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즐겨하는 어른의 스몰 토크 중 하나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자기 몫의 가사 노동을 하며 지낼 수밖에 없으니까(집안일을 하지 않는다? 그건 어른이 아님). 가만 들어보면 수건 하나를 개키더라도 모두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고,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재밌다.
나는 설거지를 제일 좋아한다.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일단 즐겁고, 더러워진 그릇이 내 손을 거쳐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게 특히 마음에 든다.
유튜브에서 요리 영상을 보다가 ‘설거지 감 줄일 요령’을 알려주는 장면’이 나오면 혼자 씨익 웃는다. 나는 상을 차릴 때 그릇을 아끼지 않는다. 어차피 설거지를 할 사람은 나고 나는 설거지 하는 게 싫지 않으니까. 있는 접시 없는 접시 다 꺼내 늘어놓아도 된다. 맥주 한 캔을 마시더라도 꼭 잔에다 따라 마시고, 과자를 먹을 때도 접시에 옮겨 담아 먹는다. 가끔 요리하는 게 좋은 건지 예쁜 접시에 음식을 담는 게 좋은 건지 헷갈린다.
지난여름 맥주잔으로 애용하던 투명한 잔 바닥에는 유리로 만든 곰돌이가 붙어있다. 맥주를 따라 놓으면 꼭 곰돌이가 맥주 거품으로 반신욕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엄청 귀엽다. 선물로 받은 잔인데 그 잔을 쓸 때마다 선물 준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괜찮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뒤로 선물을 살 일이 있으면 컵이나 그릇을 1순위로 고려한다.
내 부엌이 생기고 나서는 부엌이 정돈 되어야 비로소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설거지감이 쌓여 있으면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내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인간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미지근한 물로 그릇을 헹구거나, 깨끗한 스펀지로 거품을 내서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접시를 문지르는 작업도 즐기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계는 잘 마른 접시를 정리하는 일이다. 내가 산 접시지만 다시 봐도 참 예뻐서 소품샵에 온 것처럼 요리조리 돌려보며 한참 구경하다가, 그릇장에 소중하게 넣어둔다.
밥 그릇, 물잔, 술잔, 냄비, 프라이팬, 소스용 작은 접시 기타 등등. 예쁜 게 보일 때마다 하나씩 야금야금 사 모았더니 어느새 싱크대가 가득 찼다. 이제 부엌 용품은 그만 사야하는데 아무래도 요리는 장비빨이라 소비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
변명이 아니라 새로운 장비는 부엌 생활에 아니 인생에 변화를 만든다. 얼마 전 큰맘 먹고 무쇠 솥을 들인 덕분에 할 줄 아는 음식이 늘었다. 직접 만들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메뉴를 능숙하게 요리할 때의 성취감이 대단하다. 회사 일과 집안일을 통틀어 최근에 가장 큰 성취감을 느낀 순간은 전복 솥밥이 맛있게 잘 되었을 때다. 다른 요리는 곧잘 하는데 유독 밥을 짓는 일만은 어렵게 느껴져서 오랫동안 즉석 밥에 신세를 지던 나였다.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이경민(친구 이름)이 말했다.
“예쁜데서 예쁜 접시에 맛있는 음식 먹고 있으니까 여행 온 것 같아요.”
지나가듯 한 이야기였는데 마음에 쏙 드는 발상이라 잘 챙겨두었다. 이 말엔 묘한 힘이 있다. 이유 없는 권태로움이나 무기력함에 빠져있다가도 이 말을 꺼내면 뭐라도 하고 싶어진다. 그래 여행은 못가지만 예쁜데서 예쁜 접시에 맛있는 음식을 차려 먹자. 신나게 먹고 나서 설거지까지 해치워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