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곳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 하루에 한 장씩이라도 그림을 그릴걸'
다년간 대학로 요식업체에서 홀 매니저로 지내는 동안 일 년에 한두 번씩은 현타가 오곤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펜을 잡고 그림을 그렸으며 당시에 핫했던 페이스북에서 유명한 그림작가들의 작품을 구경했다. 꾸준히 그림을 그려서 업로드하겠다며 '하루에 하나씩'이란 뜻으로 onething_for_a_day라고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었다. 하지만 작심삼일의 연속. 오래가지 못했다. 중간에 미술학원도 잠깐 다녀봤지만 주 6일 스케줄을 소화하고 난 뒤 하루를 비워서 뭔가를 배운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당시에 유행을 타고 있던 여행 드로잉. 여행을 떠나며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언젠간 나도 해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만 품은 채 먼 미래의 나에게 숙제를 던지곤 했다.
막연한 어릴 적 꿈이었던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동기는 '여행 드로잉'이었고, 꾸준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은 '어반 스케쳐스' 모임이었다.
Urban Sketchers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의 글로벌 커뮤니티를 육성하는 데 전념하는 국제 비영리 단체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현장 드로잉의 예술적, 스토리 텔링 및 교육적 가치를 높이고, 그 실천을 촉진하고, 그들이 살고 여행하는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전 세계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나갔던 어반 스케치 모임은 2019년 3월 그림 즐기는 세상 정기모임이었다. 장소는 여의도 한강공원이었고 꽤 추운 날씨여서 롱 패딩을 입고 손을 덜덜 떨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당시 여성마라톤이 열렸었고 그림으로 남겨놓았던 공사 중인 건물은 현재 완공이 되었다. 그림 모임으로만 세 번째 방문하는 곳이라 익숙한 곳이지만 올 때마다 첫 모임에 참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연예인 같았던 작가님은 어느새 친한 형이 되었고, 참가자로 방문했던 모임에서는 운영진을 맡고 있다. 그때는 모든 게 낯선 처음이었고 지금은 적당히 권태롭다.
USK SEOUL(Urban sketchers Seoul)은 열 시 삼십 분에 모여서 인사를 나누고 네시에 다시 모이기까지 꽤 긴 호흡으로 그릴 수 있는 모임이다. 그래서 삼십 분 정도 늦게 도착했지만 전혀 걱정은 없었다. 네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슬렁 작가님을 따라온 촬영팀 때문에 12시에 한번 모인다는 소식이 공지되었고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모일 때 한장은 그려 가야지'
얄궂은 날씨였다. 햇볕에 가면 따뜻하지만 탈것 같고 그늘로 가면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그늘을 찾아 자리를 폈고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4명의 여학생들이 돗자리를 펴고 노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담기로 했다.
오후에는 한강아라호 앞에 앉아서 그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바람을 막아주긴 했지만 그늘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자 추워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포인트를 찾느라 너무 헤매서인지 그림을 완성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고 집결 시간에 2분 늦으면서 단체사진도 찍지 못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지 않는 포인트에서 그려서 그랬는지 네시가 되어서야 인사를 나눈 분들이 꽤 되었고, 다가오는 경주 페스타 이야기로 떠들썩해졌다. 여행 계획을 공유하는 것만큼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없다지만, 저녁 약속 때문에 급히 또 자리를 옮겨야 했다.
'현장감'이라는 단어는 급하게 그리느라 떨어진 그림의 퀄리티를 포장하기에 매우 달콤한 단어이다.
이번에 그린 그림이 썩 맘에 들진 않지만 장소가 장소인만큼 초심을 떠올리고 포장해봐야겠다.
'현장감도 있고, 뭐 그때에 비해선 나아졌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