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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현 Oct 06. 2020

입맛은 평생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입맛, 그 이기적인 습관


 "어? 그거 초등학생 입맛 아니에요?"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라는 물음에 답하다 보면 흔히 듣던 반응이었다. 그렇다. 나는 초등학생 입맛이었다. 달면 맛있다고 생각했고 쓰거나 시거나 매우면 맛없는 음식으로 치부했다. 구수하거나 깊이가 있는 맛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정 음식들에 대해서도 나만의 기준이 명확했다. 김치는 겉절이만 먹었고, 떡볶이에 들어간 파조차도 먹지 않았으며, 단무지에 식초 뿌리는 행위를 혐오했다. 이렇게 까다로운 입맛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냥 이렇게 태어난 줄 알고 살아왔다.


 어릴 때는 할머니 댁에 자주 놀러 갔지만 커가면서 점차 방문이 줄게 되었다. 할머니 댁에 가는 거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명절이 다가올 때면 늘 전화가 오곤 했다. “올해는 오는 거니? 얼굴 잊어버리겠다. 종종 놀러 오렴.” 늘 같은 대답을 했다. “되도록이면 가볼게요.”

 

수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할머니 댁에 들리도록 만드는 할머니만의 노하우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오징어튀김’. 전화 말미에 “오징어 튀김 해놨단다”라고 할 때면 그 해에는 내가 꼭 찾아갔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요즘 스타일로 얇게 튀기는 것도 아니고 노란 튀김옷을 두껍게 튀겨서 조금만 식으면 딱딱해지는 그런 오징어튀김. 어릴 때 명절이 되면 할머니 댁에서 식혜와 오징어튀김을 잔뜩 먹으며 만화책과 텔레비전을 보는 걸 좋아했었다. '오징어튀김과 식혜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기름지고 너무 달고 손에 묻으면 끈적한 조합이지만…'

 

 할머니는 내 입맛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신김치를 안 먹는 나를 위해 식탁에는 겉절이가 항상 따로 담겨서 올라왔고, 삼촌들은 신라면만 드셨지만, 찬장 한편엔 진라면 순한 맛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장례식장에서 내내 잘 참다가 할머니가 명절 때 만들어주시던 소고기 뭇국이 갑자기 떠올라 펑펑 눈물이 났던 게 우연은 아니었나 보다. 까다롭고 초등학생 같았던 내 입맛에도 할머니 음식만은 아주 잘 맞았으니.


 내 입맛은 평생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먹는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맞추겠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들을 먹고 싶기도 않았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이 있듯이 친한 친구들도 매운걸 못 먹었으며, 커피도,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 난 적어도 그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평범했다. 우리가 말하는 떡볶이는 달달한 국물떡볶이 었으며, 어떤 음식이든 불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카페를 지독히도 안 가긴 했지만 막상 가게 되면 메뉴판에서 드링크, 논-커피 쪽을 정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가본 호프집에선 맥주 500cc를 시켜놓고 한 모금씩 번갈아 마셔보곤 치킨만 먹다 나온 기억이 있다.


출처 : pinterest


 하지만 이십 대 초반이 되자 입대를 하며 까다로운 입맛은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일반 육군에 비하면 법무부에서 복무하느라 꽤 훌륭한 식사 환경을 제공받았지만, 좋은 식사를 제공받았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음식만을 먹도록 놔두었다는 것은 아니다. 군 생활을 하며 당당하게 잔반을 남기는 행위는 거의 자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결국 먹고자 한다면 모든 걸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입맛이 되었다. 군생활을 보내는 동안 두 가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난 매운 걸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살이 아주 잘 찌는 체질이었다.


 전역을 하고 나서는 다시 초등학생 입맛으로 돌아왔는데 군 생활의 보상이라도 받길 원한다는 듯 먹고 싶은 것들만 골라서 먹었다. 카페에서는 아이스티, 술자리에서는 사이다를 마셨다. 그러다 보니 같이 동석한 사람들에게 비슷한 질문들을 받곤 했다. “오빠,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마시는 건 돈 아깝지 않아요?”, “영현 씨는 왜 술을 안 마셔?” 원하지 않는 음식을 먹고 마시는 거보단 설명이 더 쉬웠기에 늘 이렇게 대답했다. “난 단 게 좋아.”, ”술은 맛이 없어서요.”

 초등학생 입맛이라느니, 남자가 무슨 복숭아, 딸기를 좋아하냐는 이야기들은 이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봐서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상대방이 미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을 때', 또 '당황하는 나의 표정을 보고 상대방도 같이 당황했을 때'는 굉장히 난처했다. 상대의 입장에선 당연한 센스였을 테니 말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불편한 경우도 있었다. 점심시간 그리고 회식자리. 메뉴는 통일해야 했고 원치 않는 술도 마셔야 했다. 지금이야 묵은지 김치찌개라던지, 매운 갈비찜, 순두부찌개 이런 메뉴들은 없어서 못 먹고 술자리도 유연하게 빠져나가지만 사회초년생이었던 당시에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술을 권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꼰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식습관 같은 남일에 크게 참견하지 않게 되면서 해결이 되었다. 가끔 남이 싫어하는걸 억지로 시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극히 드물었다.


 스물네 살, 첫 연애는 꽤 늦은 편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는 입맛이 좀 변할까도 싶었지만 상대 쪽에서 맞추어주는 덕에 편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베스킨라빈스 쿼터 4가지 맛을 고를 때도 녹차, 요구르트, 민트 초코 3가지 맛만 빼고 골라준다던지, 매운 음식이 먹고 싶다며 나를 데려간다면 억지로 먹기를 강요하지 않거나 정 먹어야 한다면 물에 헹구는 걸 이해해주는 그런 일들. 이후의 연애들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연애를 하다가 몇 년이 지나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사실 같이 먹고 싶은 게 많았는데 내 입맛 때문에 같이 가질 못했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친구들과 따로 먹으며 풀긴 했지만 그런 것도 같이 공유하고 싶었다고. 주로 매운 음식들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때의 난 너무 이기적이었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내가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걸 굳이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고통받는 걸 구경하고 싶은 건가?' 모든 갈등의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확고한 취향에서 시작된 이기심은 여러 가지 분야에서 확장되어 나갔다고 생각한다. 이별로 가는 과정은 늘 비슷했고 "오빠는 너무 이기적이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느 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전 연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매운 음식을 좋아했고 라떼를 마시며 술도 즐기는 편이었다. 아주 일반적인 입맛을 가졌으나 항상 그랬듯이 내 입맛과는 달랐다. 만나는 날이면 화제를 가리지 않고 수다를 떨었는데, 먹는 걸 좋아하는 우린 음식 얘기도 주로 했다. 서로의 맛집을 소개하고 메뉴를 상상해가며 설명할 때면 이미 음식을 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알아가는 동안 내 입맛이 까다롭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녀와 매운 음식을 같이 먹기 위해, 혼자 있을 때 불닭볶음면, 불냉면, 땡초닭발등 매운 음식들을 먹으며 내성을 길렀다. 카페에 갔을 땐 아이스티 대신에 라테를 처음으로 시켜보고, 술을 즐기기 위해 딸기 맥주가 아닌 크림 생맥주도 시켜먹어 보았다. 누군가에겐 일상이고 소소한 일들이 나에게는 모두 도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와 잘되진 않았다. 오랜 기간 썸 아닌 썸을 타는 동안 난 매운 음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잘 먹는 사람이 되었고, 커피도 정말 피곤할 때 전략적으로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직도 술은 극복하지 못해서 내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만취했을 때 주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매운 것을 잘 먹는 사람이 되면서부터 내 입맛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매운 게 극복 가능해지니 신 것도 쓴 것도 충분히 극복이 가능했고 가리는 음식이 없어졌다. 심지어 올해에는 고수도 극복해버렸다. 입맛은 평생 변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변하지 않았던 건 입맛이 아니라 입맛을 바꿀 만큼 더 커지지 않는 마음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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