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거실 가득하던 어느 오후, 유아용 매트 위를 기던 아기가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허공을 휘적이는 몸짓이 수상했다. 뭘 하는 거지? 금방 깨달았다. 아기가 손을 뻗은 곳에 뭔가 있다는걸.
지는 해가 보내준 햇빛은 아기에겐 주홍의 색채와 따사로운 온도를 가진 실체였다. 딸랑이와 젖병과, 엄마의 손가락을 움켜쥐던 아기는 보이는 것은 전부 손으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급기야 햇빛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모습은 내 육아의 기억에 사진처럼 콕 찍혔다. 직접 해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이의 모습과, 쉽게 잡을 수 없는 가치와 신념을 평생 쫓는 이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햇빛을 잡는 일은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일이었다. 아기가 하는 일은 무용한 것 같지만 전혀 무용하지 않았다. 무용한 것에서 무용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시인의 작업처럼 말이다.
만약 시가 살아 움직인다면, 이런 아기의 손짓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제 아기는 네 살이다.
아기는 이제 세상을 몇 안 되는 자기 언어로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기에게 낯설고 경이로운 사건을 맞닥뜨릴 때마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한 무언가에 비추어 해석하곤 했다. 그것이 아기가 개념화하는 방식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무엇보다 시적이었다.
예를 들면 이랬다. 내가 영계 삼계탕의 몸통뼈를 통째로 들고 뜯고 있을 때였다. 그 모습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아기는 내게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엄마, 공룡 먹어요?"
아기는 공룡 화석 사진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기의 눈에 엄마는 거대한 공룡 뼈를 뜯는, 더 거대한 육식 동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느 날은, 내가 크고 작은 그림책을 높이 쌓아올리는 것을 보며 아기가 말했다.
"와, 햄버거다!"
햄버거를 먹어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무언가를 들쭉날쭉하게 쌓아올린 형태에서 햄버거를 발견할 줄 알았다. 정말 명석한 아이였다.
아기는 사물의 비슷한 점이 있으면 그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았다. 이젠 잡는 것보다 놓치는 게 더 많은 나와는 달랐다. 그는 세상을 두 개 이상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기에, 두 배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나는 닭뼈를 공룡으로, 책 더미를 햄버거로 부르지 못했다. 상상력이 빈곤한 탓이었다. 나는 1인분의 인생만을 가진 어른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기를 씻기다 실수로 샤워기를 놓쳤다. 욕실 바닥에 드러누운 샤워기에서 물이 위로 솟구쳤다. 다행히 수압이 약해 물줄기가 천장에 닿진 않았고, 그저 자잘한 물방울이 부채 모양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기는 신이 났다. 욕실에 갑자기 생긴 작은 분수였다. 그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작은 물방울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방방 뛰었다.
"반딧불이다. 반딧불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작은 물방울은 정말 반딧불이 같았다. 나는 샤워기 물이 솟구치는 것을 잠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욕실 led 불빛을 반사하며 빛을 내는 물방울들의 향연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내 작은 시인과 함께 하는 순간,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시인의 재능은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의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으나, 시인으로 계속 자라지 못한 것이다. 아기가 열어주는 길을 잠자코 따라가다 보면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이름을 가진 세상이 들려주는 인생의 두 번째 이야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