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교정_프롤로그
권교정 작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고등학생 시절 ㅁ시에서 살았던 단칸방이 떠오른다. 장마철이면 빗방울이 슬레이트 지붕 아래 얇은 천장을 지나 장판으로 똑똑 떨어지던 작은 방. 그런 곳을 집 삼아 살다 보면 쨍한 날에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눅눅하고, 비가 샌 자리에 곰팡이가 스미듯 마음에도 가난이 스미게 마련이다. 아무리 오래도록 볕을 쬐고 바람을 쐬어도 누지기만 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시절 내게는 ‘권교정’이라는 세계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직 “요정과 난쟁이와 마법사가 존재했”던 세상에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모험을 떠났고(『헬무트』), 깨끗이 빨아 볕 좋은 곳에서 말린 뒤 빳빳하게 다린 교복처럼 말갛고 구김 없는 소녀, 소년이 되어 싱그럽고 두근거리는 학창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어색해도 괜찮아』, 『정말로 진짜!』, 『올웨이즈(Always)』).
의붓딸인 백설공주가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지옥을 겪지 않도록 스스로 마녀 행세를 한 계모 왕비나 사실은 아이들을 무척 아낀 후크 선장의 도움으로 네버랜드를 벗어나 자연스레 “인생의 모든 단계를 차곡차곡 밟”으며 나이 든 피터팬처럼 새로운 동화 속 주인공이 되었고(『피리 부는 사나이』, 『붕우』),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어쩌면 세상의 시스템 같은)을 알고 싶다는 의지로 기원전부터 소멸과 부활을 거듭하며 진화해 온 영혼 디오티마와 함께 인류 최초 우주함선을 타고 시공간을 넘나들며 세상의 근원을 찾아 떠돌기도 했다(『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반짝이고 따스하며 유쾌하고 산뜻한 ‘교월드’가 있었기에 내 열일곱과 열여덟과 열아홉은 눅진눅진한 현실에 모조리 잠식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볕이 잘 들고 비 샐 걱정 없는 집에 사는 지금도 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권교정 작가를 ‘킹교’ 또는 ‘폐하’라 부른다. 아울러 오늘부터 나는 ‘나의 폐하’에게 내 지난날 한 귀퉁이를 보송보송하게 해 주어서,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 주어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고자 이곳에 폐하 작품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조금 더디더라도 꾸준히 여기에 써 나갈 글들은 폐하에게 올리는 연서이기도 하다. 부디 앞으로도 오래도록 ‘킹교’로 남아 달라는 간절함을 함께 담은.
*모든 그림은 저작권자인 권교정 작가님께 허락을 얻어 실었다. 그림 출처는 교월드(www.gyoworl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