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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Aug 18. 2020

길고 가늘게 vs 짧고 굵게 사이의 교육

책 육아와 선행 교육에 대한 생각



남들은 두 돌전에 산다는 책을 세 돌을 앞두고 샀다. 수준이 맞지 않는 책은 아닌지, 아이가 정말 좋아할지 반신반의하면서. 첫째에게 너무 쉬우면 둘째에게나 알뜰하게 읽히면 되지 하면서.



40권이 넘는 전집이었다. 택배 상자는 몰래 받아서 창고에 넣어뒀다. 그리고 하루에 다섯 권씩 꺼내서 매일 소파 위에 무심히 올려놓았다. 어린이집에 다녀온 해님이가 우연히 발견하도록. 마치 게임처럼, 집이라는 던전에서 아이템을 다섯 개나 거저줍는 기쁨을 누리도록.



해님이는 예상대로 책 쪽으로 왔다. "책 읽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가 읽어줄게."도 하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다가 아이가 읽어달라고 하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엄마인 것 마냥 화색을 띠며 책에 함께 달려드는 것. 그게 나의 책 육아 전략이었다.



해님이는 신중히 책장을 넘겼다. 최근에 내가 읽어주는 책에 비하면 글밥이 많지 않았다. 여백이 많고 진행도 느렸다.




"이거, 이거 읽어줘."




읽어달라는 말을 쉽게 나왔다. 성공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또 읽어 달라고 했다. 읽어주고 나면, 또 읽어달라고 했다.



첫날에 한 권당 다섯 번씩을 읽었다. 그다음 날엔 어제와 오늘의 책을 합쳐서 그만큼을 읽었다. 책이 누적되면 될수록 잠자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30권쯤 꺼낸 시점에 아이는 1권부터 30권까지를 읽지 않으면 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읽어주다 지쳐 먼저 잠이 들었고, 아이는 컴컴한 방에 독서등만 켠 침대 위에서 홀로 음원을 들었다.



지금까지 많은 책을 사줬지만, 반응이 이렇게 폭발적인 적은 없었다. 책도 꽤 괜찮은 축이었지만, 다른 책에 비해 독보적으로 좋다기엔 물음표였다. 잘 읽을 책을 준 게 아니라, 잘 읽을 시기에 책을 준 게 주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패는 '시기'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아이 수준보다 어려운 책을 미리 사는 편이었다. 먼저 읽어보고 분석한 다음 단계적으로 제공할 요량이었지만, 계획은 번번이 빗나갔다. 우선 아이가 매의 눈으로 숨겨 놓은 택배 상자를 찾아냈다. 야무지게 잘 숨겼다 해도, 때를 못 기다리고 내가 꺼낼 때도 있었다. 좋아하는 아이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특수교육 좀 해본 자의 거만함이었다.


 


 '쉽게 고쳐서 가르치는 건, 또 내 전문이잖아?'




과제의 양을 줄이고, 난이도를 조절하고, 단계를 만들어 차근차근 배울 수 있게 설계하는 것. 교사로 일하며 숱하게 연습한 일이었다. 책의 글밥이 많으면 줄여서 간략하게 말해주면 되고, 내용이나 개념이 어려우면 쉽게 설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엄마의 예상대로 수준보다 높은 책도 아무렇지 않게 읽었다. 엄마가 쉽게 풀어 읽어주니까 재미있어 했다. 처음엔 심드렁하던 책도 나중엔 최애책(최고로 사랑하는 책)이 되었다. 계속 읽으며 책의 미덕을 새롭게 발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기에 만난 책에 온몸으로 반응하는 아이를 보니, 내가 해왔던 책 육아가 최선은 아니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너는 항상 아이와 책의 운명 같은 첫 만남을 주선해왔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미래'의 아이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재'의 아이를 위한 일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가로지을 수 밖에 없다. 아이 수준에 맞는 교육목표를 설정하고, 교육내용을 선정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을. 특수교육을 한다는 내가 아주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문득,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엄마와 교복을 맞추러 간 날이 생각난다. 처음 입어보는 교복을 설레는 마음으로 거울에 비춰봤는데, 이게 뭔 일인가. 셔츠 소매가 손목 아래를 지나 손등을 덮고, 치마 밑단은 무릎 아래를 지나 정강이 가운데 걸쳐 있었다. 코트는 하도 커서 담요를 걸친 것 같았다.



3년 동안 입을 옷이었다. 교복을 또 맞추기 어려운 형편상, 큼지막한 치수를 선택하는 건 당연했다. 그렇지만 그 옷을 사서 교복집을 나오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처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었다. 시간이 흘러 키와 몸무게가 늘어나고, 그 교복은 맞춤복처럼 딱 맞게 되어도, 그 설렘은 회복되지 않았다. 교복이 내게 맞춰지는 과정이 너무 길고 지루해서, 새삼스레 기뻐하기도 어색한 일이었다.



가늘고 길게 읽혀서 가성비를 뽑으려고 했던 내가 간과한 것은, 뭘 읽어도 처음 읽을 때가 가장 재밌다는 사실이다. 배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뭘 배워도 처음 배울 때가 제일 재밌다. 그다음에 하는 것은 전부 복습이 되고, 재탕이 된다. 이미 아는 것이라 생각하면, 의미에 더 깊이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 중인 언니가 늘 하는 말이 있다. 학원이나 과외 등으로 선행교육을 한 친구들이  오히려 더 못할 때가 있다고. 수업을 재미없어 하고 집중하지도 않아서, 어느 정도까지는 하는데 그 이상이 되질 못한다고.



책이야 보면 볼수록 가치가 더해지고 길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공부도 하면 할수록 기억에 남고 숙달되니 길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첫 만남이 맵시 없이 헐렁헐렁한 교복처럼 되면 안 되지 않을까. 아이에게 지금 가장 예쁘게 입힐 수 있는 맞춤복 같은 교육을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는 학습지를 한다는데,

누구는 한글을 뗐다는데,

누구는 영어 유치원에 보낸다는데...



앞으로 이런 소식이 주위에서 숱하게 들려올 것이다. 귀 얇은 나는 '길고 가늘게'가 옳은지, '짧고 굵게'가 옳은지 또 우왕좌왕하게 될 게 분명하다. 미리 해서 실력을 다지고 자신감을 키우는 것도 좋지만, 배움은 첫 만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첫눈에 반하는 교육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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