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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Dec 16. 2020

다르다는 건, 남보다 조금 더 반짝이는 것


해님이는 어린이집 신발장에서 자리자리를 못 찾는다. 작년엔 혼자 잘 찾았는데, 4세가 되니 오히려 못 찾는다. 미스터리다.



어린이집은 재원생이 0세부터 7세까지인 규모 있는 곳이다. 어린이집 현관에는 재원생의 수만큼 넓은 신발장이 있다. 이름표가 반듯하게 붙어 있으나, 한글을 모르는 유아에게 소용이 없다. 연령별로 이름표 색깔을 달리 해놨으나 도움이 안 된다.



그럼 작년에는 어떻게 자리를 찾은 걸까? 아마도 아이만 아는 어떤 힌트가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를테면, 해님이 자리가 특이한 장식이 아래 있거나, 신발을 잘 바꾸지 않는 아이 옆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매력적인 지표가 없나 보다. 어쩔 수 없이 말로 설명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주며 한 학기를 보냈다. 그래도 아이는 여전히 자리를 못 찾았다.



'이 정도 가르쳐줬으면, 다른 아이들은 자기 자리를 찾는 건가.'


'혹시 우리 아이가 남들과 좀 다른 건가?'



이런 생각을 하니, 좀 아찔했다. 내가 특수학급에서 만나는 아이의 학부모가 수없이 경험하는 아찔함일 거였다. 다르다는 것은 수치가 아닌데, 왜 심장이 두근거리고, 낯이 뜨거워지는 걸까.



차라리 누가 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속시원히 대답할 수 있을 테니까. 신발장의 가로 세로의 평행선 속에서 좌표를 못 찾는 아이가 특이한 거냐고. 가까운 곳도 내비게이션 없이 못 찾는 어른과 뭐가 다르냐고. 하지만 해명을 염두에 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 안의 동요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내 아이만 반짝이게 하다



비장한 결심을 하고 아침 등원길에 나섰다. 손에는 분홍색 보석 스티커가 들려 있었다. 아이에게도 처음 공개하는 거였다. 어린이집 가방에 붙여주자, 아이의 눈이 스티커보다 더 반짝였다. 기억시키는 것에는 성공한 듯했다.



스티커는 해님이 신발장 이름표 옆에도 붙었다. 아이 신발을 넣으면서 슬쩍 붙여놓고는, 어린이집 선생님도 들으라는 듯 괜히 큰소리를 냈다.



"해님아, 여기도 보석 스티커가 있네! 해님이 가방에 붙인 거랑 똑같지? 여기가 해님이 자리야! 잊어버리면 안 돼!"



그리고 어린이집 선생님을 돌아보며 눈을 찡긋했다.



"해님이가 자기 자리 잘 찾게 되면 뗄게요!"



이렇게 해서 해님이 자리는 홀로 반짝이게 됐다. 멀리서도 해님이 자리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자극적이고 치명적인 반짝임은 매일 해님이의 시선을 잡아끌었고, 아이는 그날부터 자기 자리를 아주 잘 찾았다. 이제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도 겁나긴 마찬가지였다.



해님이 신발장에 붙인 보석 스티커는 크고 작은 큐빅이 6개 정도가 연결된 형태였다. 자리를 잘 찾게 되면 뗀다고 약속을 했으니, 천천히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작은 스티커부터 하루에 하나씩 떼기로 한 것이다.



특수교사의 습관이다. 도움을 제공하고 나서, 어느 정도 잘하게 된 시점에 주었던 도움을 조금씩 제거하는 것. 큐빅을 하나씩 뗄 때마다 반짝임도 조금씩 줄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자리를 잘 찾았다. 그리고 어느새 가장 큰 큐빅 하나만 남았다.



그런데 마지막 반짝임이 사라지려던 순간, 내 안에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왜 떼어야 하는 걸까?'



아이는 그 스티커가 예쁘다는데. 그걸 붙였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결국 이 모든 게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닐까.



지금까지 다름이 개성이고, 다름이 특별한 것이라고 가르치던 나였다. 자기 아이가 튈까 봐 걱정하는 학부모를 안심시키며 괜찮다고 말하던 나였다. 하지만 특수교사인 나조차도 통일성을 깨고 혼자 튀는 것을 겁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스티커를 붙이는 것만큼 사소한 교육적 제안도 튄다는 이유로 거절하던 학부모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다르다는 건 알겠으나 다르지 않은 것처럼 지내고 싶은 마음, 어떤 액션이라도 취하면 다름이 기정사실화되는 것 같아 어떻게든 피하고픈 마음을.








모두가 자기 색으로 빛날 수 있다면



피부색도 머리색도 다른 나라였다면 달랐을까. 이질적인 구성원의 비율이 동질적인 구성원의 비율보다 높다면, 다름은 더는 불안의 근원이 되지 않을까. 피부색도 머리색도 억지로 알록달록 해질 수 없는 이 나라에서, 남과 조금 다른 이들이 어깨를 펴고 지낼 방법이 있을까.



뜬금없지만, 그럴 계획도 없지만, 해님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원장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학기 초 가정통신문에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스티커를 보내달라고 적는 것이다. 별이든, 하트든, 햇님이든, 구름이든 상관없으니 똑같은 그림이 그려진 2개면 된다고. 뽀로로든, 타요든, 콩순이든, 시크릿 쥬쥬든, 미키마우스든, 엘사든, 라푼젤이든, 카봇이든, 터닝 메카드든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보내라고.



그리고 스티커를 가방에 하나, 신발장에 하나 붙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조금 현란하고 무질서한 어린이집 인테리어가 되겠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아이들은 원래 무지개 색인 것을.



다르다는 것은, 남들보다 조금 더 반짝이는 것이다. 반짝임이 아름답다는 건 알지만, 홀로 반짝이는 건 슬픈 일이 되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남들도 모두 다 자기만의 빛이 있다는 사실이다.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름을 좀 뻔뻔하게 누리려면, 모두가 반짝이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자기만의 색깔로 빛날 수 있다면, 튀는 색깔이란 개념은 종적을 감출 것이다. 사방으로 터지는 팝콘처럼 제각기의 방향으로 톡톡 튀어 오르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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