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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an 08. 2020

육아에 무균상태란 없다.

완벽하지 않아야 엄마가 산다.

영화 <툴리> 스틸 컷


첫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내 몸이 조심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어렵게 생긴 생명이라 더 그랬다.



임신 5개월부터 병가를 시작으로 직장 생활을 중단했다. 지금 상태로는 가급적 누워 있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조언에, 나는 한 장의 거실 러그가 되었다. 손에 리모컨을 쥔 채 누워서 내내 TV만 봤다. 그때 대체 몇 편의 드라마를 정주행했는지 모른다. 무거운 것을 들지 말라기에, 떨어진 물건이 발에 차여도 줍지 않았다. 배달된 택배는 남편이 퇴근해 들어오기 전까지 현관에 고스란히 뒀다.



가장 좋다는 임산부 전용 비타민과 엽산제, 철분제를 사고, 함량까지 분석해서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먹었다. 음식도 까다롭게 가렸다. 내가 먹은 게 그대로 전달될 것 같아서 커피 한 모금도 제대로 삼키지 않았고, 라면이나 인스턴트 음식, 탄산음료를 먹을 때도 죄의식을 느꼈다. 아기가 위장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내가 먹은 음식을 꿀꺽꿀꺽 받아먹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피부에 닿는 모든 것에 까다로웠다. 화장품의 화학 성분을 분석해주는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여, 유해하다 싶은 화장품은 죄다 버렸다. 색조 화장은 아예 안 했고, 신체에 무해하다는 무기자차 선크림만 겨우 발랐다. 샴푸를 할 때마다, 바디워시를 쓸 때마다 세상 모든 화학 물질이 죄몸으로 흘러들어 뱃속 아기를 공격 것 같았다. 피부가 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도 아닌데, 스펀지처럼 거품을 쭉 흡수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무엇이 그대로 전달될까 불안 걸까.



아기를 낳은 후, 유난은 더 극심해졌다. 아기 젖병을 천연세제로 닦아 열탕 소독을 하고도 부족해서 UV 소독기까지 돌리는 건 기본이었다. 생수 중에 제일 비싸다는 제주도 물을 사서, 한번 끓인 후에 식힌 물로 분유를 타는 것도 소소한 일상이었다. 나는 방부제 각종 화학 성분이 묻어있는 물티슈가 아기 피부에 닿는 것조차 싫었다. 그래서 물티슈도 빨아 썼다. 물티슈 한 통을 세탁기에 털어 넣고 빤 다음 건조기를 돌려서 건티슈로 만들었다. 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놀고 있을 틈 없게 빨래 거리를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일을 시켰다. 세탁기와 건조기만 분주했던 건 아니었다. 깨끗하고 쾌적하며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나도 기계처럼 쉴 새 없이 동작해야 했다.  



가습기도 그냥 돌리지 않았다. 살균제 문제가 터지고 난 후라, 일반적인 가습기 사용법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수돗물에 든 화학 성분을 날리려고, 10리터의 커다란 들통에 물을 수시로 끓였고, 그렇게 끓여서 식힌 물만 가습기에 넣었다. 가스비도 많이 나오는 데다,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겨울철 실내 공기를 적정 습도인 50% 이상으로 유지하려면 24시간 가습기를 돌려야 했다. 우물물 긷듯 가습기 물을 수시로 퍼 나를 때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한 전자 제품들이 오히려 추가적인 노동을 발생시키는 아이러니를 느꼈다.



이유식을 시작하고 나서는, 유기농 매장에서만 재료를 골랐다. 오이 하나, 호박 하나도 어찌나 비싼지 벌벌 떨면서도 아기에게 줄 것은 좋은 재료만 골랐고, 소고기는 한우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았다. 비록 나나 남편은 비행기를 타고 물 건너온 고기만 먹을지라도 말이다. 두꺼운 이유식 책을 사서, 그것이 한 권의 바이블이라도 되는 것처럼 철석같이 믿고 따랐다. 소금, 설탕, 밀가루를 비롯하여 색소, 식품 첨가물, 알레르기 성분 등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온 친정엄마와 함께 떠먹는 요구르트를 먹은 이 있었다. 아기는 생전 처음 맡은 달콤한 향기에 군침을 삼키며 할머니 곁을 치근거렸다. 그전까지 아기 달달한 요구르트를 먹 적이 없었다. 먹이지 말라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정 엄마는 괜찮다면서 본인의 숟가락을 입으로 쪽 빨더니, 요구르트를 크게 퍼서 아기 입에 쑥 집어넣었다.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엄마는 본인 한 번, 아기 한 번씩 먹고 먹이기를 반복했다. 나는 속이 부글거렸다. 어른의 충치균이 아기에게 옮겨갈 수 있기 때문에 어른과 아기는 같은 수저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육아서의 조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뱉었다.  



"해님이는, 다른 숟가락으로 주면 안 돼?"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아기의 모습에 흐뭇해하던 친정엄마가 멈칫했다. 예상치 못한 내 반응에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야야, 나는 내 입으로 씹은 거 네 입에 넣어 주면서, 그렇게 키웠다야. 애기 그렇게 깨끗하게 키우면 거 아니야."



친정엄마는 무안해서 내게 되려 면박을 주었다. 나도 머쓱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당시에 내가 그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했다.



아기를 몰라서이기도 했다. 만지면 부서질 듯이 조심스럽기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아기가 얼마나 건강한 존재인지 가늠이 안됐다. 무조건 조심하는 게, 엄마의 책임이고 의무인 줄 알았다. 100%의 완벽한 육아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줄 알았고, 거기에 당연히 발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벽증에 가까웠던 육아 방식이 오히려 나를 '완벽한 엄마'가 아닌,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해질 수 없는 엄마'로 만들고 있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이제 되돌아보니, 지금까지의 나의 육아 행태가 우습기까지 하다. 해님이가 두 돌이 지나고 난 지금, 해님이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키우려고 세웠던 모든 계획들은 다 무너 있었다.



아기는 나와 같이 꼬깔콘을 먹고, 롯데리아 소프트콘을 할짝거리며, 한 모금의 톡 쏘는 사이다 탄산에 혀를 내두르고, 보글보글 끊인 라면 한 젓가락을 기어이 맛다. 편의점에 들려 첨가물이 뒤범벅인 과자와 젤리를 보란 듯이 사고, 과당이 가득 든 주스를 쪽쪽 빨아 마신다. 나는 소금기가 어느 정도 있어야 잘 먹는다며 짭짤한 간을 고, 튀기면 뭐든 잘 먹는다며 돈가스, 치킨 너겟, 새우튀김 등을 반찬으로 낸다. 이래야 밥을 먹는다며, 국에다 흰쌀밥을 퍽퍽 말아 떠먹이고, 채소 안 먹는데도 과일이라도 잘 먹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 아기의 식탁은 이미 나트륨과 당분의 향연이다. 책에서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는 것 같다. 



장난감 소독을 한 게 언제였는지 생각나지도 않는다. 구강기 때처럼 입에 넣고 빨지 않으니 괜찮다는 게 이유다. 아기 옷이 크게 더럽지 않으면 어제 입은 옷을 다시 입히기도 하고, 목욕도 매일 하지 않는다. 물은 정수기에서 뽑아 바로 마시고, 가습기 돌리는 것도 번거로워 젖은 수건을 널어 실내 습도를 40%로 겨우 맞춘다. 아기 식기는 어른 식기와 함께 식기세척기로 돌려서 닦고, UV 소독기도 쓰지 않는다. 이렇게 털털해질 거였다면, 나는 예전에 왜 그렇게 유난스러웠던 걸까.  

  

 

뱃속 아기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루 한 잔의 커피는 카페인 수치가 그리 높지 않다는 걸 알고 난 후엔 커피는 일상이 되었다. 먹고 싶은 거라면, 그게 혹여 몸에 좋지 않은 것일지라도, 태아가 먹고 싶어 한다며 당당히 먹는다. 엽산제와 철분제는 보건소에서 공짜로 받아 겨우 챙겨 먹는다. 무거운 물건을 들면 안 된다고? 벤치프레스를 하듯 12kg의 아기를 수시로 번쩍번쩍 들어 올린다. 아기가 있을 때는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있기 어렵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첫째를 돌보다 보면, 임산부로 대접받아야겠다는 선민의식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도 둘째는 첫째 때와 달리 큰 이벤트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찾아올 때부터 소리 소문 없었던 것처럼, 소리 소문 없이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 같은 개월 수의 평균 태아보다 조금 크다고 한다. 이제 나는 아기를 제법 믿는다. 매일 바닥에 납작 누워있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 다녀도, 뱃속에 찰싹 잘 붙어 있을 거라고. 매일 이름 부르거나 말을 걸거나 노래를 불러주지 못해도, 누나에게 하는 말, 누나에게 불러주는 노래를 듣고 저도 즐겁고 흥겨워할 거라고. 아기는 그런 충분한 힘을 가진 존재라고.





영화 <툴리>를 봤다. 보모인 툴리는 자기가 돌보고 있는 마를로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찰싹 붙어있네요."


"따개비 같은 애예요."


"애기가 따개비면 마를로는 배나 고래겠네요. 따개비는 배만 망가뜨린데요. 고래한테 달라붙으면 해도 안 끼치고 그냥 작은 기생충처럼 붙어 있는 거죠."



아기가 따개비인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엄마가 죽은 존재인 배가 되느냐, 살아있는 존재인 고래가 되느냐에 따라 따개비의 영향력은 달라진다. 살아만 있다면, 아기가 내게 붙어있는 것에 그다지 지치지 않을 수 있다. 툴리는 마를로에게 살아있는 엄마가 되라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깨끗하게 한다고 깨끗하게 해도 완전히 깨끗해지는 건 없다. 씻으면 씻을수록 바싹바싹 건조해지고 윤기와 영양분을 잃어가는 건 내 마음의 피부다. 육아에는 무균 상태가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지나친 살균 과정이 엄마라는 한 인격을 수없이 들볶고 닦달하며 생명력을 잃게 하는 독소가 될 수도 있다. 엄마가 살아야 아기도 산다.



먼지는 닦아내도 또 내려앉고, 닦아내도 또 내려앉는다. 먼지를 닦아내는 건 나의 일이지만, 24시간 떨어지는 먼지만 바라보고 있을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배우 이미도처럼 엄마에게도 '개인 생활'이 필요하다. 먼지보다 더 생기 있고, 먼지보다 더 활기찬 것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엄마의 삶을 채우고, 어쩌다 눈을 돌려 먼지가 쌓인 게 보이면 그제야 쓱쓱 닦아내면 그만일 것이다.




이미도 인스타그램 '엄마의 개인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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