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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un 10. 2020

둘째가 사랑인 진짜 이유



"둘째는 사랑이다."라는 말을 흔히 한다.


둘째로 태어난 내가 듣기엔 귀가 즐거운 문장이다. 하지만 첫째로 태어나, '맏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온 이들에겐 그리 유쾌한 문장은 아닐 것이다.


즐겨가는 맘 카페에서 한 엄마의 토로를 읽었다. 맏이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둘째는 사랑이다."라는 말이 조금 속상하다고 했다. 대놓고 차별받진 않았지만, 그녀는 부모님이 자기보다 더 남동생을 더 예뻐한다고 느꼈다. 그런데 주변에 둘을 키우는 친구들도 둘째는 울어도, 짜증 내도 그저 예쁘다고 하니,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더 씁쓸하게 느껴지더란 것이다.


그 글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맏이들의 성토대회도 이어졌다. 둘째의 탄생으로 왕좌에서 밀려난 경험을 가진 이들만이 할 수 있는 한풀이였다. 쓴 뿌리에서 벗어나 자유해진 이들도 보였지만, 아직도 원망과 아쉬움에 얽혀있는 이들도 보였다.


마음속에 묻어두고 살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그 과거는 다시 살아나는 현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첫째든, 둘째든 똑같이 사랑해야지.'와 같은 결심을 하거나, '그래서 나는 둘째를 낳지 말아야지.'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삶이 사랑하는 아이에게 반복되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나도 둘째를 낳고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경험상 첫째와 둘째는 확실히 다르긴 하다. 내가 둘째를 낳고 키운 70일을 돌아보니 드는 생각이다. 같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첫째의 불운도, 둘째의 행운도 아닌 것 같다. 둘째가 사랑이라고 해서, 첫째가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저 태어난 타이밍에 따라 사랑의 색채와 질감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둘째는 사랑이다."라는 문장은 사실이다. 그 문장은 짧고, 무게도 가볍다. 그래서 둘째를 사랑하는 건 조금 쉬운 일이다. 오래 썸 타지 않고 빨리 결실 맺은 사랑처럼, 표정이나 몸짓 하나하나에 오해나 밀당하지 않는 연인 관계처럼 말이다. 아기가 웃음을 보내주면, 더 큰 웃음으로 화답하고, 아기가 울며 보채면 안아들고 토닥거리면 된다.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첫째 때보다 아이 키우는데 능숙해져서 생긴 여유다.


한편, "둘째는 사랑이다."라는 문장에 비해, "첫째는 사랑이다."라는 문장은 무겁다. 이 문장엔 너무 많은 각주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첫째를 향한 사랑을 설명하자면 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연식 있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오래된 CF 카피 문구에 비유하자면, 둘째가 그냥 커피라면, 첫째는 티오피랄까. 둘째는 단맛만 나는 사랑이라면, 첫째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이 다 나는 사랑이다. 온갖 맛이 뒤섞여 더 깊은 맛과 향을 음미하게 되는 그런 사랑이다.


나는 '첫'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참 서툴렀다. 귀여워하고 사랑을 표현해야 할 시간에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만 앞서 초조해했다. 아기가 웃어도 그것이 의미 없는 배냇짓인지 엄마를 알아본 웃음인지 분석했다. 웃음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일 뿐인데, 그 웃음조차 정상 발달 과정 속에 있는 건지 확인하고 비교하기 바빴다.


첫 말이 터졌을 때 기뻐하고 환호하고 축하해 주긴 했지만 한숨이 먼저 나왔다. 크게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나오는 한숨이었다. 아이를 닦달하며 훈련을 시키거나 교육을 시키지 않았지만, '이제 연필을 손에 쥐어야 할 시기야. 이제는 계단을 한 발씩 올라가야 할 시기야. 이제 동그라미, 네모, 세모를 구별해야 할 시기야.' 와 같이 다음 성장 과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육아에서의 불안은 때로 엄격함의 형태로 나타났다. 가볍게 넘어갈 일도 호되게 혼내기도 했다. 아이는 타고난 사랑스러움만으론 부모를 완전히 흡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몰랐다. 만약 아이가 과업 지향적으로 성장한다면, 그건 아이의 타고난 기질 때문만은 아닐 거였다. 결국 나의 지나친 기대와 다그침이 일조한 결과일 테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첫째의 세상은 동생이 태어난 이후에 더 가혹해졌다. 첫째가 어리다 해도 둘째보다 어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상에 많은 맏이들은 "언니니까, 누나니까, 오빠니까, 형이니까"라는 말을 들으며 의젓하게 라왔다. 생존 위해 터득한 맏이의 전략 "00 이는 애교가 없다."라는 식으로 매도했다. 애초 어른이 아닌 이에게 어른스러움을 강요했으면서.



부모가 육아의 동고동락을 함께 한 첫째에게 심리적으로 의지하게 된다면 어떨까. 아이를 아이로 보는 게 아니라 육아를 함께 하는 동료로, 자기 고충을 하소연하는 친구로 여긴다면. 부모는 아이를 묵은 스트레스를 분출하고 해소해 주는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는다면. 이런 미숙한 부모가 자행한 위태로운 위험 속에서 첫째는 숙명적으로 짠내를 풍기며 자랄 수 밖에 없다.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쌍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내게 첫째는 첫사랑이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의 시간은 송두리째 첫째 것이었다. 첫째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만이 독점한 시간이 분명 존재했다. 둘째는 평생 동안 시간을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것과 비교하면, 이는 첫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부모는 그 첫사랑의 추억을 평생 잊지 못한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했다 해도, 더 많이 눈 맞추고, 더 많이 이름 불러주고, 더 많이 말 걸어준 건 첫째였다. 첫째 아이가 둘째 아이보다 언어 발달이 빠르다는 공식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 둘째는 형제와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 불완전한 언어를 구사하는 형제에게서 상당수의 말을 배우지만, 첫째는 완전한 언어를 구사하는 성인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말을 배우기 때문이다.


둘째가 애교가 많다는 속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째를 편들어주는 말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의사 표현을 하고, 강렬하게 감정 표현을 하는 첫째에 비해 둘째는 자기표현할 수 있는 힘이 약하다. 그래서 본인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어필해야만 부모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 둘째의 애교는 제 나름의 생존전략인 것이다.


나는 요즘 히스테릭해진 첫째의 비위를 맞춰주기 바쁘다. 지극히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첫째의 불만을 얼른 해결해 주기 위해, "응애"하고 우는 둘째를 뒷전에 두기도 한다. 둘째는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실상 늘 살피고 정성을 기울이는 건 첫째다. 그래서 둘째를 안고 있을 때도 얼굴은 첫째를 향한 채 웃음을 보낼 때가 많다. 친정 엄마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하루의 한두 시간은 꼭 첫째와 데이트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는 것이다. 첩이 들어온 후 세상 전부를 잃은 느낌이었을 내 정실부인을 위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지만, 부모에게 첫사랑도 둘째 사랑도 다 끝사랑이다. 둘째가 사랑인 이유는 걱정이 줄어서, 걱정보다 사랑에 집중해도 되게끔 준비된 시기에 만난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첫째보다 둘째를 더 사랑하는 건 아니다. 서로를 만난 타이밍에 알맞게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결과로 서로의 관계가 어떤 모양으로든 형성됐을 뿐.


이 사실이 상처받은 이 세상 모든 맏이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어쩜 둘째는 두 번째로 찾은 디즈니랜드 같은 건지도 모른다고. 이제 어느 정도 길을 알아서 전보다 더 알차고 야무지게 놀 수 있겠지만, 그곳에 첫 발을 들이던 첫 마음에야 비할 수 없을 거라고. 기억하지 못할 뿐, 우리는 한때 설레던 그 순간의 유일무이한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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