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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Aug 03. 2020

아이를 안고 오늘도 '땅띔' 합니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아이의 무게



요즘 무릎이 아프다.



누워 있다가 일어나기가 버겁다. 새벽에 아기가 깨서 우는데도, 몸이 침대에 접착된 것처럼 꼼짝을 않는다. 겨우 떼서 일어나면, 잠자는 사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다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매일 팔 굽혀 펴기를 200회씩 한다는 배우 이승신 씨의 말이 생각난다. 자기 몸을 스스로 들어보니 새삼 무거웠다는 말이.



첫째 산욕기 때는 관절통으로 꽤 고생했다. 무릎, 손목, 손가락을 비롯,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둘째 때는 아기를 적당히 안아주고, 관절에 무리가 가는 동작도 피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시기의 차이일 뿐, 아기 엄마에게 관절통은 언젠가는 찾아오는 문제였던 거다.



무릎뿐만이 아니다. 요즘엔 발바닥도 아프다. 족저근막염, 이름이 어려워서 말할 때마다 한두 글자씩 틀리곤 하는 그 질환인 것 같다. 걸을 때마다 뾰족한 못이 발바닥에 콕콕 박히는 기분이다. 내 몸무게를 감당하는 것으로 모자라, 아기 몸무게까지 보태지니 발바닥이 하소연하는 것이다. 무겁다고, 그만 좀 누르라고.



물론, 이렇게 아픈 건 부실한 체력 탓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았을 때는 '마른 비만'이었고, 지금은 그냥 '비만'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을 때도 체성분 대부분이 지방이었으니, 출산 후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타고난 운동치다. 철봉 매달리기 기록 1초대고,  굽혀 펴기는 단 한 번도 못한다. 따라서 이승신 씨처럼 제 몸을 스스로 들어 올리는 기분 좋음을 평생 느껴본 적 없다.



헬스 트레이너가 그랬다. 나처럼 근력이 없는 사람은 웨이트 기구를 쓰는 것보다 몸무게를 가지고 운동을 하는 편이 낫다고. 하지만 난 요즘 밤낮으로 덤벨 운동을 한다. 아기를 안아 드는 일이 덤벨 운동 자체니까. 헬스장에서 덤벨 하나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내가, 한몫의 생애감당하기 버거운 내가, 이제 내 무게에 더해서 아기의 무게까지 감당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을 말이다.



영화 <그래비티> 지구로 귀환한 스톤 박사가 우주 공간에서 느낄 수 없던 중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비틀비틀 일어서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본 곳은 4D 영화관이었다. 그가 내디딘 한 걸음 한 걸음의 무게감이 스크린을 뚫고 느껴졌다.  땅을 박차고 달리고 싶어도 뭔가에 붙들린 듯 굼뜨게 움직이는, 그런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땅띔'이라는 말이 있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땅에서 뜨게 하는 일'이란 뜻인데 그 '무거운 물건'에 '나'나, '내 아이'란 말을 넣으면 꽤 의미심장해진다. 무겁다. 삼신할머니가 노하시니 무겁다 투덜거리지 말아야 하지만, 무거운 건 무거운 거다. 들어 올릴 때 나도 모르게 기합이 들어가는 13Kg의 첫째와 새털 같은 신생아기를 지나 제법 듬직해진 둘째의 무게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책임지고 짊어져야 할 역할의 무게가 버겁다. 가끔은 도망치고픈 충동도 생긴다.




"돌아갈래, 여기 있을래? 알아. 여기가 좋긴 하지. 그냥 시스템 다 꺼버리고 불도 다 끄고 눈을 감으면 세상 모두가 잊혀지잖아. 여기선 상처 줄 사람도 없고 안전하지."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의 선택이야. 계속 가기로 했으면 그 결심을 따라야지. 편하게 앉아서 드라이브를 즐겨. 두 발로 딱 버티고 제대로 살아가는 거야."


-영화 <그래비티> 중에서



그래도 광활한 우주 속에 모든 걸 놓아버리려던 스톤 박사를 붙듯 건, 여전히 연결된 삶의 끈이었다. 나의 무게, 그리고 우리의 무게가 지금 여기에 계속 살아 있도록 붙드는 무게라는 것을 안다. 너무 가벼워도 안된다. 가벼우면 숨겨놓은 날개옷을 찾아 입고, 양팔에 아기 둘을 가뿐히 안은 선녀처럼 하늘로 훨훨 날아갈지 모르니까. 삶에 진정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우리는 이토록 무거운 거다.



요즘은 헛된 꿈과 상념에 빠질 새도 없다. 가끔은 우울을 핑계로 온종일 이불속에 침잠하던 시절이 호시절이었던 것 같다. 분유를 타고, 먹이고, 놀아주고, 안고, 씻기고, 재우며, 그저 현재를 산다. 꼭 해야 하는 것만 하는데도 늘 바쁜 일상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몸은 참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이라도 꼭 필요한 만큼은 생다. 두 아이를 들어 올릴만한 딱 그 정도. 그 최소한의 근육이 나를 지켜줄 것이고, 바닥에 닿아도 그곳을 박차고 튕겨 오를 탄력이 될 거라 믿는다.



아이를 안고도 땅띔을 할 수 있다면, 아이 없는 땅띔은 얼마나 쉬워질까.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운동선수처럼 언젠 훈련 끝 것을 안다. 지금처럼 아기 띠를 두르고, 한 손으로 아기를 토닥이면서, 다른 손에 든 스마트폰으론 글을 쓰는 일도 추억이 될 것이다. 이 글도 아기를 안지 않았다면 없었을 글이다. 숨 쉴 곳을 찾을 필요도, 빠져나갈 틈을 찾을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족저근막염이 의심되는 발바닥으로 지구 표면을 꾹꾹 누르며 생각한다. 이곳에 발자국이 찍혀 한 편의 글로 흔적을 남긴다면, 모두 모래주머니가 무게를 보태준 덕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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