존재론적 향수는 인간의 심연에서  갈증을 일으키는 듯하다.

부버는 오직 ‘ 진정한 ‘에게 사로잡히므로서 ‘라는 주체성을 찾고 자유한 존재가   있다고 역설한다.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은 ‘관계적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진정한 타자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민해보게 만든다. 특별히, 그의   구절  앞에 주어진 목회적 상황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자유와 운명이 함께  몸을 이루고 있듯이 자의와 숙명은 함께  몸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자유와 운명은 서로 서약하고 껴안으면서 하나의 의미를 이루지만, 자의라는 영혼의 요괴와 숙명이라는 세상의 악령은 서로 계약을 맺고 나란히 동서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피하고, 맺어지는 일도 없고 강하게 접촉하는 일도 없이 무의미성 속에서 떠돌고 있다.”(나와 , 88)

라는 인격적 존재에 사로잡히는 ‘ 참된 관계 속에서 참된 주체성을 회복하고, 자유롭고 능동적인 존재가 된다. 쉽게 말하면 사랑하면 타자와 관계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적어도 외연과 내연이 통일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관계는 ‘운명이라는 역학관계에서 ‘의미 창조하는 삶을 살아낸다. 반면 ‘자의라는 아등바등하는 힘으로 ‘숙명 짊어지는 사람은 무의미 속에서 허우적대는 삶을 살아간다.


아직 많은 시간 목양에 힘쓰지 못했지만, 실제로 목회라는 것이 그런  같다. 내가 대하는 성도와 ‘나와 라는 실존에서 운명공동체가  때에는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삶의 ‘의미들이 창조된다. 반면에, 꾸역꾸역 자신의 의지로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자위를 하며 숙명으로 걸어간다면,  삶에는 허무의 힘이 작용하게 된다. 무엇보다 타인과 ‘나와  관계가 되기 이전에 ‘영원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절대적으로 선행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숙명의 굴레에 갇혀서 안타까운 자위로 사역을 감당하게  것이다.

나중에 조금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나와  대한  조금  구체적인 글을 써보도록 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회복해야할 질문과 기억해야될 답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