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1장 야키니쿠 인생(焼肉人生)


제1장 야키니쿠 인생(焼肉人生)


1958년(쇼와 33년),


15세의 봄, 나는 야키니쿠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요리의 길은,


그야말로 “인생을 걸고 정진해야만 비로소 보람이 생기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은,


단순히 기술을 익힌다고 해서 순탄히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배우고,


자신을 갈고닦으며,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해야만


비로소 “맛의 진리(眞理)”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요리란,


단순히 손끝의 재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빚어내야만 완전해지는 예술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리사의 인생에는 끝이 없으며,


배움 또한 평생 계속된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에게 있어


야키니쿠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미지의 바다로 뛰어드는 것과도 같았다.


젊음의 혈기와 호기심만을 믿고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


그리고 “고기”라는 존재가 가르쳐준 인내와 정직,


그리고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즐거움과 고통이 교차하는 그 세월 속에서,


야키니쿠라는 길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삶의 원천이 되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야키니쿠 인생에 대한 기록이다.





부디 이 책을 읽는 분들이,


젊은 날의 나처럼


불확실함 속에서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발자취가


누군가의 인생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야키니쿠 입문 ― 15세, 야키니쿠의 세계로





1942년, 나는 군마현 다카사키시(高崎市)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다섯 남매를 둔 평범한 가정이었다.


형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전선에 나가 있었고,


나는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의 생활은 매우 궁핍하였다.


먹을 것이 부족하였고, 옷은 언제나 누더기였다.


그러나 그런 시절 속에서도,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비록 지금은 어렵더라도,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그 말은 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지금까지도 나의 인생 지침이 되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바로 일을 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지인의 소개로


도쿄의 식육 관련 업계에서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그때 내 나이, 15세였다.


이것이 내가 ‘야키니쿠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계기였다.





처음 상경하던 날의 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당시 군마에서 도쿄까지는


기차로 네 시간 정도가 걸렸다.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도시,


커다란 가방 하나를 들고 상경하는 내 마음은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이었다.





도쿄에 도착했을 때,


도시의 활기와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에 압도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한없이 순진한 시골 소년이었다.





처음 일한 곳은,


당시 도쿄 시내에서도 손꼽히던 식육 도매상이었다.


육류를 해체하고, 절단하고, 포장하는 일은


모두 손으로 직접 해야 했다.


거대한 쇠고기 덩어리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나는 이를 “배움의 과정”이라 여기며


하루하루 묵묵히 일에 몰두하였다.





일은 고되었다.


손에는 늘 상처가 끊이지 않았고,


겨울에는 찬 고기 냄새와 피 냄새가 몸에 배어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이 일을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손이 익고,


고기의 부위를 정확히 알아보게 될 때마다


묘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당시에는 냉장·냉동 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고기를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


매일 새벽부터 시장으로 출근해야 했다.


새벽 3시가 되면 출근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식육업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정확성과 속도가 생명인 정밀한 기술의 세계였다.


이 일에서 실수는 곧 손해로 이어졌고,


품질이 곧 신뢰와 직결되었다.


그 때문에,


선배들의 지시는 엄격했고,


단 한 번의 부주의도 용납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꾸중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정직하게 살아라”는 가르침이


언제나 내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로부터 나는 점점 식육이라는 세계의 깊이를 깨닫게 되었다.


고기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있고,


그 차이는 눈, 손, 그리고 감각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 시절,


나는 단순히 고기를 자르는 기술을 익힌 것이 아니라,


“고기를 존중하는 마음”을 배웠다.





고기는 사람의 생명을 지탱하는 음식이다.


그렇기에,


한 점 한 점 정성을 다해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마음이야말로,


이후 내가 평생 걸어온 야키니쿠 인생의 출발점이 되었다.



명월관(明月館) 그 하나


― 도쿄의 야키니쿠 발상지의 풍경 ―





1950년대 말, 나는 15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도쿄로 상경하였다.


처음 발을 들인 곳은 도쿄의 미나토구(港区) 시바(芝)에 위치한 ‘명월관(明月館)’이었다.


이곳은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식육 전문 야키니쿠점으로, 당시에는 이미 지역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었다.





명월관은,


한국에서 건너온 재일 교포들이 운영하던 식당이었다.


쇠고기를 불에 직접 구워 먹는 이 새로운 조리법은


전후 일본인들에게는 아직 낯설고 호기심 어린 음식이었다.


그 시절,


‘야키니쿠(焼肉)’라는 말조차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그러나,


명월관의 문 앞에는 언제나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만큼 이곳의 고기는 신선했고,


그 맛은 “도쿄에서 가장 맛있는 불고기”라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나는 이곳에서 숙식하며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아침 10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하루 종일 고기를 썰고, 굽고, 설거지하고, 가게 청소를 하였다.


이 생활은 그야말로 수련(修行) 그 자체였다.





당시의 급여는 한 달에 6천 엔.


그 중 절반 이상은 숙식비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나는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돈을 받으면서 기술을 배운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일은 힘들었지만,


명월관에서 배운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고기를 다루는 법,


불의 온도 조절,


고객의 표정에서 만족과 불만을 읽는 눈,


이 모든 것이 “요리사의 감(勘)”을 길러주는 현장이었다.





점심시간에는


비즈니스맨과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저녁에는 가족 단위 손님들이 많았다.


한 사람분 세트는 칼비(갈비) 150엔, 로스(등심) 120엔,


밥은 10엔,


국은 20엔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이지만,


그 당시 일본의 물가로는 꽤 비싼 편이었다.





하지만 손님들은


그 가격을 기꺼이 지불했다.


그만큼 “명월관의 고기에는 진심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기를 굽는 사람, 불을 관리하는 사람,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


모두가 그 한 접시에 혼을 담았다.





나는 설거지를 하며 그 모습을 매일 지켜보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언젠가는 나도 저런 고기를 낼 수 있는 요리사가 되겠다.”


이것이 훗날 조조엔(叙々苑)을 창업하게 된 내 인생의 첫 출발점이었다.





그때의 명월관은,


지금도 나의 마음속에 “야키니쿠의 원점”으로 남아 있다.


불 앞에서 땀을 흘리던 기억,


손님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연기 자욱한 식당 안의 고소한 냄새.


그 모든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든 소중한 기억이다.



명월관(明月館) 그 둘 ― 숙식 생활의 하루 일정





명월관에서의 생활은 말 그대로 **‘숙식 일체(住み込み)’**였다.


직원들은 모두 가게 2층의 다다미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일과 숙박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방에는 약 여덟 명의 종업원이 함께 지냈다.


좁은 공간에 이불을 포개 놓고 자야 했기 때문에,


몸을 돌릴 때마다 서로의 팔이 부딪힐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꿈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는 언제나 새벽 4시 반에 시작되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서는 갓 도축된 고기를 운반하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큰 짐을 손수레에 실어 가게로 옮기고,


그날 사용할 고기의 선별과 손질을 맡았다.


이른 아침 공기 속에서 맡는 피 냄새와 철 냄새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가게의 문은 오전 10시에 열렸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손님들이 몰려들었고,


점심과 저녁 사이의 휴식 시간에도


우리는 고기 손질과 청소로 쉴 틈이 없었다.





일과는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다.


영업이 끝난 뒤에는 설거지와 그릇 정리,


불판 청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손에는 늘 화상 자국과 상처가 남아 있었다.


하루가 끝나면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뿌듯했다.





신입 직원이었던 나는,


당시의 선배들에게 ‘아라이(新井)’ 대신


‘아라보(新坊, 꼬마 신아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나에게 엄격했지만,


그 속에는 따뜻한 정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고기를 써는 각도나 두께를 조금이라도 틀리면


“아라보, 이건 먹는 사람이 손해 보는 거야.”


라며 다시 자르게 했다.


그 한마디에는


‘요리란 상대를 위한 일’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명월관의 식사는 직원도 손님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밥을 먹는 순서는 항상 마지막이었다.


손님이 떠난 뒤,


남은 고기의 가장자리나 잘린 부분을 모아 구워 먹었다.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힘든 노동 후에 먹는 한 점의 고기에는


‘노동의 보상’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면 밤 1시가 넘었다.


방 안에는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의 땀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는 행복했다.





가게의 벽 너머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이 세상에서


‘맛있는 고기를 내는 요리사’로 인정받고 싶다.”





이러한 하루하루가 쌓여,


나는 야키니쿠의 기술뿐 아니라,


**인내(忍耐)**와 **근면(勤勉)**의 의미를 몸으로 배웠다.


그것이 훗날,


조조엔(叙々苑)을 창립하게 되는


내 인생의 밑바탕이 되었다.



명월관(明月館) 그 셋 ― 삶은 달걀 사건과 휴일의 영화





명월관에서 일하던 시절,


나의 월급은 3,000엔이었다.


그 돈으로는 방세도 낼 수 없었고,


옷 한 벌 사 입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숙식이 제공되는 일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잠잘 곳과 먹을 것은 해결되었지만,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이 끝난 직후의 일이었다.


가게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삶은 달걀 한 개


내 시선을 끌었다.


하얗게 반질거리는 그 달걀은


그야말로 배고픈 나에게는 황금처럼 보였다.





배는 고팠고, 손은 떨렸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그 달걀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껍질을 벗기려는 순간,


뒤에서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달걀, 네가 먹을 거냐?”


돌아보니 주방의 선배가 서 있었다.


그는 나를 꾸짖지 않았다.


그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짧게 한마디만 남겼다.


“배가 고프면, 정직하게 말해라.”





그 말이 내 가슴을 강하게 때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고,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사과했다.


그 선배는


내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달걀을 건넸다.


“이건 네가 먹어라.


하지만 다음부터는,


허락 없이 손대지 말아라.”





그날 밤,


나는 혼자서 눈물을 흘리며


그 달걀을 먹었다.


눈물과 함께 삼킨 그 한 알의 달걀은,


내 평생의 교훈이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정직이란, 신뢰의 시작이다.”


그 후 나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비겁한 선택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명월관에서의 생활은 고되고 가난했지만,


그 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情)**이 있었다.


모두가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연기를 마시며,


같은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휴일은 한 달에 단 이틀뿐이었다.


그마저도 낮에는 시장의 잡일을 도왔고,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자유시간이 생겼다.


그럴 때면 나는 동료들과 함께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입장료는 50엔.


당시의 나에게는 큰돈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세상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극장 안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했고,


화면에 비친 배우들의 웃음과 눈물이


마치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불빛이 반짝이는 도쿄의 거리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이 도시에서 내 이름을 알리고 싶다.”


그때의 그 소박한 꿈이,


훗날 나를 ‘조조엔(叙々苑)’으로 이끌었다.





삶은 달걀 사건과 휴일의 영화 ―


이 두 가지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야키니쿠 인생의 서곡(序章)’**으로 남아 있다.



방랑기(放浪期) 그 하나 ― 선배의 부름을 받고 오사카로 야반도주





명월관(明月館)에서 숙식하며 일한 지도 어느덧 삼 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고기를 썰고 불을 다루며,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다.


몸은 점점 단단해지고,


손에는 칼이 남긴 굳은살이 깊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만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그 시절,


명월관의 생활은 규율이 엄격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꾸중이 이어졌고,


휴일도 거의 없었다.


물론 그것이 ‘수련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청춘의 한가운데를 고된 노동으로만 채우는 나날은


젊은 나에게 너무나 버거웠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도쿄에 함께 있던 한 선배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야스미치, 오사카로 오지 않겠느냐?


내가 일하는 가게에는 네가 일할 자리가 있다.”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밤이 깊어지던 어느 날,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야반도주’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가게의 주인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조용히 뒷문을 나섰다.


기차역까지 걸어가며


마음속에서는 죄책감과 해방감이 교차했다.





오사카행 열차에 몸을 싣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거야.’


그때의 심정은


두려움보다도 설렘이 더 컸다.





열차는 새벽녘에 오사카역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거리, 처음 맡는 공기.


명월관의 주방을 떠난 나는


마치 세상 밖으로 나온 새처럼 자유를 느꼈다.


하지만 곧 현실이 나를 맞이했다.


손에는 단돈 몇천 엔뿐,


기댈 곳도, 잘 곳도 없었다.





선배는 약속한 대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는 당시 오사카의 한 식육 도매점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를 그곳의 숙식 직원으로 소개했다.


그렇게 나는 오사카의 식육시장,


즉 **‘서쪽의 식육 본거지’**로 불리던 지역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오사카의 일터는 도쿄보다 훨씬 활기가 넘쳤다.


시장 안에는 고기 냄새와 사람의 외침이 뒤섞여 있었다.


도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유로운 분위기,


그리고 선후배 간의 인간적인 관계가


나를 한결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낯선 도시, 낯선 말투,


그리고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나는 다시 처음부터 배우는 입장이 되었다.


손끝의 감각 하나,


칼의 각도 하나까지도 오사카식으로 다시 익혀야 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 시절의 나는 조금씩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난했지만,


매일의 노동 속에서 땀과 웃음이 섞여 있었다.





명월관에서 배운 규율과 정직함,


그리고 오사카에서 느낀 자유와 인간미.


이 두 가지가 훗날


내 인생의 두 축이 되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인생이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배우며 걸어가는 길이다.”





그 후 수년 동안 나는


오사카의 여러 식육점과 야키니쿠집을 전전하며


일을 배웠다.


그 사이,


도쿄에서 나를 찾아온 명월관의 사장이


식육조합을 통해 내 행방을 알아내


오사카의 가게로 찾아왔다.





그는 조용히 내 앞에 앉아 말했다.


“야스미치, 고생이 많았겠구나.


하지만 이제 돌아오너라.”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아니라


어딘가 안도와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도망친 제자를 꾸짖지 않고


찾아와 준 그 은혜에


마음 깊이 감사했다.


그날 밤,


나는 오사카의 하숙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아직 미숙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다.’


그 결심이,


다시 나를 ‘야키니쿠의 길’로 이끌었다.



방랑기(放浪期) 그 둘 ― 운명의 서막, 다이도엔(大同苑)으로





오사카에서의 생활이 어느덧 몇 년째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불안과 외로움 속에 시작된 생활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곳의 사람들과 정이 들었다.


시장은 언제나 활기로 가득했고,


새벽마다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갓 손질된 고기의 붉은 빛은,


내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여전히 방랑하는 젊은 요리사였다.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고,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그저 기술을 익히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 무렵,


한 선배로부터 “다이도엔(大同苑)”이라는 가게를 소개받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야스미치, 네가 진심으로 배우고 싶다면,


그곳으로 가는 게 좋을 거야.


거긴 진짜 실력을 요구하는 집이야.”





다이도엔은 당시 오사카에서도 손꼽히던


유명 야키니쿠 전문점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 맛과 서비스로 정평이 나 있었다.


손님들은 입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왔고,


밤이 되면 가게 앞은 언제나 북적였다.





나는 즉시 그곳으로 찾아가


일자리를 구했다.


사장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짧게 말했다.


“배울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내일부터 나와라.”


그 한마디에,


나는 모든 것을 걸겠다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도엔에서의 일은


명월관보다 훨씬 혹독했다.


고기의 품질은 최고였고,


그만큼 요리사에게 요구되는 기준도 높았다.


고기의 지방 분포, 숙성의 정도, 불의 세기 —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사장은 즉시 눈치채고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매서운 시선 속에서


나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의 꾸중은 단순한 질책이 아니라,


진심으로 제자를 단련시키려는 장인의 열정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사장이 내게 건넨 한 마디였다.


“야스미치, 고기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그 생명을 다루는 자라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 앞에 서야 한다.”


그 말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다이도엔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전투였다.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고기를 썰고, 불을 피우고, 접시를 닦았다.


불 앞에 서면 얼굴은 뜨거움으로 붉게 달아올랐고,


손끝은 수없이 데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다이도엔의 주방에서는


“불과 고기와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


고기가 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고,


그 향기가 손님에게 전해지는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요리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


나는 단순히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요리인(料理人)’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의 한 요리인으로부터


“도쿄로 돌아와 함께 새로운 가게를 시작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것이 훗날


**‘조조엔(叙々苑)’**의 시작이 될 줄은,


그때의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이도엔(大同苑) 그 하나 ― 야키니쿠 요리인, 길을 결심하다





다이도엔에서의 생활은


명월관 시절과는 전혀 달랐다.


명월관이 ‘수련의 장’이었다면,


다이도엔은 말 그대로 ‘전장의 주방’이었다.


매일같이 밀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하기 위해


요리사들은 쉼 없이 손을 놀려야 했다.





주방에는 항상 고기 굽는 소리와 연기가 가득했다.


쇠 냄새, 불 냄새, 간장 냄새, 그리고 숯불의 향이


뒤섞여 가게 전체를 덮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불과 고기의 미묘한 균형을 배우며,


요리사로서의 기술을 한 단계씩 쌓아 갔다.





당시의 다이도엔은


오사카에서도 손꼽히는 명점(名店)이었다.


주방장 이하, 3명의 요리사와 8명의 보조 직원이


정확하게 분업화된 체계로 움직였다.


숙련된 요리사는 불의 세기와 고기의 질감을


눈과 손끝만으로 구별해낼 정도였다.





손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서는 치열한 기술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점의 고기를 완벽히 굽기 위해서는


‘0.1초의 타이밍’과 ‘불의 호흡’을 읽을 줄 알아야 했다.


이 기술을 익히기까지,


나는 수없이 실패를 반복했다.





불이 너무 강하면 고기가 타버리고,


약하면 육즙이 흘러나와 맛이 사라졌다.


그 미묘한 경계선을 읽는 것은


경험과 감각의 축적 없이는 불가능했다.





다이도엔의 주방에서는


‘단 한 점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원칙이 철저했다.


한 번의 실수로 고기가 버려지면,


그것은 고기를 키운 사람,


그리고 그것을 먹기 위해 온 손님에 대한 배신이었다.





나는 그 무게를 가슴에 새기며 일했다.


그때의 주방장, 즉 나의 스승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야스미치, 고기를 다루는 손은 칼이 아니라 마음이야.”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그 뜻을 몸으로 깨달았다.


어느 손님이 불판 앞에서


“오늘 고기가 특히 부드럽네요.”라고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아, 이것이 바로 요리인의 보람이구나.’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평생 이 길을 걸어가리라.”


야키니쿠라는 세계에서,


고기를 통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내 인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다이도엔은 내게


기술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었다.


장인의 엄격함,


동료들과의 연대,


그리고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마음.


이 세 가지는 훗날 **조조엔(叙々苑)**의 경영 철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때 나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만큼은


이미 하나의 요리인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다이도엔(大同苑) 그 하나 ― 야키니쿠 요리인, 길을 결심하다





다이도엔(大同苑)은 오사카 시내에서도 손꼽히는 유명 야키니쿠점이었다.


가게는 길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간판 하나 없이도 손님들이 줄을 서는 집이었다.


명월관(明月館)에서의 수련을 마치고,


나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요리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나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의 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이 길에서 평생을 살아가리라.”


그 결의가 확고했기에,


나는 주방에서의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았다.





다이도엔의 주방은 그야말로 전투의 현장이었다.


불길은 언제나 타올랐고,


쇠판 위에서 고기가 구워질 때마다


기름이 튀어 오르고, 연기가 자욱했다.


주방 안은 늘 뜨거웠고,


그 열기 속에서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한 접시 한 접시에 혼을 담았다.





당시의 일과는 엄격했다.


가게는 오후 4시에 문을 열어


새벽 1시가 되어야 영업을 마칠 수 있었다.


낮 시간에는 고기를 손질하고,


소스를 끓이고, 야채를 다듬는 일로 가득 찼다.


밤이 되면 손님들이 몰려들었고,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의 주방장, 즉 내 스승은


야키니쿠를 예술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그는 “고기를 굽는다”는 단순한 행위를


‘맛과 미학의 조화’로 승화시킨 사람이었다.





스승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야스미치, 불을 보는 눈이 요리사의 생명이다.


불은 살아 있고, 고기도 살아 있다.


그 둘이 만나는 순간이 바로 맛의 절정이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불길처럼 내 가슴 속에 새겨졌다.





다이도엔의 주방은 규율과 열정의 세계였다.


칼을 잡는 법, 불을 조절하는 법,


고기의 결을 읽는 법,


그 모든 것이 신중하고 엄격했다.


조금이라도 각도가 어긋나면


스승의 날카로운 눈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의 꾸중은 제자의 실수를 탓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짜 요리사’로 만들기 위한 채찍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손을 베고, 화상을 입고,


땀과 기름에 절어 일했다.


하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고기의 질감과


숯불의 열기는


내게 살아 있다는 실감을 주었다.





가게에는 각양각색의 손님이 찾아왔다.


회사원, 상인, 연인, 가족 단위의 손님들.


그들의 미소와 “맛있습니다”라는 한마디가


내게는 무엇보다 큰 보람이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요리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이 깨달음이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날 이후 나는 불 앞에 설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 불은 생명을 굽는 불이다.


그러니 감사의 마음으로, 정직하게 굽자.”





다이도엔에서의 수년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혹독하면서도 가장 빛난 시기였다.


그곳에서 나는 **‘기술보다 마음’**의 가치를 배웠고,


**‘요리란 곧 인간이다’**라는 철학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품은 신념 ―


“고기를 통해 사람을 행복하게 하겠다” ―


그것이 훗날 **조조엔(叙々苑)**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될 씨앗이 되었다.



다이도엔(大同苑) 그 둘 ― 쉴 틈도 없었지만 즐거웠던 나날들





다이도엔에서 일한 지 어느덧 몇 년이 흘렀다.


주방장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내게 맡겨지는 일의 책임도 점점 커졌다.


요리사로서의 실력도 차츰 인정받게 되었고,


불 앞에서 고기를 굽는 내 손끝에는


어느덧 자신감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그 시절의 나는


‘쉬는 날’이라는 개념조차 거의 몰랐다.


일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메뉴가 개발될 때마다


마치 아이처럼 설레었고,


고기를 굽는 불길 앞에 서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이도엔의 주방은


항상 분주했다.


불의 세기를 조절하는 사람,


고기를 자르는 사람,


접시를 정리하는 사람,


모두가 숨 돌릴 틈 없이 움직였다.


그 안에서 나는


“이 열기 속에서 살아간다”는 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이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며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누구보다 먼저 출근했고,


가게 문을 닫은 뒤에도


남아서 연습을 거듭했다.





주방장과 동료들은


그런 나를 “고집스럽지만 정직한 청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가장 큰 칭찬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고기를 다루는 일에는


무엇보다도 ‘정직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 앞에서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불은 솔직한 자에게만


제 맛을 허락한다.


이것이 내가


야키니쿠와 함께 살아오며 배운 진리였다.





당시의 급여는


한 달에 약 15,000엔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결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돈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동료들과 함께 기숙사 같은 숙소에서 살며


매일같이 웃고 떠들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한잔의 맥주를 나누는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휴일은 한 달에 열흘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 열흘조차


나는 대부분 가게에 나와 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불 앞에 서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무렵,


나에게는 ‘일하는 것이 곧 삶’이었다.


주방에서의 일상이


내 청춘의 전부였다.





때로는 실수도 많았다.


소스를 태우거나, 고기를 과하게 익히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면 주방장이 조용히 다가와


“야스미치, 괜찮다. 그러나 다음엔 절대 같은 실수를 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오히려 내게 큰 격려가 되었다.





가게에는 늘 손님이 넘쳤다.


그들의 미소와


“오늘도 맛있네요”라는 말 한마디가


나의 피로를 잊게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가게를 찾은 한 손님이


내가 구운 고기를 먹고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은, 고기보다 요리사의 마음이 더 맛있네요.”


그 한마디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불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 길을, 평생 걸어가자.”





그 후로도 나는


쉼 없이 일했다.


피곤해도,


기운이 빠져도,


단 한 번도 일을 미뤄본 적이 없다.


일을 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를 이끌어 준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그저 불과 고기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주고 믿어준


주방장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나는 꺾이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함께 불 앞에 섰던 동료들을 떠올리면


가슴 한켠이 따뜻해진다.


그들은 나의 청춘이었고,


나의 스승이자,


나의 가족이었다.



쇼쿠도엔(食道園) 그 하나 ― 29세의 독립, 상업 감각이 깨어나다





다이도엔(大同苑)에서의 수련은 길고도 험난했다.


그러나 그만큼 값진 시간이기도 했다.


스승에게 배운 “불과 고기의 조화”는


이후 내 인생의 큰 자산이 되었다.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나는 마침내 다이도엔을 떠났다.


도쿄 시내, 신주쿠구(新宿区) 오쿠보(大久保)의 한 골목에서


작은 식육점 겸 야키니쿠집을 소개받았다.


그 가게의 이름은 **‘쇼쿠도엔(食道園)’**이었다.





처음에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이제부터는 스스로의 힘으로 가게를 일으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기대가 공존했다.


당시 나는


퇴직금 100만 엔과 저축금 120만 엔을 합친


약 220만 엔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이 내 전 재산이었다.





쇼쿠도엔의 규모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작았다.


점포 면적은 겨우 12평 남짓.


테이블 수는 세 개,


좌석 수는 열두 자리뿐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이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무대였다.


벽에는 직접 손으로 쓴 메뉴판을 걸고,


불판은 낡았지만 늘 정성껏 닦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하루 매출이 3천 엔을 넘기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매일 가게 앞을 청소하고,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어서 오세요, 오늘은 좋은 고기가 있습니다.”


라고 밝게 인사했다.


그렇게 조금씩,


손님들이 발길을 멈추기 시작했다.





손님이 들어오면


항상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은 칼비가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내올 때는


“맛있게 드세요.”라는 한마디를


진심을 담아 전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배운 **‘접객의 마음’**이었다.





가게 운영 초기에는


도쿄의 식육 유통 구조를 잘 몰라서


고기를 구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직접 시장으로 가서


좋은 고기를 눈으로 고르고,


납품업자에게 머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그렇게 조금씩 신뢰를 쌓으며


가게는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손님이 늘어나면서


조리뿐만 아니라 경영 감각도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갔다.





처음으로 느낀 것은,


**“요리만 잘해서는 가게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손님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맛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사람의 온기였다.





그래서 나는 늘


“어떻게 하면 손님이 즐거워할까”를 고민했다.


식탁 위에 놓인 젓가락의 위치,


고기를 굽는 타이밍,


직원의 인사말 —


모든 것이 ‘서비스’의 일부였다.





당시의 나는


매출보다 ‘손님의 미소’를 목표로 삼았다.


그 미소가 곧 내 노력의 보상이었다.





시간이 흘러,


가게는 서서히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오쿠보에 좋은 야키니쿠집이 생겼대.”


라는 소문이 번지자,


하루 매출이 1만 엔을 넘기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요리사로서의 기술과 상인의 감각은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말 한마디에 기뻐하는가.


그것을 읽는 눈과 마음이


‘요리의 완성’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다.





이 시기에 나는


비로소 내 안의 ‘상업적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요리와 서비스의 균형,


품질과 가격의 절묘한 조화,


그리고 손님과의 신뢰 관계.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가게는 진정으로 살아난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쇼쿠도엔은


나의 첫 번째 무대이자


‘조조엔(叙々苑)’의 정신이 태동한 곳이 되었다.



쇼쿠도엔(食道園) 그 둘 ― 마음속에 피어난 도전과 야심





1972년(쇼와 47년), 나이 스물아홉.


쇼쿠도엔에서 독립하여,


처음으로 나만의 가게를 경영하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처음 몇 년은 그야말로


“일에 매달리는 나날”이었다.


새벽부터 고기를 손질하고,


점심 영업을 마치면 밤 장사를 준비했다.


가게의 문을 닫고 나면,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하루의 노동이 끝나면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피로보다 만족감이 더 컸다.


“오늘도 손님들이 웃으며 돌아가셨다.”


그 한 가지 사실이


모든 고생을 잊게 해 주었다.





그러나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단순히 요리를 만드는 것과는 달랐다.


식자재 구입, 인건비, 임대료,


그 모든 것이 내 책임이었다.


하루라도 매출이 떨어지면


즉시 생활에 타격이 왔다.





가게를 지탱하기 위해


나는 쉴 틈도 없이 일했다.


가게의 수익은 점차 오르기 시작했지만,


늘 불안이 마음 한켠을 떠나지 않았다.





“만약 내일 손님이 오지 않는다면?”


“만약 재료가 오염되거나 불이 나면?”


그 모든 위험을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 외에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야키니쿠는 내 인생이었고,


고기를 굽는 일은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 무렵,


나는 ‘도쿄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새로운 열망을 품게 되었다.


당시의 쇼쿠도엔은


작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었다.





월 매출은 30만 엔을 넘기기 시작했고,


매월 일정한 저축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안정이 내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평생을 마쳐도 괜찮을까?”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이 즐거운 만큼,


그 즐거움 속에서 새로운 싸움을 갈망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더 많은 손님, 더 넓은 무대,


그리고 더 깊은 맛의 세계를 추구하고 싶었다.





당시 내 나이 서른.


체력은 한창이었고,


열정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무렵,


신주쿠(新宿)의 번화가에서


눈에 띄는 점포 하나를 보게 되었다.


건물의 2층,


넓지 않지만 밝은 유리창을 가진 공간이었다.





나는 그곳을 바라보며


문득 마음속에서 **“이곳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금이었다.


가게를 이전하려면 최소 300만 엔이 필요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며칠 밤을 고민한 끝에


나는 결심했다.


“돈은 나중 일이다.


먼저 자리를 잡자.


맛과 정성만 있다면 손님은 반드시 따라온다.”





그때의 나는


젊음과 무모함 사이에 있었다.


하지만 그 무모함이야말로


내 인생을 앞으로 이끌어 줄 원동력이었다.





이후 나는 가게 이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새 가게의 설계도를 그렸다.


잠잘 시간조차 줄어들었지만,


하루하루가 설레었다.





“더 좋은 고기,


더 나은 공간,


그리고 더 행복한 손님을 위해.”


그 마음 하나로


나는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조엔(叙々苑) 그 하나 ― 이제 롯폰기(六本木), 꿈의 대무대로





1976년, 나이 서른세 살.


나는 쇼쿠도엔(食道園)에서의 경험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도전을 결심하였다.


그동안 모은 자금은 퇴직금과 저축을 합쳐


1,000만 엔.


그리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300만 엔을 추가로 빌렸다.





그때까지의 나는


오사카에서 다이도엔(大同苑),


도쿄에서 쇼쿠도엔을 거치며


‘요리사로서의 기술’과 ‘상인으로서의 감각’을 익혀왔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늘 갈증이 있었다.


“언젠가는, 내 이름을 건 가게를 만들겠다.”


그 결심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새 가게의 이름은 **‘조조엔(叙々苑)’**으로 정했다.


‘조(叙)’는 이야기의 서두를 의미하고,


‘엔(苑)’은 정원을 뜻한다.


즉, ‘사람과 이야기, 그리고 맛이 꽃피는 정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문제는 어디에 가게를 열 것인가였다.


도쿄 안에는 수많은 상권이 있었지만,


나는 번화가이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을 원했다.


그 결과,


내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롯폰기(六本木)**였다.





당시 롯폰기는


야간 유흥가와 외국인 바, 재즈클럽이 혼재한


도쿄에서도 가장 독특한 거리였다.


해가 지면 거리마다 네온사인이 빛났고,


밤이 깊어질수록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이라면, 새로운 야키니쿠 문화를 만들 수 있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롯폰기의 땅값은 당시에도 매우 높았다.


그 때문에 주변에서는 만류의 목소리가 많았다.


“너무 위험하다.”


“손님층이 다르다.”


“야키니쿠집이 롯폰기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이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야키니쿠는


‘대중적인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나는,


그 틀을 깨고 싶었다.


“야키니쿠를 고급 음식으로 승화시키자.”


이 생각이 조조엔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나는


고기와 불, 그리고 공간의 모든 요소가


하나의 예술처럼 어우러지는 가게를 꿈꾸었다.


고기를 단순히 구워 내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그 시간을 ‘기쁨’으로 느끼게 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롯폰기 중심가 한가운데,


지상 2층 건물의 1층을 임대했다.


보증금만 해도 500만 엔에 달했다.





주변에서는 “무모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고객에게 정당한 가치를 제공한다면,


값이 높아도 반드시 손님은 온다.”


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가을,


첫 번째 조조엔이 롯폰기에 문을 열었다.


그날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간판에는 커다란 글씨로 **“叙々苑”**이라고 적었다.


처음엔 아무도 이 이름의 의미를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손님들이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조조엔의 고기는 다르다.”


그 한마디가


나의 모든 노력을 보상해 주었다.





롯폰기 조조엔은


단숨에 화제가 되었다.


비즈니스맨, 연예인, 외국인 손님들이 몰려들었고,


가게는 매일 성황을 이루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고객은, 단순히 먹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다.


감동을 느끼기 위해 온다.”





이 철학은 훗날


조조엔의 모든 가게에 이어지는 기본 정신이 되었다.



조조엔(叙々苑) 그 둘 ― 궁지를 구한 “도와주세요”





1976년 가을, 롯폰기 1호점 조조엔이 문을 연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화려한 개업의 기쁨도 잠시,


현실은 냉혹하였다.





가게를 열기 위해 준비한 자금은


보증금 500만 엔, 인테리어 비용 300만 엔,


그리고 잔여 자금 150만 엔.


합계 950만 엔이었다.


그러나 개업 후 예상보다 손님이 적었고,


초기 비용의 회수는커녕 매일 적자가 계속되었다.





당시 매출은 하루 3만 엔 남짓.


가게 임대료와 재료비, 인건비를 제하면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영업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매일 밤, 계산대의 금고가 비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가게를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밤을 새워


계산서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왔다.


만약 실패한다면,


나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동안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도와달라고 말하자.”





나는 용기를 내어


예전에 나를 아껴주었던 선배를 찾아가


이야기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 너무 힘듭니다.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 순간,


내 입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수치심보다는,


그동안 혼자 버텨온 나날의 고단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선배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야스미치,


가게를 살리고 싶다면


마음을 다해 고객에게 전해라.


‘맛있다’는 그 한마디를 들을 때까지 포기하지 마라.”





그리고 그는 나를 위해


소액의 자금을 빌려주었다.


그 돈은


가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너무 적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돈보다도 그의 한마디가 더 큰 힘이 되었다.





“도와주세요.”


그 말을 입 밖에 꺼낸 것은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매일 새벽까지 가게를 청소하고,


고기를 썰고, 불을 다듬었다.


손님이 없더라도


가게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언젠가 반드시 이 불이 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한 손님이 또 다른 손님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조조엔이라는 가게, 고기가 아주 좋더라.”


그 입소문이 번지면서


조조엔의 문에는 다시 활기가 찾아왔다.





3개월 후,


하루 매출은 10만 엔을 넘기기 시작했다.


가게의 불빛이 거리를 밝히고,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인생은 혼자 버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사람을 구한다.


도움을 청하는 용기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여는 첫걸음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의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결코 외면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의 경험이


조조엔의 철학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질 때,


진정한 맛이 탄생한다.”



조조엔(叙々苑) 그 셋 ― 업계의 상식을 넘어선 창의적 발상





1978년, 롯폰기 조조엔이 개업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당시의 야키니쿠 업계는


남성 중심의 거칠고 시끄러운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고기를 구워내는 불길과 연기,


소리 높여 주문을 외치는 목소리,


고기 굽는 냄새와 숯불의 열기.


그 모든 것이


‘야키니쿠집은 남자들의 공간’이라는 인식을 굳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야키니쿠를 남자만의 음식으로 둘 필요는 없다.


여성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 무렵의 롯폰기는


젊은 여성과 커플들이 즐겨 찾는 거리로 변모하고 있었다.


나는 시대의 변화를 직감했다.


야키니쿠라는 음식이


거칠고 시끄러운 이미지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식문화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여성이 들어오고 싶은 야키니쿠집’**을 목표로


가게의 인테리어부터 서비스 방식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설계했다.





먼저, 조명의 개념부터 바꾸었다.


당시 대부분의 야키니쿠집은


흰색 형광등 아래에서 고기를 굽는 단조로운 구조였다.


그러나 나는


그 빛을 ‘따뜻한 조명’으로 바꾸었다.


불빛은 은은한 황금색으로 조절하고,


벽면에는 간접조명을 설치했다.





천장은 검은 목재로 마감하고,


바닥은 흑갈색 타일로 덮었다.


그 위에 유리 테이블과 은색 숯불 화로를 배치했다.


불빛이 고기 표면에 반사될 때


마치 예술품처럼 보이도록 계산한 조명이었다.





또한, 연기와 냄새를 줄이기 위해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천장 환기 시스템(상부 흡입형)’**을 도입했다.


이 설비 덕분에,


손님이 식사 후에도 옷에 냄새가 배지 않았다.


특히 여성 손님들에게 큰 호평을 얻었다.





가게의 전체 분위기는


‘모던하고 세련된 레스토랑’을 지향했다.


벽면에는 거울을 설치하여


공간이 넓어 보이도록 했고,


테이블 사이에는 칸막이를 두어


프라이버시를 확보했다.





서비스에도 혁신을 가했다.


당시 대부분의 야키니쿠집에서는


점원이 주문을 받을 때 “몇 인분 드릴까요?”라는 식의


무뚝뚝한 응대가 일반적이었다.


나는 그것을 바꾸고 싶었다.





점원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고객에게 말을 걸 때는


마치 친구에게 대하듯,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하세요.”


그리고 주문을 받을 때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드시 덧붙이도록 했다.





직원의 복장 또한


기존의 업계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남성 점원은 흰 셔츠에 검은 베스트,


여성 점원은 검은 원피스에 흰 앞치마를 착용하게 했다.


이 디자인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또한 나는


고객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서비스 매뉴얼을 세세히 만들었다.





테이블 세팅, 물을 내는 타이밍,


숯불을 교체하는 순서,


그리고 고객이 일어날 때의 인사까지.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공연(パフォーマンス)’으로 생각했다.





야키니쿠는 단순히 음식을 파는 업이 아니라,


손님에게 감동을 제공하는 예술이라 나는 믿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처음엔 업계 사람들로부터 “쓸데없는 사치”라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고객이 기분 좋게 식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서비스다.”





결국,


조조엔은 그 세련된 분위기와 정중한 서비스로


여성 고객과 가족 단위 손님들의 지지를 얻었다.





밤이 되면,


불빛이 반짝이는 조조엔의 유리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이 비쳤다.





“야키니쿠는 남자의 음식이다.”


그 상식을 무너뜨린 순간이었다.



조조엔(叙々苑) 그 넷 ―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여성 고객을 사로잡다





1979년 무렵,


조조엔 롯폰기점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님도 꾸준히 늘고,


매출도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점에서


이미 다음 목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움(綺麗さ)’의 추구였다.


야키니쿠는 본래


고기를 굽는 연기와 기름,


숯불의 향이 섞인 남성적인 음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야키니쿠야말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음식’이라 믿고 있었다.





고기의 한 점 한 점에는


붉은빛의 생명감이 담겨 있다.


그것을 어떻게 다듬고,


어떤 그릇에 담고,


어떤 조명 아래에서 내느냐에 따라


그 맛과 감동은 전혀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고기를 “보여주는 예술”**로 만들고자 했다.


당시 대부분의 가게는


고기를 두껍게 썰어 무겁게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얇게 썬 고기를 한 장씩 정갈하게 접시에 담아,


마치 화병 속 꽃잎처럼 배열했다.





붉은 고기의 색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순간,


그 안에는 생명과 미(美)가 공존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그 광경을 보며


“이건 마치 고기 예술이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거기서 확신을 얻었다.


“야키니쿠는 더 이상 ‘먹는 행위’가 아니라,


감각으로 즐기는 예술이다.”





그 무렵 나는


고객층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었다.


남성 손님뿐 아니라,


여성 손님이 눈에 띄게 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한 가지 결심을 내렸다.


“여성 고객이 더 편안히 찾을 수 있는 가게를 만들자.”


이를 위해 나는


인테리어와 메뉴, 그리고 서비스까지


모두 새롭게 구성했다.





먼저 기름기 없는 고기를 개발했다.


기름이 많으면 무겁고,


먹고 난 뒤에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기의 절단 두께와 지방 비율을 조정하여


한 입 크기로 부드럽게 녹는 식감을 완성했다.





또한,


불판의 열기와 조명의 색을 조화시켜


고기의 붉은색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도록 연구했다.


고기가 구워질 때 나는 연기마저


조조엔만의 “향기”로 느껴지게 하고 싶었다.





다음으로는 디저트의 혁신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야키니쿠집에는


식후 디저트라는 개념이 없었다.


손님은 고기를 다 먹으면 그대로 계산하고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식사의 여운을 남기려면, 마무리의 한 입이 필요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식후 디저트’**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 무렵, 나는


도쿄 긴자의 한 카페에서


작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 위에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부으면 어떨까?”


이 발상에서 탄생한 것이


지금도 조조엔의 대표 디저트 중 하나인 **‘아포가토(Affogato)’**였다.





식사 후,


뜨거운 커피 향과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조화가


손님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마지막 한 입까지 아름답게.”


이것이 내가 생각한 **조조엔의 미학(美学)**이었다.





그 결과,


조조엔은 ‘여성이 가고 싶은 야키니쿠집’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커플이나 부부,


그리고 가족 단위 손님들이 크게 늘었다.





야키니쿠는 더 이상


연기 자욱한 남성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이제


‘불빛과 향기, 그리고 사람의 미소가 어우러진 무대’가 되어 있었다.





조조엔의 새로운 시도는


곧 업계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성 고객을 위한 세련된 연출,


디저트의 도입,


그리고 “맛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철학.





이 모든 것은,


기존의 상식을 넘어선


**‘창조적 혁신’**이었다.




조조엔(叙々苑) 그 다섯 ― ‘탄시오(タン塩)’와 ‘상급 갈비(上カルビ)’의 탄생





1980년대 초, 조조엔 롯폰기점은


이미 손님들 사이에서 “고급 야키니쿠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여성 고객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이는 업계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신호였다.





당시의 야키니쿠는 여전히 ‘남성의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기름지고, 무겁고, 맥주와 함께 먹는 거친 이미지였다.


그러나 여성 고객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취향을 반영한 새로운 메뉴 개발이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여성을 위한 메뉴’를 고안하기 시작했다.


“기름기가 적으면서도 풍미가 깊은 고기.”


“식후에도 느끼하지 않고 개운한 맛.”


“술과 함께가 아니라, 식사로 즐길 수 있는 요리.”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메뉴가 필요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탄(舌, 소혀)’**이었다.


탄은 원래 일부 마니아층에게만 알려진 부위였지만,


그 식감과 향은 매우 섬세하고 우아했다.





그러나 문제는 조리법이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야키니쿠집은


탄을 간장 양념에 재워 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결과,


고유의 향이 사라지고 간장 맛만 남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간장을 쓰지 않고,


소금만으로 탄의 본래 맛을 살려보자.”





처음에는 반대가 많았다.


“소금만으로는 밋밋하다.”


“손님이 싱겁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십 번의 실험 끝에


소금의 양과 굵기를 조정해가며


마침내 완벽한 밸런스를 찾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탄 위에 레몬즙을 가볍게 뿌려보았다.


그 순간, 향이 폭발하듯 퍼졌다.





직접 먹어보니


입안 가득 산뜻한 향이 퍼지며,


탄의 고소한 맛이 살아났다.


소금의 감칠맛과 레몬의 산미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확신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맛이다.”


그렇게 탄시오(소금구이 소혀)는 탄생했다.





이 메뉴는 곧 조조엔의 대표 요리가 되었고,


이후 전국의 야키니쿠집으로 퍼져나갔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메뉴가 되었지만,


그 시작은 바로 롯폰기 조조엔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또 하나의 혁신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바로 **‘상급 갈비(上カルビ)’**의 탄생이다.





당시 갈비는 지방이 많은 부위로,


‘무겁고 느끼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고정관념을 깨고자 했다.


지방이 많더라도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는 질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여성 고객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방의 분포가 섬세한 고기를 선별하고,


불 조절을 통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구워냈다.


그 맛은 이전의 갈비와는 완전히 달랐다.





입안에서 녹듯이 사라지는 그 감촉.


‘무겁다’가 아니라, ‘풍부하다’로 느껴지는 맛.


이것이 바로 조조엔이 만들어낸 **‘상급 갈비(上カルビ)’**였다.





이 두 가지,


**‘탄시오(塩タン)’와 ‘상급 갈비(上カルビ)’**는


조조엔을 상징하는 메뉴가 되었으며,


일본 야키니쿠 문화의 기준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도 많은 손님들이


조조엔의 문을 열며 이렇게 말한다.


“탄시오와 상급 갈비는 역시 조조엔이지.”


그 말은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보람의 증거이다.



조조엔(叙々苑) 그 여섯 ― 여성 고객의 만족은 전체의 만족





1980년대 초, 조조엔은 이미


‘고급 야키니쿠’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탄탄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여성 고객의 만족이야말로, 전체 고객의 만족을 이끈다.”


는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야키니쿠집은


남성 중심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야키니쿠는 ‘남자가 구워서 여자가 먹는 음식’이라는


편견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여성 직원이 주방에서 일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여성이 불 앞에 서서,


당당히 고기를 굽는 모습이 어울리는 시대가 온다.”


그래서 조조엔에서는


여성 직원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서비스 전면에 배치하였다.





그들의 미소와 섬세한 응대는


고객에게 새로운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조조엔의 분위기는 한층 부드럽고 세련되게 바뀌었다.





당시 손님들의 대부분은 남성이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은 분위기가 다르다.”


“가족이나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도 편하다.”





이 말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던 **‘조조엔의 본질’**이었다.


즉, 여성이 편한 공간 = 남성에게도 만족스러운 공간이라는 공식이다.





여성 고객이 느끼는 ‘청결함’, ‘안정감’, ‘편안함’은


모든 손님에게 동일하게 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조조엔이 다른 야키니쿠집과 구별되는 핵심 철학이었다.





당시 내 목표는 단순했다.


“여성 고객이 먼저 ‘이 집, 예쁘다’라고 느끼게 하자.”


그 감정이 생기면,


그녀는 다음에 반드시


남편이나 연인, 친구를 데리고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이 전략은 정확했다.


여성 고객이 늘어나자


그들의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늘어났다.


손님층은 폭넓어졌고,


매출도 꾸준히 상승했다.





조조엔의 여성 직원들은


단순히 ‘서빙’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고객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 분위기를 밝히는 조조엔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고기를 나르는 사람이 아니라,


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지금도 조조엔의 직원 교육의 기본이 되고 있다.





야키니쿠 업계에서는 흔히


“고기만 좋으면 된다.”


“서비스는 부차적이다.”


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에 단호히 반대했다.





진정한 서비스란,


단순한 접대가 아니라,


손님이 ‘다시 오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힘이라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조엔의 여성 고객 전략은


단순한 마케팅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예를 들어,


조조엔의 디저트 메뉴 **‘조조엔 샐러드(叙々苑サラダ)’**는


여성 고객의 피드백을 반영하여 개발된 것이다.


상큼한 드레싱과 색감이 아름다운 구성은


‘고기 이후의 상쾌한 여운’을 완성시켰다.





또한,


여성 고객이 촛불처럼 빛나는 유리잔에 담긴 음료를 들고


미소 짓는 그 한 장면이야말로


조조엔의 상징적인 풍경이 되었다.





결국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여성 고객의 만족은, 가게 전체의 품격을 결정한다.”





오늘날까지 조조엔의 성장 배경에는


항상 여성 고객의 존재가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조조엔의 문화를 함께 만들어온 주체였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항상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


내가 ‘요리사’이자 ‘경영자’로 살아가는 이유였다.



조조엔(叙々苑) 그 일곱 ― 롯폰기에서의 대성황, 폭발적 성장





1976년 가을,


도쿄 롯폰기에 문을 연 조조엔은


개업 초기의 불안과 고난을 딛고,


차츰 안정세를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개업 당시 조조엔은


좌석 수 30석 남짓,


넓지 않은 소규모 매장이었다.


하지만


‘세련된 인테리어’, ‘청결한 분위기’,


그리고 ‘정성스러운 서비스’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그 무렵 롯폰기는


도쿄에서도 밤 문화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었다.


해가 지면 불빛이 넘쳐났고,


새벽이 되어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조조엔은 ‘밤의 롯폰기를 대표하는 야키니쿠집’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1977년,


개업 1년 만에 월 매출이 300만 엔을 돌파했다.


이듬해에는 500만 엔을 넘겼고,


1979년에는 1,200만 엔을 달성했다.


그리고 1981년,


매출은 마침내 1,700만 엔을 기록하였다.





당시 한 점포의 하루 매출이


50만 엔을 넘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롯폰기 전체의 음식점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과였다.





“조조엔에 가면 실망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롯폰기에서 회자되는 하나의 ‘보증어’가 되었다.





그때의 나는


단순히 매출의 상승보다


손님들이 보여주는 신뢰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손님들은


단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조조엔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꿈꾸던 **‘야키니쿠의 새로운 문화’**였다.





조조엔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심야 영업이었다.


대부분의 식당이 자정에 문을 닫던 시절,


조조엔은 새벽 4시까지 영업했다.


이 시간대에는


인근 바와 클럽의 손님들이 몰려왔다.





그 결과,


심야 매출이 하루 총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영 전략은


롯폰기 상권의 특성을 완벽히 읽어낸 결정이었다.





당시 가게는


한밤중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카운터석에 앉은 외국인 손님,


테이블을 가득 채운 연예인과 예술가들.


조조엔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문화와 사람의 교차점’이 되어 있었다.





매출이 늘어나면서


従業員(종업원)의 수도 늘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규모의 확장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점에서


“조조엔의 철학을 잃지 말자.”


는 결의를 다시 다졌다.





고객의 만족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직함’과 ‘정성’이었다.





당시 모든 계산은 현금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직접 회계 장부를 쓰며


하루의 매출을 눈으로 확인했다.





장부를 덮을 때마다


하루하루의 숫자 뒤에 있는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미소가


내게는 무엇보다 큰 보상이었다.





하지만,


성공의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과제가 있었다.


손님이 몰리면


그만큼 종업원의 피로도 커졌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영업으로


휴식 시간이 줄었고,


일부 직원은 과로로 그만두기도 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가게의 성장은 곧 사람의 성장 위에 서 있다.”





그래서 근무 시간을 조정하고,


직원들의 식사와 휴식 공간을 새로 마련했다.


또한


능력 있는 직원을 점장으로 승진시켜


책임감과 자부심을 부여했다.





이 변화는 큰 효과를 냈다.


직원들이 웃으면


그 미소가 그대로 손님에게 전달되었다.


결국,


직원의 행복이 곧 고객의 만족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조조엔이 단순한 ‘성공’이 아닌


‘신뢰받는 가게’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당시 갈비 한 접시의 가격은 1,900엔 정도였다.


그러나 손님들은


그 가격을 전혀 비싸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가격보다 값어치가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 숫자 속에는,


정직한 노력의 결과가 담겨 있다.”



조조엔(叙々苑) 그 여덟 ― 끝없이 고민했던 무연 로스터





1983년,


조조엔 창립 7주년을 맞이하던 해였다.


그 무렵 나는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야키니쿠 업계에서는


당시 “무연 로스터(無煙ロースター)”의 도입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연기 없는 야키니쿠’라는 개념은


그때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엔 망설였다.


조조엔의 상징이자 매력 중 하나는


고기를 굽는 향기와 숯불의 열기였다.


그것을 없앤다면,


조조엔의 본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또한,


당시 무연 로스터는 막 도입되던 단계였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쌌다.


한 대당 수백만 엔에 달하는 장비를


점포 전체에 설치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다.





게다가,


‘연기 없는 야키니쿠’라는 개념이


정말 손님들에게 받아들여질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혹시 “불맛이 사라졌다”거나


“고기가 예전보다 밋밋하다”는 불만이 나올지도 몰랐다.





이처럼 수많은 고민 속에서


나는 한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오사카의 한 유명 야키니쿠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무연 로스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며 살펴보니,


연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손님들은 쾌적하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고기의 맛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연기를 줄이는 것이


맛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결심했다.


“조조엔에도 무연 로스터를 도입하자.”





나는 즉시 도쿄의 한 주방 설비 회사를 찾아가


무연 로스터 도입을 의뢰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도쿄의 기술자들은


“로스터를 설치하면


화력이 약해져 고기 굽는 맛이 떨어진다.”


며 도입을 반대했다.





나는 직접 실험을 거듭했다.


열의 세기, 공기의 흐름,


연기의 배출 각도까지 하나하나 조정하며


최적의 조건을 찾았다.





수많은 실패 끝에


드디어 완벽한 결과를 얻었다.


연기는 거의 나지 않았지만,


숯불의 열기와 고기의 향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이 새로운 설비를 설치한 첫 매장은


롯폰기 2층 점포였다.


처음에는


손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불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굽는 거지?”


그러나 막상 식사를 시작하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기가 안 나서 쾌적하네요.”


“옷에 냄새도 안 배어요.”





이 반응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것이 앞으로의 야키니쿠의 형태다.”





무연 로스터의 도입은


결국 대성공을 거두었다.


손님은 더 늘었고,


여성 고객과 가족 단위 손님이 더욱 많아졌다.





게다가,


주방 환경이 쾌적해지면서


종업원의 피로도 줄어들었다.


효율은 높아지고,


서비스의 질도 함께 향상되었다.





결과적으로


무연 로스터는 조조엔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일본 전국의 야키니쿠점들이


앞다투어 이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연기 없는 야키니쿠’의 개념이


처음 탄생한 곳이 바로 이 조조엔이었다.



조조엔(叙々苑) 그 아홉 ― 니시아자부(西麻布)에 ‘야키니쿠 빌딩’을 완공하다





1980년대 후반,


롯폰기(六本木)의 조조엔은 이미


‘고급 야키니쿠’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점포는 늘 손님들로 가득 찼고,


주말이면 예약 없이 들어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새로운 고민에 직면하고 있었다.


고객층이 늘어나면서


기존 점포의 공간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또한,


웨이팅 고객이 많아지면서


서비스의 질이 저하될 위험이 생겼다.





그 무렵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새로운 형태의 야키니쿠 공간을 만들 때다.”





내가 그린 구상은


단순한 식당이 아닌,


**‘야키니쿠를 중심으로 한 종합 문화 공간’**이었다.


식사뿐 아니라


손님이 머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


즉 ‘맛과 시간의 공존’을 실현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나는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롯폰기 인근,


조용하면서도 품격 있는 지역이 이상적이었다.





1989년,


나는 마침내 도쿄 미나토구 니시아자부(港区西麻布)의 외원(外苑) 거리에 위치한


한 필지의 토지를 발견했다.


면적은 22평,


가격은 약 2억 2천만 엔.





당시의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거액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번에 결단했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무대다.”





곧바로 부지를 매입하고


6층짜리 건물 신축 공사를 계획했다.


연면적 220평,


30개의 좌석 공간,


1층부터 5층까지는 조조엔의 레스토랑,


6층은 프라이빗 다이닝룸으로 설계했다.





총 투자금은 6억 엔에 달했다.


그중 3억 엔은 은행 융자로 충당해야 했다.





당시 조조엔의 본점은


월 매출 1,000만 엔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건설비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이런 건물은 못 짓는다.”





공사는 약 1년 반이 걸렸다.


1989년,


니시아자부 조조엔 빌딩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유리 외벽으로 감싸인 세련된 외관은


당시 야키니쿠 업계에서는 보기 드문 디자인이었다.


밤이 되면


내부의 조명이 거리를 밝히며


니시아자부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도시 속의 휴식”이라는 콘셉트였다.





손님이 식사뿐 아니라


한숨 돌리며 쉴 수 있는 공간.


음식이 아닌 **‘시간을 파는 레스토랑’**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각 층마다


분위기가 다른 인테리어를 도입했다.


1층은 모던한 카운터석,


2층은 가족 단위의 좌석,


3층은 커플을 위한 조용한 공간,


4층과 5층은 단체 손님을 위한 대형 홀로 설계했다.





특히 6층 프라이빗룸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정장 차림의 비즈니스맨과 연예인들이


도쿄의 야경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는 고급 공간으로,


곧 ‘비즈니스 미팅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후 니시아자부점은


조조엔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야키니쿠는 더 이상 대중식이 아니다.’


라는 나의 철학이


비로소 형태를 갖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내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기도 했다.





매달 은행 상환액만 360만 엔,


거기에 재료비, 인건비, 세금을 더하면


매출의 절반 이상이 지출로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건물은 단순한 점포가 아니라


내 인생의 ‘열정의 결정체’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곳에서


야키니쿠의 예술을 완성시키겠다.”


그 다짐 하나로


나는 매일 새벽까지 현장을 지켰다.





그리고 결국,


니시아자부 조조엔 빌딩은


일본 외식산업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평가받았다.


고급 식문화와 공간 디자인을 결합한


**‘야키니쿠의 예술관(藝術館)’**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낸 것이다.



조조엔(叙々苑) 그 열 ― 버블 붕괴와 과잉 부채의 전환점





1994년, 일본 경제는 버블 붕괴의 여파로 깊은 불황에 빠져 있었다.


거리의 활기도 사라지고,


한때 붐을 이루던 고급 소비문화는 순식간에 꺼져갔다.





조조엔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객의 발길이 줄고,


매출이 감소하면서


이익 구조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니시아자부 빌딩 신축에 투입된 거액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건물 건축비와 부지 매입비를 합쳐


총 6억 엔이 넘는 자금이었다.





경기가 악화되면서


은행의 대출 조건도 점점 까다로워졌다.


금리는 높아졌고,


대출 연장조차 쉽지 않았다.





매달 갚아야 하는 원리금은 360만 엔.


매출이 줄어든 상황에서


그 부담은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나는 매일같이 계산서를 붙잡고


밤늦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라면 버티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직원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들이 불안해하면


고객에게도 그 공기가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괜찮다.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는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매출은 점점 줄었고,


은행의 독촉은 갈수록 거세졌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렸다.


은행을 직접 찾아가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정기 상환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절대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갚겠습니다.”





은행 담당자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아라이 씨, 도망치지 않는다는 말, 믿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경영자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책임이란, 이익이 있을 때가 아니라


손실을 마주할 때 비로소 증명된다.”





은행은 상환 유예를 허락했다.


2년간 이자만 납부하는 조건이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온 힘을 다해 가게를 지켰다.





매출이 줄어도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만족만큼은 결코 줄이지 않았다.


불황일수록


‘맛과 서비스의 정직함’이


가장 큰 무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불황기에 오히려


**‘야키니쿠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고객이 돈을 쓰는 이유는,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분 좋은 시간을 사기 위해서다.”


이 단순한 진리가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그 시기 나는


직원들과 함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무연 로스터(無煙ロースター)’의 전면 개편이었다.





기존 모델은 유지비가 높고


공간 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 투자가 아니라,


‘고객에게 더 깨끗한 식사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결국,


이 변화는 예상치 못한 성공을 가져왔다.





손님들은 “공기가 맑아졌다”고 칭찬했고,


다시금 여성 고객의 비중이 늘어났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위기란, 새로운 기회를 낳는 토양이다.”





버블 붕괴로 무너졌던 경제 속에서


조조엔은 오히려


‘신뢰’라는 자산을 쌓아가고 있었다.





매출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고,


부채도 차근차근 갚아 나갔다.





몇 년 후,


나는 마침내 은행에 마지막 상환을 마쳤다.


그날, 담당자는 웃으며 말했다.


“아라이 씨, 정말로 약속을 지키셨네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깊이 머리를 숙였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나는, 단순한 요리사가 아니라


진정한 경영자가 되었다.”





이후 조조엔은


불황을 이겨낸 기업으로 평가받으며


새로운 신뢰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조조엔(叙々苑) 그 열하나 ― ‘유겐테이(游玄亭)’가 고급 야키니쿠를 개척하다





1994년,


나는 조조엔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최고급 야키니쿠 레스토랑’을 개점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의 침체기에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시기를 도전의 기회로 보았다.


경기가 나쁘다고 해서


사람들의 미식에 대한 욕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맛의 가치를 증명할 때다.”


이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새로운 매장의 이름은 **‘유겐테이(游玄亭)’**라 지었다.


‘유(游)’는 자유로움과 여유를,


‘현(玄)’은 깊은 맛과 품격을 상징한다.





즉,


‘깊이 있는 맛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즐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유겐테이는


기존 조조엔보다 한층 고급화된 콘셉트로,


‘궁극의 야키니쿠’를 목표로 하였다.





점포 설계는


조조엔 빌딩을 함께 설계했던


건축가 오타 타이치로(太田泰一郎) 씨에게 다시 의뢰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맛집’이 아니라


‘예술 공간’을 만듭시다.”





그래서 우리는


공간 설계부터 조명, 식기, 좌석 간격까지


모든 요소를 **“음식의 품격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구조”**로 만들었다.





유겐테이의 좌석은 단 36석이었다.


한 사람당 사용하는 면적은 1.2평.


이는 일반적인 식당의 두 배였다.





좌석을 줄이는 대신,


손님이 느끼는 여유와 프라이버시를 극대화했다.





또한,


고기의 품질은 물론,


그릇, 젓가락, 심지어 냅킨 하나까지도


직접 선택하여 통일성을 갖추었다.





음악은 잔잔한 재즈,


조명은 따뜻한 황금빛.


손님이 앉는 순간부터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리도록 연출했다.





요리 구성은 야키니쿠 코스 요리였다.


단품 메뉴가 아닌,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하나의 스토리처럼 이어지는 코스였다.





그 중심에는


조조엔에서 발전한 ‘탄시오(塩タン)’와 ‘상급 갈비(上カルビ)’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단순히 내는 것이 아니라,


‘숙성’과 ‘온도 조절’을 더해


맛의 깊이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야키니쿠에 코스라니, 있을 수 없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확신했다.


“언젠가는, 이 시도가 일본의 미식문화를 바꿀 것이다.”





1994년 9월,


유겐테이가 롯폰기에 문을 열었다.


개점 첫날,


예약은 이미 한 달 전부터 꽉 차 있었다.





개점 이후,


정치인, 문화인, 배우, 스포츠 선수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곳은 단순한 야키니쿠집이 아니다.


하나의 예술이다.”





이 평가는


유겐테이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TV와 잡지에서도


“고급 야키니쿠의 대명사”로 소개되었다.





유겐테이는


조조엔의 또 다른 얼굴로 자리 잡았다.


조조엔이 ‘대중의 고급’을 대표한다면,


유겐테이는 ‘정점의 미학’을 상징했다.





매장은 손님들로 가득 찼고,


매출은 꾸준히 상승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이제 됐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정한 고급이란,


화려함이 아니라 겸손함 속에 있다.”


이것이 내가 유겐테이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그래서 유겐테이의 서비스는


언제나 절제되어 있었다.


과한 친절 대신,


조용하고 깊은 배려를 담았다.





그 철학은


지금도 모든 조조엔 직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조조엔(叙々苑) 그 열둘 ― 요지(一等地)에서 단련된 조조엔의 저력





2000년 이후,


조조엔은 서서히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롯폰기와 니시아자부, 긴자, 신주쿠 등


일본의 대표적인 **‘요지(一等地)’**에 매장을 연이어 출점하면서


브랜드의 존재감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고급 상권은 치열한 경쟁의 무대이기도 했다.


주변에는


세계적 외식 브랜드와 일류 호텔 레스토랑들이 즐비했고,


한 끼 식사의 단가 역시 높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조조엔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맛 이상의 **‘가치(価値)’**를 창조해야 했다.





나는 그때부터


‘맛의 품격’과 ‘시간의 품격’을 함께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야키니쿠 문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식재료의 원산지를 철저히 관리하고


소고기와 해산물, 채소, 쌀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생산자와 직접 계약을 맺었다.





특히 ‘와규(和牛)’는


일본 각지의 최상급 개체를 직접 선별하였다.


그 품질은


도쿄의 고급 레스토랑에 납품되는 수준과 맞먹었다.





이러한 노력이 쌓이자


손님들은 “조조엔의 고기는 믿을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조조엔의 신뢰는


단순히 ‘브랜드 이미지’가 아니라,


수십 년간의 진정성과 검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브랜드가 안정기에 들어선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브랜드 다각화’였다.





대표적으로


고급 라인인 ‘유겐테이(游玄亭)’,


중간 가격대의 ‘조조엔 본점’,


그리고 합리적인 캐주얼 라인의 **‘죠죠엔 익스프레스(叙々苑 EXPRESS)’**가 그것이다.





이는 단순한 체인 확장이 아니라,


고객의 다양한 니즈에 대응하는


조조엔의 **‘가치층(価値層)’**을 재정립하는 작업이었다.





예를 들어,


익스프레스에서는 도시락과 테이크아웃 메뉴를 강화했고,


한편 유겐테이는 와인 셀러와 개인룸을 완비해


비즈니스와 프라이빗 다이닝을 모두 아우르는 공간으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각 점포의 콘셉트를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조조엔의 철학’만큼은 한결같이 유지했다.





즉,


고객이 어느 점포에 가든


“이건 분명 조조엔이다.”라는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 철저한 브랜드 일관성은


조조엔의 가장 큰 강점이자 생명력이었다.





나는 흔히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요지(一等地)에서 배운 건,


단순히 매출이 아니라 진정한 경쟁력이다.”





고급 상권에서의 경험은


언제나 높은 임대료와 혹독한 평가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만큼


**‘고객의 기대에 응하는 힘’**을 단련시켜 준다.





이것이 바로


조조엔이 수십 년 동안 이어온 **‘요지 경영의 철학’**이다.





“힘든 자리일수록 성장의 자리다.”


이것은 내 인생이 가르쳐 준 진리였다.





지금 조조엔의 여러 점포가


각자의 개성과 브랜드 가치를 발휘하며 존재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모두


‘요지에서의 단련’에 있다.





이제 후배 경영자들에게 바란다.


“조조엔의 이름을 자부심으로 여기되,


항상 초심을 잃지 말라.”





그리고 언젠가,


조조엔이 창립 100주년을 맞이할 때,


그 역사와 철학이


더 넓은 세대에게 계승되기를 소망한다.



협회기(協会期) 그 하나 ― 전국야키니쿠협회 회장에 취임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조조엔은 순조로운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몇 차례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안정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 나이 예순을 넘기면서,


나는 점점 ‘개인적인 성공’보다


‘업계 전체의 발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무렵,


전국야키니쿠협회(全国焼肉協会)로부터


회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선뜻 수락할 수 없었다.


매일 가게 경영에 바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과연 내가 그런 중책을 맡을 자격이 있을까” 하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나 개인의 일만이 아니라,


야키니쿠 업계 전체를 위해 봉사해야 할 때다.”





그 결심으로


2003년, 나는 전국야키니쿠협회의 제5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당시,


도쿄의 야키니쿠점은 약 2,000여 곳에 달했다.


업계는 호황이었지만,


동시에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었다.


또한,


각 지방의 소규모 점포들은


인력난과 원가 상승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나는 회장으로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업계의 기술력 향상”과 “식재료의 안전성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특히 2001년의 광우병(BSE) 파동은


야키니쿠 업계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소고기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들었고,


소규모 점포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나는 그때부터


“야키니쿠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회장으로서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협회의 모든 회원들과 함께


전국의 산지를 돌아다니며


식육의 유통 경로를 직접 확인하고,


안전성을 검증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고기 굽기의 표준화’와 ‘위생 관리 매뉴얼화’ 등을 추진하여


모든 점포가 일정 수준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은


소비자들에게 큰 신뢰를 주었다.


언론에서도


“야키니쿠 업계의 자정 노력”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기쁘게 한 것은


현장에서 만난 점포 주인들의 말이었다.





“아라이 회장 덕분에 다시 손님이 돌아왔습니다.”


“고객이 고기를 믿고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보람을 느꼈다.





나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야키니쿠는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생산자와 요리사, 그리고 고객의 신뢰가 이어져야 완성되는 문화입니다.”





이 신념 아래,


협회에서는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젊은 요리사 육성 프로젝트’,


‘위생 기술 세미나’,


‘도축 및 가공 현장 견학 프로그램’ 등을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이런 활동들은


업계 전반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회원 점포들 간의 정보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정기적인 간담회와 지역 모임을 조직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항상 강조했다.


“우리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업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 말은


많은 동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들은 협회를 통해


서로의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국야키니쿠협회는


이전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활기찬 단체로 성장했다.





회장으로서의 나의 역할은


이러한 기반을 다지는 데 있었다.





물론,


그 길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정책적 협의나 행정 절차,


각종 조정 회의에 참여해야 했고,


때로는 비판도 감수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조조엔을 만들던 초심.”


그 마음만 잃지 않으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다.





임기 중,


나는 각지의 회원 점포를 직접 찾아다녔다.


규모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든 가게를 똑같이 존중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만난 사람들 중에는


지금도 내게 조언을 보내주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의 열정과 진심이 있었기에,


나는 회장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2005년,


임기를 마치며 회장직을 후임에게 물려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야키니쿠의 역사에는,


수많은 사람의 땀과 정성이 스며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함께 해준 동료들과,


언제나 나를 지지해준 업계 사람들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었다.



협회기(協会期) 그 둘 ― 발전을 위해 조리 지도를 다하다





2003년,


나는 전국야키니쿠협회 회장으로서


전국의 회원 점포들을 방문하며


조리 지도와 기술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야키니쿠 업계는 그때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쇠고기 수입 자유화 이후,


외국산 고기의 유입이 급격히 늘었고,


이에 따라 업계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값싼 수입육이 시장을 점령하면서


국산 소고기의 존재감이 위축되었고,


“야키니쿠는 저렴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평생을 바쳐 쌓아온 ‘야키니쿠의 품격’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부터 생각했다.


“야키니쿠의 진정한 가치는


가격이 아니라, 요리인의 기술에 있다.”





그래서 나는


각지의 점포를 돌며


직접 조리 시연과 지도를 시작했다.





쇠고기를 자르는 법,


불의 온도 조절,


양념의 숙성 시간,


불판의 관리,


접객의 자세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몸소 보여주었다.





“고기는 손끝으로 자르고, 마음으로 구워라.”


이 말은 그때부터 내가 늘 강조하던 원칙이었다.





야키니쿠는 단순히 고기를 굽는 행위가 아니다.


그 안에는


생산자와 요리인, 그리고 고객을 잇는 **‘신뢰의 사슬’**이 존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부 점포에서는 여전히


이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싸고 빨리 나오는 음식’으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 점포가 늘어날수록


야키니쿠 전체의 이미지가 손상되고 있었다.





나는 이런 현실이 너무도 슬펐다.





그래서 협회에서는


‘조리 기술 인증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요리인들의 숙련도를 공식적으로 평가하고,


기준 이상의 기술을 갖춘 사람에게


‘야키니쿠 장인(職人)’의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업계의 기술 수준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각 지방의 조합과 연계하여


위생 관리와 안전 교육을 강화했다.


냉장·냉동 유통,


조리 장비의 세척,


소독 절차 등을 세세하게 매뉴얼화했다.





그 결과,


전국의 야키니쿠점들은 점차 위생적이고 쾌적한 환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기술과 위생은 기본일 뿐,


진정한 발전은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조리 강연을 할 때마다


항상 이렇게 말했다.


“야키니쿠의 ‘맛있음’은 불 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그 맛은 요리사의 성실한 마음에서 태어난다.”





내가 강조한 ‘마음의 조리(心の料理)’는


많은 젊은 요리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 고기를 굽는 게 아니라,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야키니쿠는 일본의 음식문화 속에서


이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의 힘이다.





나는 그것을 굳게 믿었다.





협회의 활동은 점점 활발해졌다.


젊은 세대의 요리인들이 늘어나고,


기술과 열정을 겸비한 새로운 인재들이 등장했다.





이 젊은이들이야말로


야키니쿠의 미래를 이끌어갈 희망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마음은 스스로 익혀야 한다.”





이 말은 지금도


많은 조조엔의 후배 요리사들이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나는 협회 회장으로서


야키니쿠 문화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국을 돌며


세미나, 강연, 조리 시연회를 쉼 없이 이어갔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했다.





“야키니쿠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그것이 내 생애의 사명이었다.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 ― ‘지속은 실력으로 승화된다’





나의 야키니쿠 인생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무지(無知)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으며,


매번 몸으로 부딪혀 배우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어떤 이는 나를 가리켜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단언한다.


운이란 결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이다.





나는 야키니쿠를 배우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밥솥을 씻고, 불판을 닦고, 설거지를 하고,


그 속에서 나는 ‘불의 온도’와 ‘고기의 숨결’을 배웠다.





19세가 되어 처음으로


야키니쿠 전문점의 주방에 정식으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요리사라기보다 잡일꾼에 가까웠다.





아침부터 밤까지,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맛이란 결국 반복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다.





29세에 독립하여


자신의 가게를 차렸을 때,


나는 여전히 미숙했다.


경영도, 기술도, 사람을 다루는 법도


아무것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의 젊음은


실패조차 두렵지 않았다.





나는 오직 “더 맛있는 고기를 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밤낮없이 일에 매달렸다.


고기를 굽는 시간조차 내 인생의 일부였다.





그 시절,


삶은 단순하고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열정의 빛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시행착오가


오늘의 나를 만든 자양분이었다.





나는 늘 젊은 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진심으로 지속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장한다.”





요리를 그만두려는 제자들이


가끔 나를 찾아와 상담하곤 한다.


“회장님,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럴 때 나는 묻는다.


“진짜 그만두고 싶은가, 아니면 잠시 쉬고 싶은가?”


대부분의 제자들은 대답한다.


“잠시 쉬고 싶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건 그만두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흔들린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넘기면,


반드시 새로운 길이 열린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그러했다.





스스로를 믿고,


한 걸음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 발자국은 반드시 실력이 된다.





그리고 그 실력은


언젠가 타인을 돕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으로 변한다.





나는 믿는다.


“지속은 실력으로 승화된다(継続は実力に昇華する).”





이 말은 내가 인생에서 깨달은 궁극의 진리이자,


야키니쿠 인생의 모든 답이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우리 때보다 훨씬 풍요로운 환경 속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도전보다는 안정, 모험보다는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안타깝다.





“완벽한 준비가 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시작한 뒤에 배우면 된다.


실패 속에서 성장하면 된다.





무지했기 때문에 배웠고,


모자랐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오늘날까지 일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제 후배들에게 바란다.


“부족함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부족함을 연료로 삼아라.”





그것이 바로


야키니쿠라는 불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나는 지금도 매일 고기를 굽는다.


그 속에서 여전히 배운다.


인생이란, 완성되지 않는 조리와 같기 때문이다.





불이 꺼질 때까지,


나는 계속 구울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며,


내가 젊은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다.






img_(74)_(1)_(1)_(1)_(1)_(1)_(1).jpg?type=w773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불고기에 인생을 바친 남자, 죠죠엔 창업자 아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