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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브르사비 Oct 02. 2020

프랑스 시골에서 여름을 보낸다는 것

납작복숭아, 사이프러스 나무, 레몬색 햇살 한 움큼

2년 만에 시댁에 왔다. 시골 변두리 외딴곳, 흔한 자동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이곳에서 우리는 지난여름을 보냈다. 처음 왔을 때가 남편과 한참 연애하던 때였으니 가족이 된 후로 처음 오는 셈이다.



여느 나라의 시골이 그렇듯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 무색하게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이 집을 살 때부터 있었다던 사이프러스 나무며 소나무와 블랙체리 나무, 로즈마리, 라벤더, 이모르뗄 등의 허브 군락까지 무엇 하나 바뀐 것 없이 말이다. 굳이 달라진 점을 꼽자면 시부모님이 손수 돌보는 딸기밭과 채소밭이 좀 커졌다는 것 정도. 남편과 나는 철없는 아이들처럼 입에 납작복숭아를 물고 나무 그늘 아래 아무렇게나 누워 책을 읽고, 수영을 하곤 했다.



레몬색 햇살, 바삭한 공기의 질감,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뒤집는 나뭇잎 소리. 프랑스의 여름, 여기에는 나를 황홀하게 하는 것이 한데 모여있었다.



실로 한국에서의 삶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날씨에 민감해지고 시간에 무뎌진다.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일상이 된다. 이를테면 밤에 수없이 쏟아지는 별을 보고 은하수를 관찰하는 것이라든지, 새로 쪼갠 장작 냄새를 맡으며 책을 읽는다든지, 아침, 점심, 저녁마다 같은 곳을 찍는 것과 같은 일 말이다. 식사도 청소도 시부모님이 하시기에 그저 내가 하는 소일거리란 고양이에게 간식을 준다거나 짧은 글을 쓰고 해 질 녘 집 주변을 걷는 것뿐이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국제 커플이 시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여기 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 ‘시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안일에 있어서는 손님이 된다. 특별한 가족 모임을 제외하고 내 일상은 온전히 존중 받는다. 특히 시댁 식구들은 좁히기 어려운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수없이 기울였다.


예를 들면 강한 향의 치즈는 손도 못 대고 요리에 별다른 취미가 없으며, 프랑스어로 말하려면 한참 로딩 시간이 필요한 며느리에게 프랑스인 시어머니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C’est normal”. ‘그게 보통이지’ 혹은 ‘이상할 것 없는 일이야’라는 의미로 두 나라 간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어색함을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해주신다. 시어머니가 평소에는 하지 않던 쌀 요리를 하신 것도 이런 노력의 일부였다. 실로 양가 가족 중 국제 커플은 우리가 유일하고, 시골 마을에서 평생 동양인을 거의 보지 못하고 살아온 그들이니 이런 배려와 마음 씀씀이가 놀라울 뿐이다.



집 근처에 오디가 한창이라는 말에 어느 날, 수확에 나섰다. 시부모님의 걱정 탓에 장화와 모자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보니, 장화를 신을 것도 없는 평지이다. 서양에서는 레이스 플라워라고 불리는 아미초가 곳곳에 물결친다. 나무 밑동과 길게 늘어진 가지, 바위에 낀 이끼에는 이른 아침의 풀냄새가 자욱하다. 베일을 쓴 여인의 옆모습처럼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달큰하게 익었을 법한 오디만 골라 바구니에 담는다. 미세한 행복이 마음속에 번져간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어느 정도 양이 되겠다 싶어 시부모님께 보여드리자 완벽하다며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손뼉을 쳐주신다. 해마다 이렇게 오디를 따서 잼을 만드는 시어머니는 레시피북 없이도 오디 잼 만드는 법을 척척 일러주신다. 만드는 내내 정말 근사한 향이 났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오디 잼 두 병을 들고 파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10년 넘게 쉼 없는 직장생활을 하고 고작 일주일의 해외여행을 진짜 휴식이라 믿었던 내게 이곳에서의 3주간의 쉼은 ‘휴가’의 개념을 온전히 뒤바꾼 것이었다. 연애하던 시절, 남편의 어린 시절 여름 이야기를 질리지도 않고 여러 번 청해 들었던 나는 이제, 이 계절에 얽힌 나만의 추억을 갖게 됐다. 싱그러운 초록빛과 부드러운 애정으로 기억될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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