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그리스도인의 하루 이야기>, <1세기 그리스도인의 선교 이야기>
진리는 모든 삶을 관통하기에 진리이다. 본 책에 등장하는 푸블리우스는 기독교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삶의 모든 영역을 해석하는 관점이 달라졌다. 당시 로마사회에서 여자는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져서 완전한 사랑을 나누거나 우정을 나눌 수 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다. 더군다나 여자아이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푸블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새로운 신앙이 여자아이를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신에게 동등하게 중요한 존재로 본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았을 때, 우리는 쿠미아를 자기 오빠처럼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하루, 19)
나아가 그는 집에서 노예들에게 함께 식사하기를 권면한다. 종들은 교회가 아닌 집에서까지 그렇게 제안하지 말라고 푸블리우스에게 말하지만, 푸블리우스는 이렇게 답변한다. “알았네만, 예수님의 제자로서 함께 하는 행동이 다른 때에도 영향을 미쳐야 하지 않을까?”(하루, 36)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푸블리우스에게 사회적 관습으로 인해 음지에서 놓여있는 생명의 존엄성을 조명해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관념에서 실천으로 옮기도록 견인해주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시공간을 뚫고 우리네 세상으로 침투했듯이, 신앙의 영역은 일상의 영역에 침투하여 삶을 해석하는 새로운 눈을 열어준다. 일상과 신앙의 영역은 통합되고 통일성을 이루게 된다. 진리의 반석위에서 통일된 고민을 하게 되고, 고민은 마주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의 삶이 여자아이를 마주할 때와 노예를 마주할 때 각각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간 것처럼 다양한 삶의 양태가 진리위에 새롭게 세워진다.
신앙의 영역은 일상에 침투하고, 변화된 일상은 점점 사회적 영역까지 확장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선교’라고 한다. 푸블리우스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날마다 내가 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그 일을 통하여 내 신앙의 핵심 가치를 적용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만일 내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각기 다른 두 사람으로 곧 사생활을 하는 사람과 직업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나뉜 채 사는 셈이다.”(선교17-18) 그는 신앙의 가르침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가득 메우길 원했다. 삶의 영역마다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다른 인격으로 살아가기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듯이, 진리는 위선을 비추고 거짓을 책망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 예배가 일상으로, 일상이 사회생활로 연결되는 통일된 삶을 살아간다.
본 책에서 푸블리우스는 네로의 기독교박해를 마주한 이후, 자신의 사회적 지위로 박해를 막을 수 있는 정치적인 활동을 고민한다. 이것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선교적 사명이었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고 그곳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A.D 70년대에 진입하면서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사라졌다. 저자 로버트 뱅크스는 푸블리우스 같은 사람들의 선교적 활동으로 인해 네로가 죽은 이후 대대적인 기독교박해를 대비할 수 있었다고 시사한다.
두 권의 책을 읽고 덮으면서, 나의 고민과 질문들을 점검해본다. 교회에서 에너지를 불태우고 돌아와 정장을 벗고 넥타이를 푸는 순간, 나는 굉장히 본능에 충실해진다. 침대와 쇼파를 사랑하고, 그곳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에 대한 고민은 잠시 덮어둔다. 마치 저마다 직장의 일을 집에서까지 상기하기 싫듯이, 나 또한 그런 모습을 마주한다. 진리를 대면하는 삶이 업무를 대면하는 삶으로 가치전도가 되었는데도 나 스스로의 종교적 삶에 그냥저냥 만족하며 살 때가 많다.
진리는 우리네 삶을 관통해야하는데.... 진리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으니 애초에 신앙인으로서 통일된 삶은 시작도 못하는 것인가. 일상마저 진지한 고민 속에서 살아가기에 너무 퍽퍽하다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그리스도의 삶이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삶인가. 그렇다고 나는 신앙적 삶이 아닌 또 다른 삶에 대해 고민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쇼파에 앉아있는 나는 그냥 죽어있는 것 같다. 어디서나 종교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나에게 지쳐버린 것인가....
예배가 삶이되길, 삶이 선교가 되길 바라면서도 나는 여전히 생각을 멈추고 누워자고 싶은 양가감정 속에 괴로워할 뿐이다. 어찌보면 침대에서 하고 있는 고민은 내 자아의 현주소를 가장 명확히 보여준다.
내 삶은 여전히 모호하고 모순투성이다. 폴 틸리히는 성령이 ‘모호한 생명’을 ‘모호하지 않은 생명’으로 만들어준다고 하는데.... 역설과 모순이 뒤얽힌 나의 삶에서 통일된 삶의 렌즈를 가지는 것은 역시 하늘의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성령의 도움을 사모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살아가야겠다. 푸블리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글을 맺고자 한다.
"지금까지 나는 한 분이신 하나님이자 구원자이신 분을 향한 나의 헌신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 삶의 모든 부분을 열어 두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의 삶은 형성되어 가고 있다."
(선교,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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