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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졍 Jul 20. 2020

포스트 코로나와 예술

포스트 코로나와 예술



포스트 코로나. 모더니즘 앞에나 붙어있던 ‘포스트’가 코로나 앞에 붙다니. 포스트 코로나는 코로나19가 발병하기 전과 그 이후로 사회를 구분 짓고, 코로나 이후 겪게 될 사회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는 단어이다. 전세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사조가 하나 생겨난 것인데, 이 말이 주는 어감도 그렇고, 처음에는 이 말이 크게 체감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해 2월 코로나19가 크게 격상하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가지 변화된 현상들을 몸소 겪어보니 이 말이 어느 정도 실감이 되었다. 인간은 지금까지 경제와 문화, 사회 등 다방면에 있어 그 분야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가능했고, 그로 말미암아 이에 대한 대비도 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존재가 지구 상에 인간이 유일하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코로나가 일상 속에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예상을 뒤엎고 판도가 바뀌었다. 코로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대안이야 여러 가지가 나오긴 했지만 인간의 유일한 무기인 지성과 이성으로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거나 코로나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스트 코로나를 겪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예측하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인가.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분야에 변화가 생겼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문화예술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코로나로 타격을 많이 받은 분야 중 하나가 문화예술계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예술인들의 생계 문제가 거론되기는 했지만 코로나 이후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그 무게가 더해졌다. 하지만 한 편에서는 이와 또 다른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시대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비대면의 특성을 이용해 큰 수입을 벌어들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 다. BTS의 온라인 콘서트(방방콘)가 이에 해당하는 경우다. 한 회 공연으로 250억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다시 한번 코로나 존재의 양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코로나 이전에도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문화예술을 즐기는 방식에는 여러 다양한 양식들이 존재해 왔지만 그것과 별개로 코로나 이후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다른 방식이 많이 생겨 났다. 현재 VR이라는 기술이 떠오르면서 직접 찾아가지 않고 멀리서도 문화예술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도 되었고, 심지어는 VR로 죽어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가상으로 구현해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실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VR 휴먼 다큐, 너를 만났다> 참 고) 그리고 현장 예술인 연극이나 뮤지컬의 경우, 공연 실황을 촬영해 DVD로 만들어서 배포하거나 큰 스크린에 영상을 띄워 영화처럼 상영하기도 했다.
이렇게 비대면으로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방식은 코로나 이전에도 존재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 코로나로 접촉이 어려워진 시기에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대안이 나왔다. 미술 작품도 ‘방구석 전시회’로 전환해, 집에서도 전시를 볼 수 있게 만들었고, 뮤지컬, 연극, 콘서트와 같이 관객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 형태의 문화예술은 화상채팅 플랫폼을 이용해 온라인에 동시에 접속해 볼 수 있는 생중계 방식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이 두 가지 현상을 놓고 문화예술을 간접적으로 즐기는 방식이 같아, 무슨 차이가 있겠냐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차이는 그 간접 체험이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의 선택에 의한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구분 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VR이나 DVD로 즐기는 형태는 공급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의 선택과 의지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나 온라인 상영회와 같은 비대면 문화소비 방식은 코로나로 빚어져 나온 불가피한 선택에 의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욕구의 대체품이나 대용품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상이 가시적으로 특히 잘 드러나는 분야가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예술 분야도 그렇겠지만 특히 연극이라는 장르는 관객과 작품이 직접 대면해 만나 소통이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이 당연한 과정이 생략되고, 관객과 작품의 사이를 갈라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립극단에서 ‘이제 어떻게 연극하지?’라는 제목으로 연극의 미래에 대한 토론의 장을 열었었다. (이 또한 무관객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됐다.) 철학과 경제학 전문가를 초청해 각자 코로나 사태 이후의 연극의 미래에 대해 예측한 내용을 발제하고, 패널끼리 토론하고 마무리되는 형태의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었다. 강연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철학가 장태순 선생님이 발췌해온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 - 「연극에 대한 테제들」에 나온 문구였다.


“연극의 구성 요소들은 공연이라는 하나의 사건 속에서 한데 모이며, 공연은 매일 저녁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각각의 공연은 하나의 사건이고 독특하다.” - 「연극에 대한 테제들」


이 문구를 보자마자 ‘아’ 하고 이마를 짚었다.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 말이었어’ 하며 다시금 연극의 존재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잊고 있었던 연극의 의미가 한 문장으로 잘 정의되어 있다고 느꼈다. 보통 연극의 3요소라고 하면 무대, 관객, 배우를 말한다. (배우 대신 희곡이 들어가기도 한다.) 연극의 3요소 중에 절대 빠지지 않는 요소가 관객인데, 코로나로 인해 무관객으로 공연이 진행되고, 그 공연이 영상으로 만들어져 관객과 만나게 되는 형태 가 생겨났다. 공감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연장을 찾아가서 공연을 보는 일만큼이나 공연을 보러 가기 전 과정도 공연을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연이 시작된 후는 말할 것도 없고. 공연을 예매하는 과정부터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 리플릿이나 프로그램북을 읽어보는 행위나 공연 시작 전 안내 멘트를 듣고 숨 죽이고 첫 장면을 기다리는 일까지 이런 일련의 과정도 모두 공연을 보는 과정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이 모두 생략되고, 기기 속에서 나오는 흘러나오는 연극의 장면을 지켜보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다니.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비대면식의 문화가 연극계에 퍼졌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이상한 고집일지도 모르겠지만 연극은 관객과 무대와 배우의 연기가 한 공간에서 서로 만나 작용했을 때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유일한 예술 작품이자 장르라고 생각한다.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비교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은 메뉴로 음식을 만들어 낼 때도 음식의 레시피가 정해져 있고, 같은 요리사가 정량의 식재료들을 이용해 조리한다고 해도 매 순간 식탁에 올라가는 음식의 맛이 100%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연극도 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대사와 무대, 소품, 배우들로 매 회 꾸려진다고 해도 그 날의 배우의 컨디션이나 호흡, 관객들의 태도나 호응도에 따라서도 공연의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알랭 바디우가 『비미학』에서 말한 연극의 현장성이나 사건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오감을 발휘해서 즐길 수 있는 장르가 연극이고, 그때 그 시간에 존재하는 단 한 번뿐인 예술이 연극이다. 미술에서도 복제품이 수도 없이 나오지만 복제품이 원작의 희소성을 가질 수 없듯이 연극도 매 회마다 희소성을 가진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진화해온 과정을 거쳐온 것처럼 연극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본인이 가진 전통성을 버리고, 혹은 그 전통성이 가진 위기를 전환하는 방법을 찾아 탈장르화가 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종이책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처럼 연극이 가지는 고유의 형태나 색은 살아서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남아있다. 이렇게 코로나로 인해 연극이 겪는 몸살을 연극뿐 아니라 다른 문화예술계가 다 같이 겪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를 겪으며 문화예술계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예측이 어렵지만 시대가 변하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사조는 바뀔 수 있으나 예술의 고유한 가치는 변하지 않고 그 생명력이 오래도록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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