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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달해 Mar 03. 2017

심야 11시, 치열한 드라마 경쟁

[대중문화 이야기]

늦은 밤 안방극장의 편성 방향이 변하고 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 또는 예능 프로그램이 주로 방송되던 밤 11시에 몰입도를 요하는 드라마가 편성돼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치즈 인 더 트랩’ ‘또, 오해영’ 등 지난해 tvN이 11시대에 히트작을 줄줄이 내놓으면서 ‘심야에도 트렌디한 미니시리즈가 통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뒤로 타 방송사 역시 ‘11시 공략’을 목표로 드라마를 내놓는 중이다. 지상파는 최근 종영한 KBS2 TV ‘마음의 소리’, 20일 첫 방송된 SBS ‘초인가족 2017’ 등 주력 미니시리즈보다 실험적인 작품을 이 시간대에 내보내며 반응을 살피고 있다. 결과는 꽤 양호한 편이었다. 비지상파의 경우 좀 더 공격적이다. tvN이 11시대 월화극 외에 금요일과 토요일 11시에도 ‘안투라지’를 배치한 데 이어 JTBC까지 기존 8시 30분에 방송되던 금토 드라마 시간대를 11시로 옮기며 맞불을 놨다. 24일 밤 11시에 박보영 주연의 ‘힘쎈여자 도봉순’을 첫 주자로 내보낸다. 조용하던 밤 11시 안방극장이 드라마 경쟁으로 뜨거워지고 있다. 

금요일 밤 11시에 편성돼 기대 이상의 반응을 불러일으킨 KBS 2TV '마음의 소리' 


기존 밤 11시, 사실상 드라마 불모지 

앞서 심야에 방송되던 드라마는 KBS 단막극 정도가 유일했다. 11시 또는 11시가 훌쩍 넘어, 심지어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스타트해 드라마 골수 팬층에 어필하는 수준이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채널 전반에 걸쳐 시청자를 끌어들이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공을 들인 작품보다 소위 ‘땜빵용’이거나 ‘어쩔 수 없이 방송은 해야 하는’ 드라마가 편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KBS 단막극의 경우, 공영방송사 드라마국이 ‘한국 드라마의 발전’이란 나름의 사명감으로 사수하려 노력했던 포맷이었지만 아쉽게도 늦은 밤 11시에 방송된 탓에 주목도를 높이기는 쉽지 않았다. 일부 작품이 화제가 된 경우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밤 11시를 드라마 시간대로 인식하는 시청자는 드물었다. ‘드물었다’가 아니라 사실상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만큼 밤 11시는 드라마 편성에서 극히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주중, 그리고 주말까지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과 인지도 높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진을 치고 있으니 사실 드라마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지금도 월요일 11시대에 KBS2 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화요일이면 SBS ‘불타는 청춘’과 MBC ‘PD수첩’, 수요일이 되면 KBS2 TV ‘추적 60분’과 MBC ‘라디오 스타’가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주말로 들어서는 금요일 밤 11시대에도 MBC ‘나 혼자 산다’와 SBS ‘미운 우리 새끼’ 등 고정 팬층을 확보한 예능이 방송되고 있다. 

이처럼 기존 밤 11시대에는 항상 ‘그날 방송으로 내용이 정리되는’ 콘텐츠가 주를 이뤘다. 이유는 명확했다. 드라마처럼 연속성을 가진 콘텐츠의 경우 지속적으로 시청자의 시선을 잡아끌고 다음 날, 또 다음 주와 그다음 주까지 채널을 고정하게 하여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청자들이 하루를 마감하려고 취침 준비를 하는 등 집중력이 흐려지는 시간대에 편성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종종 드라마 편성이 이뤄지더라도 1회 또는 4회 안에 끝나는 단막극 정도가 유일했다. 특히 주말 밤 11시로 들어갈 땐 이 시간대에 TV 본방송 시청자 중 젊은 층을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보내느라 잔뜩 흥이 오른 젊은 세대가 드라마 시청을 위해 그 시간에 맞춰 TV를 켜게 한다는 건, 솔직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tvN 월-화 11시대를 살려놓은 히트작 '치즈 인 더 트랩'


tvN 선공으로 밤 11시대 드라마 시장 열려 
과감하게 이 시간대 개척에 나서 성공을 거둔 건 tvN이었다. 전략이라고는 하나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상파가 주중 밤 10시에 주력 미니시리즈를 편성하며 안방극장을 장악하고 있었던 만큼, 동 시간대 경쟁이 어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심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시장. 이 길을 가는 개척자에게 장애물과 고난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tvN은 밤 11시 월화극은 출발 이후 줄곧 1~2%의 시청률을 올리는 수준에서 더 이상 상승세를 타지 못했다. 8시대 tvN 금토 드라마 라인업이 ‘응답하라’ 시리즈와 ‘미생’ ‘시그널’ 등 빅히트작으로 도배될 때까지도 밤 11시 월화극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치즈 인 더 트랩’ ‘또, 오해영’ 등의 작품이 높은 시청률은 물론이고 화제성을 끌어올리며 히트작 반열에 올라 밤 11시대를 ‘tvN 드라마존’으로 인식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이어 tvN은 주중 외 주말 11시까지 새로운 ‘드라마 존’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다. 이미 8시대에 굳건해진 자사 금토 드라마 외 또 다른 슬롯을 형성해 채널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계획이었다. 첫 시도였던 ‘안투라지’가 1% 미만까지 시청률이 떨어지는 등 크게 흥행에 실패했지만, 그 뒤로도 이 시간대 개척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주말 밤 11시대 개척을 노리고 편성했다 저조한 시청률로 외면받은 tvN '안투라지' 


어쨌든 시장이 한 번 열리고 나니 들어오는 경쟁작은 늘어났다. 먼저, KBS가 자사에서 만들어낸 시트콤 형태의 웹 드라마 ‘마음의 소리’를 금요일 밤 11시대에 편성해 쏠쏠한 재미를 봤다. 아무리 탄탄한 팬층을 가진 인기웹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이미 웹상에서 공개된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괜찮은 시청률을 기대한다는 건 어찌 보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도 ‘마음의 소리’는 안방극장에 방영되던 당시 5%대를 넘나드는 시청률과 함께 호응을 얻었다. ‘안투라지’가 기대 이하의 재미와 완성도로 혹평을 들었던 것과 달리 ‘마음의 소리’는 원작을 절묘하게 실사화해 큰 웃음을 주며 시청자를 TV 앞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월요일 밤 11시에 편성돼 대중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한 SBS '초인가족' 


SBS-JTBC도 드라마로 밤 11시 공략 
KBS에 이어 SBS도 밤 11시 드라마 시장 공략에 나섰다. SBS는 월요일 밤 11시대에 ‘초인가족 2017’을 편성하고 지난 20일 첫 방송을 마쳤다. 이 드라마는 시트콤의 포맷을 일정 부분 차용해 매 회차별로 완결성 있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러닝타임 역시 각 회당 30여 분 분량이다. 포복절도하는 웃음을 끌어내던 과거의 시트콤과 달리 과장된 유머코드 없이 한 가족의 일상을 잔잔하고 재치있게 그려냈다. 또한, 여기에 사회 풍자와 삶의 해학까지 곁들여 보는 재미를 더했다. 캐릭터를 살려주는 ‘차진 연기’로 극찬받은 박혁권을 비롯해 출연자들이 저마다 자연스럽게 개성을 부각시켜 캐릭터를 인지시켰으며, 그 결과 1회부터 6%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드라마로 경쟁하기에 워낙 어려운 시간대인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콘텐츠가 좋으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금-토 주말 밤 11시에 투입된 JTBC '힘쎈여자 도봉순' 


이제 남은 건 주말 밤 11시대다. tvN에 이어 지상파까지 들어와 성과를 올린 주중과 달리 주말 밤 11시는 여전히 미개척 상태였다. 이미 tvN이 ‘안투라지’를 내보냈다가 크게 망했다. 그런데 이 시장에 JTBC가 과감히 출사표를 던지며 ‘힘쎈여자 도봉순’을 편성하는 강수를 뒀다. 
일단 콘텐츠 자체는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전작 ‘오, 나의 귀신님’으로 전성기를 누린 박보영의 드라마인데다 내용 역시 타이틀처럼 통통 튄다. 초능력에 가까운 괴력을 가진 귀엽고 작은 여자와 훤칠한 키의 훈남들이 보여주는 로맨스다. 여기에 유머와 스릴러, 액션까지 가미돼 호기심을 자극한다. JTBC는 ‘힘쎈여자 도봉순’을 시작으로 박해진 주연작 ‘맨투맨’으로 이어지는 라인업을 금토 밤 11시대에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다. 소위 ‘불금’을 보내느라 이 시간에 TV를 시청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실제 시청률 데이터를 살펴봐도 주말 밤 11시대 시청자 중 20대의 비중은 극히 낮다. 그런데 이 시간대에 젊은 층에 어필할 수 있는 트렌디한 소재의 드라마를 내보낸다니 어찌 보면 모험에 가깝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불모지를 쓸모있는 땅으로 바꾼 개척자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만만치 않으니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일이기도 하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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