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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ul 15. 2020

새는 날아야 건강하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여파로 외출에 용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그래도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마스크를 끼고 나간다.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첫째 해님이 덕에 100일이 지난 둘째 달님이는 매일 당연한 듯 바깥바람을 쐰다.



인조잔디를 깔아놓은 아파트 공터로 가자, 해님이는 마스크와 신발을 벗어던지고 거침없이 내달린다. 비가 갠 오후, 선선한 바람이 아이의 치맛단을 펄럭인다. 새장을 벗어나 세상에 처음 나온 작은 새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문득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자유비행 앵무새 아저씨'가 떠오른다. 실내에서 키우는 게 당연한 줄 알았던 앵무새를 데리고나와 하늘에 날리는 사람이다. 앵무새의 자유비행을 시도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아저씨는 의미심장하게 답한다.



"사람도 걸어야 하고, 뛰어야 하듯이 새도 날지 않고서 건강을 지키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아야 건강한 게 새 뿐일까. 사람도 펄펄 날갯짓하듯 뛰어놀아야 건강해진다. 그 사실을 알기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유모차에 누운 달님이의 수유 시간이 가까워지면, 놀이 종료를 선언할 수밖에 없다.



"이제 갈 시간이야."



해님이 귀엔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 이런저런 회유 방법을 동원해본다. 좋아하는 간식을 주겠다거나, 만화를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달님이는 당장이라도 배고프다 보채기 시작할 것 같다. 여름답지 않게 시원하고 청명한 날이 야속하다. 엄마 속이 타들어 가는 줄 모르는, 길어진 해가 야속하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를 번쩍 안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불가능하다. 둘째가 생긴 이후 나는 달님이의 유모차에 손이 묶여 버렸다. 해님이가 자진해서 움직여주지 않으면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엄마 먼저 집에 간다!"



쓸 수 있는 카드가 '협박' 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스러우나, 급하니 어쩔 수 없다. 유모차 방향을 돌려 금방이라도 자리를 뜰 것처럼 굴어본다. 시늉만 해서 통한다면 다행이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아이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옮겨 본다.



"엄마, 진짜 간다!"



아이멀어지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1미터, 2미터, 3미터, 4미터... 거리는 멀어져도 엄마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바로 달려갈 수 있을 정도만 떨어지려 한다. 하지만 그 정도론 해님이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경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아이에게서 조금 더 떨어져 보기로 한다. 이 정도면 안전하겠다고 생각한 선을 아슬아슬 넘는다.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모를 곳으로 새를 날려보내는 앵무새 아저씨처럼, 행선지를 선택할 권리를 아이에게 준다. 이제 엄마가 할 일은 그저 믿음의 영역에 서서 기다리는 것 뿐이다.



"날기 전에도 제가 어디 있나 보고요. 날고 있는 중에도 계속 저를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만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게 아니다. 아이도 엄마를 계속 의식하고 있다. 앵무새도 자기에게 눈을 떼지 않는 아저씨를 의식하며 더 높이 난다. 새와 아저씨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실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해님이와 나도 그렇다. 느슨하면 느슨할수록 더 질기고 탄탄해지는 실. 그 실이 안심시켜주기에, 자유를 더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다.



 


꾸물거리던 해님이는 보물이라도 찾듯 길가 수풀 사이를 들여다본다. 앵무새가 창공을 가르며 이전에 보지 못한 풍경을 눈에 담는 건, 아저씨가 선을 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에 드는 나뭇가지를 찾은 해님이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온다. 조급한 엄마와 달리 그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그래도 결국엔 온다.



특수아동 중에도 유독 도망 다니는 아이가 있다. 그런 아이일수록 손을 꼭 잡게 되는데, 그런 아이일수록 하나같이 손 잡기를 싫어한다. 도망갈 때 잡으러 따라가면 더 잽싸게 내뺀다. 졸지에 교사와 학생 간의 술래잡기가 된다. 상황은 더 위험해진다.



그래서 달려가서 붙잡아오기 전에, 잠시 멈추곤 한다.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있도록, 잘 보이는 곳에 떨어져 서서 바라본다. 아이가 오롯이 자기 선택으로 갈 길을 정했다고 느끼도록. 강요와 억지가 아니라, 선택과 의지에 의해 돌아오도록.



"(앵무새가) 손을 떠나서 수백 미터를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현상은 흔치 않은 것입니다. 새를 사랑하는 애착, 그리고 믿음이 아니면 자유비행은 쉽지가 않거든요."



앵무새의 자유비행은 새와 인간의 끈끈한 교감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새가 돌아오는 이유는 자기를 소중히 길들인 인간의 마음이 그 펼친 날개에 깃들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놓아줄 수 있는 건, 오랜 시간동안 차곡차곡 믿음을 쌓아올린 결과다.



그리고 놓아주는 모험을 감행하는 건,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새와 마찬가지로, 아이도 날아야 건강하다. 내 마음이 편한 길이 아니라, 진짜 아이를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엄마가 극복한 두려움의 크기만큼, 아이는 용감함의 크기를 키워 나갈 것이다.



주먹을 쥐면 주먹에 잡힌 것만 잡을 수 있지만, 손을 펴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다는 오래된 지혜가 생각난다. 놓아야 가질 수 있다는 불변의 아이러니를 육아에도 적용해본다. 그러므로 조급하지 말 것, 뜻대로 되지 않아도 아이와 연결된 끈을 억지로 잡아당기지 말 것, 그리고 끝내는 돌아올 것이라 믿을 것.



그렇게 오늘도 나는 멀리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이곳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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