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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an 10. 2020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 그 중간의 균형을 찾다.

영화 <툴리> 리뷰



우연히....



JTBC 영화 프로그램인 방구석 1열에서 줄리 무어 주연의 <스틸 앨리스>가 소개되는 걸 봤다. <스틸 앨리스>에 앞서 소개된 영화는 바로 <툴리>였다. <스틸 앨리스>와 대등하게 소개될 영화라면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론, 그날 방구석 1열을 처음부터 시청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스포가 그야말로 무자비했다. 영화 프로그램의 콘텐츠를 만들려고 영화 콘텐츠를 저렇게 죽여도 되나 싶을 정도로,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결말 공개였다. (물론, 패널로 나온 이미도 배우와 서천석 교수는 좋았다.)



그래서 이 글은 결말에 대한 직접 스포는 포함하지 않고 쓰려고 한다. 그렇지만 잘 안될 것 같다. 아무리 우회해서 말해도 뉘앙스에서 짐작되는 사실이 있을 테니, 영화를 볼 사람이라면 읽지 않을 것을 권하고 싶다. 나에겐 사전 정보 없이 봤기에 더 충격적일 정도로 좋은 영화가 <툴리>였으니까.





내가 좋아할 조건이 충분한 영화였다. 내가 독박 육아로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이자 임산부니까, 주인공의 고충에서 공감할 요소가 많을 수밖에.



하지만 <툴리>를 그런 공감만으로 괜찮은 영화라 판단하는 건 좀 아쉬운 것 같다. 육아를 하며 겪는, 외롭고 고단해지는 현실이나, 미묘하게 불편해지는 현실은, 조금 민감한 감정의 촉수를 가진 창작자라면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을 테니까. 아기 셋을 낳은 작가의 경험을 인용한다든지, 실제 엄마들에게서 설문조사를 받는다든지 하면, 더 충분하고.



하지만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은 리얼리티만이 아니었다. 내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 육아 우울증에서 극복했다는 단선적인 스토리도 아니었다. 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영화는 심리적이고, 상당히 내적인 영화였다. 꼭 육아를 하는 사람만의 영화는 아니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영역을 짐작하고, 작가가 숨겨놓은 상징적인 메시지를 찾아내는 재미가 있는 영화였다.






특히, 나는 이 영화를 내가 좋아하는 심리학 도구인 에니어그램을 통해 해석하는 게 흥미로웠다.



에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을 9가지 유형으로 구별하는 한편, 각 유형별로 세 개의 본능에 바탕을 둔 하위 유형(자기 보존적 본능, 성적 본능, 사회적 본능)이 있다. 세 개의 변형 중 하나가 우세하기는 하지만, 세 변형 모두 사람 안에 있다. 가장 우세한 게 1차 본능이 되고, 그다음 우세한 게 2차 본능이 된다. 예를 들면, 나는 1차가 자기보존 본능이고, 2차가 성적 본능이라, '자기 보존-성적' 유형이 되었다.



가장 우세한 것과 덜 우세한 것이 결정되어 있다 해도, 1차 본능과 2차 본능은 늘 내 안에 살아있다. 그리고 늘 서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싸운다. 하루에 낮과 밤이 있듯, 계절에 따라 낮이 차지하는 시간과 밤이 차지하는 시간의 비중이 달라지듯. 나의 시간은 결국 우세한 낮이 이기 하지만, 밤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나의 1차 자기 보존 본능은 낮의 시간을 산다. 배부름과 안락함, 평화와 안정을 추구한다. 어떻게든 이 현실에 발붙이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안간힘을 쓴다. 그는 현실적이다. 보일러 온도를 조절하고, 가습기를 켰다 끄고, 삼시 세끼를 준비하고, 저렴한 육아용품을 골라 산다. 나의 자기 보존 본능은 내가 엄마로서의 최소한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일탈하고픈 욕망을 꾹꾹 누르기에, 고지식하고 늘 지루하다.



사람에게는 한 가지 면만 있는 게 아니기에, 많은 엄마는 엄마의 삶이 자신의 전부로 치부되는 걸 거부한다. 주인공 마를로가 공감을 얻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나 자신과 나의 가족을 지키려는 행동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소진시킨다. 그래서 더 성마르고, 더 우울하고, 더 까칠해진다. 나 또한 그랬다. 육아가 나의 전부인 것으로 결정되는 것에 저항하거나 절망했다.



아이를 그토록 재우고 싶었던 이유는 밤의 시간을 꿈꾸기 때문이었다. 밤의 시간은 고요한 시간,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 현실의 나와 단절된 내 속의 나와 만나는 시간이었다. 밤의 시간에는 내 속에 상대적으로 덜 우세한 2차 본능인 성적 본능이 깨어났다. (섹슈얼한 의미의 '성적 본능'과는 다른 개념이다.)



나의 2차 성적 본능은 태생부터 자유롭다.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더 그립고, 부족하기 때문에 더 간절하다. 무의식적으로 '진정한 나'는 거기에 있는 것 같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면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나의 2차 본능은 창조 활동을 한다. 책도 읽고 사색도 하고 예술도 한다. 미친 듯이 자유롭게 사랑하기도 한다. 열정을 불태우다가 배고픔도 추위도 졸음도 잊는다. 젊고 능동적이다. 2차 본능이 활개치는 시간은 바로 젊은 보모 툴리의 시간이다.



엄마 마를로에게 보모 툴리가 나타난 것은, 낮의 시간을 살던 존재에게 잃어버린 밤의 시간을 선물한 것과 다름없다. 원래 밤의 시간은 힐링과 휴식의 시간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진정한 휴식이란 잃어버렸던 자기를 만나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마음속에서 죽이면서 지냈던 자기, 젊었던 시절에 놓고 온 자유롭고 순수했던 자기를 말이다. 이에 나는 100퍼센트 동의한다.



나도 그랬다. 아이를 재우거나,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후에 부족한 잠을 보충하거나 뒹굴면서 TV를 보는 것보다 '글을 쓰는 일'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았다.'글을 쓰는 일'도 일종의 노동이었다. 금전적인 이익은 없어도 말이다. 나는 아이가 있을 때 노동을 하고, 없을 때도 노동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밤낮 없는 그 노동이 나에게 오히려 활력을 주었다.



내 안의 두 본능이 균형을 잡아가기 때문이었다. 한 본능이 다른 본능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착취당하지 않고, 큰 격차 없이 질서 있게 자기 자리를 잡아간달까? 영화에서는 이 균형은 마를로가 아이들 방의 불을 껐다 켰다 하는 것으로 비유한다. 불을 켜면 밝고, 불을 끄면 어둡지만, 마치 그 중간이라도 있는 양 껐다 켰다를 반복하다가 모두가 만족하는 그 중간을 찾아 멈춘다. 밝음과 어두움, 두 개념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해도, 수도 없이 껐다 켰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중간값이 생길 것만 같다.






툴리는 마를로에게 아가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줄 것을 권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서 서로 다른 내가 다투다가, 더 우세한 쪽으로 기울어져 그게 자신인 양 살아간다. 그래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나이 든 사람은 그걸 '늙는다'라고 표현하지만, 어린 사람은 그걸 '자란다'라고 표현한다. 나는 후자 쪽 표현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우리가 조금 늙거나, 조금 자라는 방식으로 형태가 달라지더라도 나를 잃어간다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다른 내가 되어갈 뿐,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영화는 '나무로 만든 배'에 대한 비유를 소개한다.





인어는 바닷속에서 자유로운 몸이었다. 그리고 그 지느러미를 버리고 다리를 얻게 되었다.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가 자주 주저앉는 이유는, 더 이상 지느러미가 없어 물속을 헤엄치지 못한다는 절망감과, 발 딛고 살아야 할 육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패배감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때 물속을 헤엄친 경험이 있기에 지느러미가 없어도 물속을 헤엄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두 다리를 가졌기에 육지를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건지 모른다. 두 가지를 잃은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얻은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책에서 건져 올린 이 구절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툴리가 사라져도, 마를로의 마음속에서 툴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물속으로 추락한 자동차에서 헤엄쳐서 탈출한 건 마를로 자신이지만, 안전벨트를 풀어준 건 툴리였다. 마를로에게 이제 더 이상 툴리가 없어도 되겠지만, 툴리가 준 해결의 단초는 잃어버릴 수 없다.



세포가 분열하여 늘 변하는 존재가 되더라도, 본성만큼은 유전자에 기록되어 여전히 살아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배의 외관이 바뀌더라도, 배가 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배가 향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방향도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근원은 바뀌지 않으면서 외양만 인어에서 인간이 된 것이다.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 마음만 먹으면,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을 오갈 수 있는 존재, 그런, 강한 존재, 마를로는 이제 그런 엄마, 아니, 그저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단순히 "독박 육아 힘들다. 도와서 함께 하자!"라는 사회 인식 개선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지, 그 균형을 어떻게 찾아나갈 것인지 묻는 성장 영화다. 그리고 한 엄마, 한 여성, 한 개인의 힘을 무한히 신뢰하는 영화다. 당연히 힘든 현실을 개인의 문제에 국한하고, 외부로 구조 요청을 하지 않는 태도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개인 내부의 역량과 에너지에 집중할 수 있어서, 내겐 와 닿았던 영화였다. 기어이 혼자 해내는 집념을 가진 이들에게 딱 맞는 영화였다.



나도 한때 술 취한 마를로처럼 어릴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완전히 방탕한 자유로움을 누리며 살았던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나의 시간은 전부 나의 시간이었던 그때로. 하지만 요즘은 나이 든 지금이 더 좋다. 생각해보면,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았을 때' 나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방황하는 20대의 툴리가 어떤 면에서는 불안정해 보이는 것처럼.



나는 결국 다리를 얻고 물속에서 빠져나올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된 건, 더 강력한 내가 되기 위한 신의 한 수였다. 나는 이제, 내가 선택한 남편과 내가 선택한 임신과 출산, 그리고 아이와 함께,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 그렇게 두 몫의 인생을 산다. 현실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고 발전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중력을 이겨내고 무거운 발걸음을 또 한 번 옮겨 본다.



한때 인어였던 추억 속 내가 열렬하게 응원하는 이 현실의 육지 위에서.






(+)

추가하는 짧은 영화 이야기.





영화 <툴리>를 쓴 디아블로 코디옷을 훌훌 벗어던지며 춤추는 스트리퍼 출신의 영화 각본가다. 찾아보니, 대학 졸업 후 광고대행사에 취업해 일하다가 지루함을 참을 수 없어 취미로 스트리퍼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블로그에 적다가 작가가 되고 유명 영화 각본가가 되었다. 게다가 세 아이의 엄마. 신기했다. 그녀야말로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합체되어 더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추가하는 짧은 단상. 스포 덩어리.



툴리가 화장실에서 젖몸살을 하는 마를로를 돕는 장면은 키스 장면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묘하게 에로틱하다. 고통에 신음하다 젖몸살에서 풀려나오는 표정은 성행위 때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마를로는 토한다. 카타르시스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기와의 화해하는 장면이다. 나르시시즘이 느껴지기도 하다. 명장면으로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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