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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Dec 30. 2019

우는 엄마를 위로하는 아기만의 방식

위로라는 건 이 땅에 두 해만 살아도 가능한 일




아기 앞에서 몇 번 울어본 적이 있다.



일부러 보여주려 했던 건 아니었다. 일 년 중 몇 날을 울게 된다면, 24시간 365일을 붙어 있는 아기에 그 몇 날도 공유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울음은 거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아기에게 울음 생활이니, 엄마의 울음도 그저 생활 소음의 일종이랄까? 그렇기에 바닥을 뒹굴던 아기옆에서 훌쩍거리는 엄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 건, 어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처음 아기가 우는 나를 똑바로 쳐다본 적이 있다. 무슨 연유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나는 원망에 가득 차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고, 주체하지 못한 격정은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아기는 그때 아기띠에 매달려 있었다. 마의 가슴팍에 밀착된 채,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들썩거리는 가슴의 움직임, 높고 새된 울음소리, 뜨거워지는 체온고스란히 느꼈을 것이. 그래서였을까. 기가 갑자기 고개를 들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기 시작 것은.



평소 아기띠 속에서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만 고개를 돌리던 아기였다. 그랬던 아기가 고개를 위로 든다는 건, 엄마의 울음을 직접 목격하겠다는 순연한 의지 표현이었다. 을 타고 흘러  끝에 아롱 눈물방울을 여다보는 아기 시선 앞에서,  울 자신이 없어졌다.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였겠지만, 내게 그 시선은 우는 엄마를 위로하는 아기만의 방식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 한동안 나는 아기 앞에서 울지 않았다. 울 일이 없었던 건지, 몰래 울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지 모르 말이다. 아기는 제 의지로 걸어 다니고, 몇 가지 말을 하고, 전보다 다양한 표정을 짓게 됐다. 더불어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졌다. 나는 표정 관리 신경 썼고, 말투나 태도도 조심했다. 관심의 크기만큼 영향력의 크기도 커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 아기 앞에서 울어 버렸다. 모든 상황이 나를 코너로 몰아 울지 않을 수 없게  때문이었다. 혼자였고, 몸은 무거웠고, 해야 할 일은 많았. 남편은 언제나처럼 회사였고, 친정 식구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해결해야 할 일을 얹어줬다. 이 방 저 방을 다니 어지르고 다니던 아기는 급기야 빨대 의 물을  집안에 뿌리고 다니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을 혼을 냈고, 몇 번을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힌 후였다. 괘씸죄까지 보태져서, 나는 아기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내 귀에도 듣기 괴로울 정도의 우럽고 거친 소리였다. 하지만 아기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봤자 변할 건 없었다. 맥이 탁 풀렸다. 최악이었다.



어떤 시인친구 앞에서 마음 푹 놓고 실컷 울어댄 일이 있는데 그걸 두고 "완창"이라 놀렸다는 일화가 있다. 길고 진한 설움을 맘먹고 풀어내는, 판소리 완창. 그런 완창이라도 하 속이 시원해질 것만 같아, 나도 종기의 고름을 짜내는 심정으로 울기 시작했다. 명창처럼 시원하고 길게 쭉 뽑아내지는 못해도,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울컥울컥 쏟아냈다.



 집안을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던 아기 내 꺽꺽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슬그머니 곁에 다. 그리고 엄마 앞에 쏟아진 물 자기가 뿌려놓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아기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에 바짝 갖다 대더니, 나를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엄마, 괜찮아? 엄마, 괜찮아? 엄마, 괜찮아?"



아기띠에 안겨있던 아기는 나를 한 방향으로밖에 볼 수 없었지만, 두 돌이 된 아기는 전후 사방으로 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아기가 놀랄까 봐 조심스러웠지만, 젖은 얼굴을 닦아내지도, 손으로 가리지도 않았다. 그냥 아기가 눈물의 제조, 생성, 배출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가 종일 아기의 울음에 노출되는 것처럼, 아기에게  번쯤  울음을 노출는 것이 공평하다는 듯이. 그렇게 나도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조금 있다가, 아기는 뭔가 생각난 듯 거실로 뛰어가더니 작은 두 손에 뭔가를 가득 담아 왔다. 아기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인 <꼬마버스 타요> 자동차들이었다. 그리고 아기는 내 손에 장난감 자동차를 하나하나 쥐주었다.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게 나를 달랠 방법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괜찮냐고 묻는 아기의 위로에 한 김, 장난감 자동차를 쥐주는 아기의 배려에 한 김, 그렇게 내 울음은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금방 수그러지지 않은 설움이 훌쩍거리고 있을 때쯤, 아기는 손으로 내 어깨를 쓸어내리더니,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미안해."



보통 아이가 친구를 물거나, 때리거나, 꼬집었을 때 선생님이나 엄마가 사과를 시키는 방식이었다. 상처 입힌 부위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 말하게 하는 것. 아기는 자기가 상처 입힌 부위가 어디 인지조차 몰라 늘 엉뚱한 부위를 쓸어내지만, 늘 시킨 대로 "미안해"라고 말하곤 했다. 아기에게 그 말은 그저 우는 사람을 달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인지도 몰랐다.



아는 아기가 내게 뭘 미안해하는지 알 필요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엄마의 슬픔에 관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위로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위로의 타당성을 논하기 무색할 정도로 아기는 작았고, 더없이 순수했다.



위로라는 것은 어쩜 

이 땅에 두 해 살아도 가능한 일이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유명한 짤이 있다. 출처는 정확히 모르지만, 사람들에게서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짤. 왼쪽에는 엄마, 오른쪽에는 공갈 젖꼭지를 문 아기 얼굴이 영상을 채우고 있다. 엄마는 갑자기 큰 소리로 우는 척을 한다. 아기는 그런 엄마를 보고 황급히 제 공갈 젖꼭지를 빼 엄마 입에 쏙 집어넣는다. 그리고 제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엄마에게 줘버린 아기는 황망히 운다. 엄마가 울었던 보다 더 슬프게, 더 크게 운다.





사람은 원래 이타적인 존재인 것 같다. 선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생각도 든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타인의 슬픔에 관심 가질 수 있고, 자기의 것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존다. 그리고 자진해서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임을, 내 아기를 통해 알았다.



사실 육아의 고단함을 증폭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은 외로움이었다. 핸드폰도, 책도, 펜도 빼앗아가는 아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와 대화하지도, 읽지도, 쓰지도 못해 갑갑하기만 했다. 하지만 슬퍼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볼  줄 아는 아기라면, 종일 단둘이 있어도 더는 외로워할 이유가 없다. 아기가 할 수 있는 말이 몇 안 되는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으로도 이미 완성된 인격의 증거로 충분한 것을.










브런치북<너를 낳아보니 나는 아기였어> 이후의 이야기를 계속 써보려 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your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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