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쭉정이 Apr 15. 2023

'그럼에도' 사명감이 가슴 뛰게 하는 이유

12시간에 거친 압수영장 집행 후기


나름 큰 규모의 압수수색이 있던 날이다. 우리 팀 전원을 포함하여 같은 과 사람들까지 모두 동원되어 한 회사의 건물 전체를 압수수색 해야 했다.


현장에 도착한 즉시 대표이사를 상대로 압수영장을 집행하자마자 현장 장악이 시작됐다. 정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각 층을 돌아다니며 지원 나온 직원들과 역할분담을 하면서 확인해야 하는 물건과 확인된 물건을 정리해야 했고, 일일이 변호사에게 열람시키면서 계속해서 물건을 찾아내는 등, 말 그대로 중노동 판이 따로 없었다.


그 과정에서 예민해지기도 하고, 동료끼리 날이 선 말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특히 대규모 압수수색은 매번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평에 합을 맞춰본 경험이 없다면 더욱 힘든 작업이다.


그렇게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압수수색은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약 12시간에 거쳐 압수 및 정리한 물건들을 한 곳에 모은 뒤 압수조서 등 필요한 서류를 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정리와 봉인 작업을 마친 뒤 사무실에 복귀하니 저녁 10시가 되었다.


압수영장 집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나 모두가 하나같이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왜인지 이런 날은 그냥 퇴근하기가 아쉽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고생하신 팀장님께서 해장국에 소주 한잔씩만 하자고 하셨다. 렇게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회포의 자리를 가졌다.


압수 규모가 나름 꽤 컸던지라 다들 어느 정도 긴장했을 것임에도 촉각을 곤두세워 정말 모든 팀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든 날이었다. 그 모든 카오스의 현장 속에서 계속하여 중심을 잃지 않으셨던 팀장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참고로 팀장님은 30년 동안 오로지 수사만 하신,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이자 제일 좋아하는 선배님이다.)


"이제 나는 내일모레 퇴직이다. 그런데 오늘 너희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이제 나는 더 이상 할 일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더라. 이제 앞으로는 너희들이 우리 조직을 이끌어갈 것이고, 이제는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번 사건을 경험하면서 크게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 번째는, '그럼에도' 동료 간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팀원 간의 사이가 모래알처럼 개인주의가 지나치면 큰 일을 해내기는 어렵다. 아무리 각박한 사회라 할지라도 내 옆에 있는 동료를 서로가 믿고 의지해야 무엇보다 강력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신념이 필요하다. 이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순수함을 탁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안 좋은 요소들이 분명히 있다. 그게 거짓이 될 수도 있고, 악함이 될 수도 있으며, 과한 욕심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가끔 그러한 요소들에 무너지거나 휩쓸리곤 했었다. 그러나 탁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또는 어떠한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는지를 잊지 않고서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타협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강한 신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을 계속해서 잘 지켜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무시할 건 무시하면서,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스스로의 뜻에 맞게 한 발짝씩 나아가보기로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된 날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현장에서의 깨달음과 뿌듯함을 잊을 수가 없어 글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진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시간이 흘러 지난 시간을 돌이켜볼 때 지금은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사, 법대로만이 과연 최선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