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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호 Aug 10. 2020

식구(食口) 그리스도

‘가족 밖의 가족’으로 다가오신 그리스도

    2013년 3월 4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장교후보생으로 학생군사학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2016년 6월 30일 40개월의 의무를 마치고 육군 중위로 무사전역을 했다. 소대장으로만 36개월의 시간을 보냈고, 약 100명의 소대원을 전역시켰다. 그리고 약 400명의 중대원들을 마주했다. 나는 군대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다양한 삶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군대는 나에게 ‘관계의 장’이었다. 2014년 중순, 대한민국은 ‘윤일병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사건의 발생은 먼 곳이 아닌 같은 사단 내의 바로 옆 부대에서 일어났다. 병영생활의 군 기강확립이 강조되었고 각부대마다 감사와 설문으로 저변에 감추어진 부조리들을 들추어냈다. 이 때 이루어진 행정조치 중 관심병사 재분류가 있었다. 상부에서는 일정한 기준을 내려주었고 간부들은 그 기준에 맞추어 관심병사를 분류했다. 여기서 나의 생각에 큰 변화를 준 사건이 일어났다. A,B,C 그룹 중 C그룹이 전체 중대원(약 100명) 중 70%정도에 해당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바로 C그룹 선정기준에 ‘편부모 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 중대원 중 양친이 있는 병사가 절반도 안 되는 것을 의미한다. 20대 중반까지 교회 속에서 자라온 나에게 이혼가정은 굉장히 생소한 대상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혼을 감추었고, 실제로 많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혼가정은 긍휼과 동정을 일으키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날 사회의 주요현상으로 ‘가족해체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가족은 높은 이혼율과 비혼율, 성정체성의 다양화 등으로 형태와 존속의 문제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나는 현재 서울내 지역 중 빈곤율이 몇 손가락에 들어가는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사역을 하다 보면 청소년부에 상담할 부모님이 안 계신 경우가 다반사이다. 가정의 문제는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결핍의 문제로 이어진다. 안타깝게도 교육수준이 낮거나, 소득이 낮은 가정이 더 높은 이혼율을 보인다. 가정의 경제적 문제는 가정의 유지와 연관되고, 유지되지 못한 가정의 이혼은 다양한 결핍으로 이어진다. 결핍은 더 큰 결핍으로 이어지고, 더 큰 결핍은 결국 병리적 현상으로 이어진다.


    교회 주일학교를 출석하고 있는 삼남매가 있다. 아스팔트 도로를 맨발로 달려도 기뻐하는 아이들, 소변이 마려우면 교회 앞마당에 소변을 보는 아이들, 언어를 몰라서 의사표현이 부자연스러운 아이들이다. 집에 들어가면 입구 우측에는 켜켜이 연탄이 쌓여있고, 집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아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흔히 TV에서 방영되는 불우이웃의 삶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삼남매가 자라난다. 아이들의 부친은 환갑을 훌쩍 넘으셨고 종일 일을 하시다가 피곤한 몸으로 왁자지껄한 삼남매를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쇠잔한 이혼남의 몸’, ‘정주할 수 없는 집’, ‘가정을 지키지 못한 가시고기 아버지’ 등의 단어로 표현되는 생활세계를 살아간다. 홀아비의 삶 속에서 삼남매는 아마도 자연스레 수많은 결핍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삼남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일까? 삼남매가 필요로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일까?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오늘날 수많은 아픔 속에서 ‘가족’의 필요성을 요청하고 싶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가족으로 소개하고 싶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가족은 혼인과 혈연을 통해 관계가 이루어진 집단이며, 의식주의 해결을 공동으로 하고 정서적 유대와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갖는 집단으로 정의된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요인으로 인해 혈연중심의 전통적인 가족개념이 모호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정서적 유대감과 안정감을 형성해주고, 재산과 노동을 공유할 만큼 친밀한 공동체라는 것은 변함없을 것이다. 메슬로가 말하는 다섯 단계의 욕구도 대부분 가족을 통해서 충족된다. 하지만 가족의 해체는 인간을 결핍의 존재로 만들고 결핍은 인간을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로 만든다. 누구도 그들의 안전을, 그들의 교육을, 그들의 정서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약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나아가 그들의 ‘가족’이 되어주신다.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와 따르게 될 자들에게 ‘가족’이 되어주시는 분이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형제요 남매요 자매이다. 그분에게 가족은 혈연이라는 울타리에서 신앙이라는 더 큰 울타리로 확장되었다.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존재를 더욱 풍성하게 하신다. 혈연중심의 가족이 해체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에 예수님의 가족개념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으로 다가 올 수 있다. 위로부터 허락되어진 새로운 가족은 분명 가족 밖의 가족이다.

    예수님은 가족으로 우리를 부르시기에 우리의 결핍을 살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나아가 우리를 먹이시고 채우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에서 묘사된 예수님은 ‘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시고, 그들을 향하여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체험하고 세상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육신의 필요뿐만 아니라, 영혼의 근원적인 열망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진실로 우리의 결핍을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채우는 분이다. 우리가 잘 아는 최후의 만찬과 더불어 요한복음 21장에 묘사된 예수님은 그 얼마나 따스한 분인가? 매몰찬 배신의 연속과 복잡한 내면의 갈등으로 상처투성이인 제자 공동체를 예수님은 얼마나 따스하게 맞이하시는가? 그분은 횃불을 켜놓고 날카로운 바닷바람에 기진맥진한 제자들을 맞이하신다. “아침 먹자”는 따뜻한 말과 함께 떡과 물고기를 먹이시는 예수님은 진정 우리의 ‘식구(食口)’이신 분이다. 타오르는 횃불은 제자 공동체의 차디찬 어둠을 물리쳤고 그분의 온유함은 제자들의 상처를 싸매었다. 그리고 횃불보다 뜨거운 그분의 사랑은 용서라는 옷을 입고 제자들을 자유하게 했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의 몸과 마음을 또 먹이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족’이시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우리를  ‘아시는 이다. 호세아가 여호와를 알자고 외칠 때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어 ‘야다’는 부부간의 ‘친밀한 앎’을 의미한다.  신랑이신 예수님은 신부인 교회와 인류의 고통을 ‘친밀하게 아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유혹』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모든 순간이 갈등이요 승리이다.-육체와 영혼의 투쟁, 반발과 저항, 화해와 굴종,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쟁의 가장 숭고한 목적인 신과의 결합 - 이것은 그리스도가 취한 오름길이었고, 그리스도는 그가 남긴 피로 물든 자취를 따라 우리더러 뒤따라오라고 부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소설을 기록했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적 예수, 성서 속의 예수와 다른 비약들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은 주기적으로 ‘금서’가 되었다. 하지만 책속에 묘사된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 한 사람의 가족으로 태어나 철저히 인간의 모습이었다. 사랑 때문에 갈등하고, 배고픔 때문에 힘들어하고, 유혹 때문에 괴로워한다.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기도 한다. 밖에서도 치이고 안에서도 치이고 심지어 위에서도 치이는 예수님은 너무 가엽고 딱해서 자꾸만 생각나게 된다. 성서의 내용을 뒤죽박죽 어질러 놓고 고귀하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이토록 나약하게 그려놓았으니 교회에서 금지할 만도 하다. 그런데 흔들리면서 넘어지면서 괴로워하면서 흐느끼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예수님을 계속 따라 가게 된다. 어쩐지 그분에게 더 고마워진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뇌와 갈등에 공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공감하기 위해 육화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알기에 우리도 예수님을 안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공감하고 서로 알아간다. 그리고 가족은 서로 닮았듯이 ‘앎’은 서로를 닮아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가족 된 자들은 서서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신의 가장 깊은 근원에 새긴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 예수님의 가족은 나보다 낮은 곳에서 밀어주고 나보다 높은 곳에서 끌어주는 예수님으로 인해 결핍 속에서 ‘희망’과 ‘회복’을 경험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현현을 ‘교회’라고 했다. 그는 그의 저서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를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했으며, 『나를 따르라』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새로운 몸이라고 했다. 교회는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현현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현현방식이 ‘교회 공동체라면 오늘날 시대적 아픔 속에 ‘교회 공동체 ‘가족 공동체 형태로 다가가야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역할을 위임받았다. 그리고 모든 역할을 대리한다. 앞서 말한 삼남매에게 예수님은 ‘가족’이다. 그리고 교회는 ‘가족’이어야 한다.


    마침 주일학교에서 한 녀석이 전도사인 나를 향해 ‘하나님’이라고 부르던 것이 생각난다. 그 녀석에게 꿀밤을 때리며 전도사라고 다시 가르쳐주었지만 그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이제 막 ‘전도사님’이라는 단어를 배운 삼남매는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아내만 보면 ‘전도사님’을 외치며 달려와 폭 안긴다. 아직 아이도 배어보지 못한 아내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비친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을 읽는다.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아이들의 행복한 ‘흔적’들을 정리하고 포용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을 느낀다.

    우리를 가족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치열한 고민과 분투를 공감해주시고, 공허하고 퍽퍽한 삶을 온기로 채우시듯, 이제 교회가 그리스도를 뒤따르며 그분의 삶을 살아내어야 한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닮아갈 수밖에 없다. 가족으로 상처받는 오늘날, 새로운 가족이 되어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현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참고자료

니코스 카잔차키스 『최후의 유혹(상)』(경기 : 열린책들, 2008)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교제』 (유석성, 이신건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이신건 역, 서울: 신앙과 지성사, 2013)

이여봉, 『가족 안의 사회 사회 안의 가족』(경기 : 양서원, 2017)

최정경, 이광호 “이혼한 저소득 한부모가족 아버지의 생활세계 경험의 본질과 의미”『한국사회복지질적연구』(한국사회복지질적연구학회, 2015)

이성용, “교육수준에 따른 차별적 비혼구성비와 이혼구성비 분석-1995~2010”『한국인구학』(한국인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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