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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달해 Feb 13. 2017

'진짜'를 가리는 '가짜', '가짜'를 믿는 사람들

[대중문화 이야기]

지난해 말 시작된 청와대발 ‘현실 막장 드라마’의 전개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수도 없이 많은 정황이 드러나고 증거가 확보되는데도 이 드라마의 악역들은 음모론 운운하며 발뺌하고 있다. 둘러대는 수준이 논리와 무관해 치졸하기 짝이 없는데도 그저 ‘모르쇠’로 일관하니 지켜보는 이들의 속은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게다가 이젠 새누리당 친박계 국회의원들과 전경련, 그리고 대기업에 극우조직까지 합세해 ‘없는 사실’을 유포하며 ‘눈 멀고 귀 막힌’ 지지세력을 규합하려 애쓰고 있다. 드라마 ‘피고인’ ‘펀치’, 영화 ‘제보자’ ‘내부자들’ ‘더 킹’ 등에서 묘사된 극적인 상황이 현실에서 버젓이 재현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언급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려진 정-재계 권력과 언론의 ‘진실 위조 협동작전’은 차라리 지금 보고 있는 ‘현실 막장 드라마’에 비하면 굉장히 촘촘하고 디테일이 살아있다. 끝까지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겠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철면피들, 그 옆에 붙어 피를 빨아먹으려는 거머리들, 콩고물 하나 떨어질까 그 뒤를 따라다니는 기생충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우격다짐으로 권력욕을 드러내는 그들이 차라리 참고했으면 좋겠다싶은 작품들이다. 극중 ‘나쁜 놈’들은 그래도 치밀하거나 앞뒤 행동에 있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확보하고 있다. 극적으로 부풀려 가공했는데도 오히려 지금 ‘현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들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드라마 '피고인'의 한 장면

‘피고인’, 진실 조작자의 치밀함

현재 방영중인 SBS 월화극 ‘피고인’은 가족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기억까지 잃어버린 채 수감된 검사 지성(박정우 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극중 지성은 쌍둥이 형을 죽이고 이를 은폐하려던 재벌 2세 엄기준(차민호 역)의 범죄 사실을 캐내려다 궁지에 몰리게 된다. 6회가 방송될 때까지는 일방적으로 벼랑 끝까지 내몰리는 지성의 모습이 묘사됐다. 지성이 자신이 연루된 살인사건과 관련해 조금씩 기억을 되살리며 희망의 끈을 잡으려하지만 모든 정황은 그가 진짜 살인자란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드라마 '피고인'의 남자주인공 박정우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 지성. 극중 지성은 재벌2세의 살인사건 혐의를 입증하려다 모든 것을 잃고 살인죄를 뒤집어 쓴다. 


엄기준이 살인을 감행하고 자신이 죽인 쌍둥이 형의 대역이 되는 과정은 우연의 반복이 겹쳐 그다지 정교해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사 지성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우는 수법은 꽤나 악랄하고 섬세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수법을 동원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상대의 기억까지 지워버리고 살인죄를 덮어씌우는가하면 도무지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결국 최후에는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어쨌든 부정적인 이슈 발생을 막고 사실을 은폐하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이 정도로 치밀한 면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 최고 권력자를 움직여 어설픈 음모를 꾸미다 들킨 ‘현실 막장드라마’의 주인공들과 뚜렷하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현실에서는 ‘한탕 작전’에 투입된 멤버들의 면면이 보잘 것 없고 작전을 이끈 중심인물의 지휘력이 특히 형편없다. 무엇보다 그들의 비리를 물심양면 지원해 주고도 그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했던 일’이라 착각하는 국가 최고 권력자의 지적 수준이 안타깝다. ‘브레인’이라 부를만한 인물 하나 없이, 조악한 멤버로 팀을 구성해 자체 판단능력도 없는 권력자를 조종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다 지금의 난국을 맞이했다. 일이 터진 후 그 수습과정 역시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검 수사에 맞서고 있는 그들의 대응방식은 그저 “잘못없다”고 우기고 잡아떼는 것 뿐이다. 차라리 ‘피고인’의 엄기준처럼 치밀하기라도 했으면 최소한 우스워보이진 않았을텐데. 


'양아치급 검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더 킹'


‘더 킹’,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

현재 극장에서 관객수 500만 명을 넘어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더 킹’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부정적으로 이용해 대한민국 최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검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각종 사건을 조작하고 필요한 시기에 맞춰 준비된 이슈를 터트려 여론을 흔들며 권력을 유지하는 ‘양아치’ 검사들을 통해 대한민국 검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드러낸다. 청와대로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검찰을 손아귀에 넣고 흔들며 더러운 짓을 일삼던 현실세계의 인물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다. 재수없게(그의 입장에서는) 잘못 걸려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된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행보로 권력을 누린 숱한 인물들을 연상하도록 유도한다. 


영화 '더 킹'의 한 장면

특히 극중 정우성(한강식 역)과 조인성(박태수 역) 등 극중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는 말이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세력들의 ‘초점 흐리기’ 전술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펼쳐질 때 민감한 내용의 사건을 대중에 알려 시선을 분산시키는 극중 검사들의 수법이다. 예산을 투입해 극우세력과 극우매체를 동원하고 귀 얇은 일부 보수층을 흔들며 ‘가짜 뉴스’까지 양산하고 있는 박근혜 지지세력의 움직임과 다를 바 없다. ‘최순실 게이트’를 열어젖힌 JTBC의 ‘태블릿PC' 보도에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하며, 진실을 호도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거짓을 진실이라 주장하며 악다구니를 쓴다. 편협한 사고와 지리멸렬한 언행으로 대중의 외면을 받고 너덜너덜해진 변희재를 돌격대장으로 내세워 진흙탕을 만든다. 그 속에서 길 못 찾고 헤매는 이들을 김진태가 건져올린다. “내 손을 잡아야 산다”고 말하면서. 대한민국의 권력 주체가 바뀌는 동시에 잃을 게 많은 이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악다구니는 ‘더 킹’의 ‘나쁜 검사’들이 보여준 주도면밀한 전략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 연예계 이슈나 몇 개 찾아 터트리는 게 오히려 그들의 물타기 작전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영화 '제보자'는 언론이 제 역할을 다 해내지 못할 때, 또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언론을 통해 진실을 왜곡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잘 묘사했다. 


진실이 달갑지 않은 이들의 세상 

욕심 많은 이들에게는 그 뱃속을 채우기 위해 물리쳐야 할 적이 많고 숨겨야할 것도 많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먼저 피신한 후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라디오에 내보내며 ‘정부는 서울을 사수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피난민 행렬이 이어지고 있던 시간에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다는 이유로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끊어 수많은 국민을 죽였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대참사는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전두환이 이끈 군부세력이 광주를 폐쇄하고 언론을 장악해 사건에 대한 거짓정보를 유포했다. 그 시절 권력자들은 ‘국가 수호’ 또는 ‘국가 질서 유지’ 등의 핑계로 뻔뻔하게 국민을 속이며 잇속을 챙겼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진실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두려울 수 밖에 없다. 기록만 챙겨봐도 뒷목을 잡게 만드는 이 역사적 사건에서, 이번에 주목할 부분은 ‘권력과 언론의 결탁’이다. 권력이 언론을 자기 방식대로 통제했을 때, 또 언론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권력의 편에 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준 사례다. 


권력과 언론의 결탁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상황을 묘사해 큰 인기를 얻은 영화 '내부자들'. 극중 "대중은 개, 돼지"라는 대사가 특히 화제가 됐다.


“대중은 개, 돼지”라는 대사를 남기며 권력자들의 추악한 이면을 보여준 영화 ‘내부자들’, 국가와 언론이 거짓을 진실인 양 부풀려 국민을 집단최면 사태로 만들어가는 과정과 이를 폭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제보자’ 등의 영화가 ‘권력과 언론의 결탁’이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잘 묘사했다. 

대권에 도전하겠다면서 양심, 신념 따위 내팽개친 채 가증스럽게 연기하는 눈꼴 시린 정치인들이 판을 친다.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 황당해 영화나 드라마로 묘사하기도 쉽지 않다. 캐릭터들은 최소한의 설득력도 확보하기 힘들 정도로 막 나가고, 그들의 언행 역시 개연성이 없어 이해하기 힘들다. 영화와 드라마에 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다가는 ‘너무 과장됐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막장 현실’ 속에서 대중문화 콘텐트의 ‘센 내용’들마저 너무나 점잖게 느껴져 지루해지는 요즘이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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