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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30. 2018

01. 서른 살, 대통령 앞에 서다.

<나는 대한민국의 여성 과학자입니까?>



스물두 살 대학교 교양수업시간에 ‘서른 살까지 이루고 싶은 꿈 3가지’를 적어내는 과제가 있었다. 지금 흔히 말하는 버킷리스트 작성이었다. 서른 살이 되면 이루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 데 고작 3가지라니. 100가지도 넘는 꿈에서 어떻게 3가지를 꼽을 것인가.
  
며칠을 고민하다가 문득 서른 살이 된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봤다. 큰 성공을 이루진 않았더라도 내가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행복하고 당당한 모습이고 싶었다. 그래서 적은 나의 꿈 3가지.
  
- 유명 인사들 앞에서 발표하기.
- 부모님 도움 없이 내가 번 돈으로 외제차 사기.
- 사랑하는 사람과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홍콩의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 먹기.
  
거창하진 않아도 쉽지 않은 꿈이었다. 사실 이 꿈을 적어낼 때만 해도 통장잔고가 10만 원도 안 되던, 그저 수업시간에 내준 과제하기에 하루하루 바빴던 학생이었다. 내 전문 분야가 생기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받아야만 유명 인사들 앞에서 발표를 하고, 안정된 직업이 있어야 갖고 싶은 것을 스스로 사고, 연애와 여행을 할 여유도 생기게 될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구체적으로 꾸는 꿈은 그 힘이 강력하다고……. 매년 다이어리를 바꿀 때마다 3가지 꿈을 맨 앞 장에 옮겨 적어두었다. 처음에 과제로 쓸 때는 나조차 의구심이 들던 나의 꿈이 매년 구체화되고, 한 해의 목표가 되고, 하루하루의 계획이 되었다.


대학원 시절 고분자 화학 실험 시간에


서른 살 어느 가을 날, 평소 알고 지내던 교수님이 오랜만에 연락을 주셨다. 대학원 졸업 후 입사 초부터 선임연구원이 될 때까지 우리 회사와 공동연구과제를 함께하던 교수님이셨는데 이번에 경기도 중소기업청장으로 오시게 됐다고 했다. 때마침 코엑스에서 한 달 후 있을 ‘중소기업 기술혁신대전’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중소기업 재직자 우수사례 대표자로 공과대학원 졸업 후 중소기업을 택하게 된 계기, 중소기업의 장래성과 하고 있는 연구개발 분야를 주제로 한 강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여학생들의 이공계 진학이 많지 않던 분위기라 여성 공학인의 장점도 강연 내용에 넣어달라고 하셨다.
  
발표내용 논의 드릴 겸 청장님을 오랜만에 찾아뵈었다. 그간의 안부와 발표순서, 당일 일정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중 그날의 강연 청중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내가 발표하는 날의 청중은 다름 아닌 각 부처 장관들과 대통령이었다. 그날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할까?’ ‘이게 무슨 일이지?’ 도망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동안 실험 내용에 관해 크고 작은 학회에서 발표는 많이 해봤지만 관련 석학들 앞이라도 무서울 판에 대통령이라니……. 망신을 당하느니 못하겠다고 할까 하고 며칠을 고민하던 순간 문득 서른 살 나의 버킷리스트가 떠올랐다. ‘유명 인사들 앞에서 발표하기!’ 이보다 더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는 서른 살은커녕 평생을 가도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딱딱한 실험 논문 발표가 아닌, 내 경험을 비추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기에 오히려 다른 발표들보다 더 의미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대본을 쓰고 강연을 준비했다.

강연 당일 무대에 오르기 전, 벌벌 떨던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백선임! 평소 하던 대로만 해’라고 하시던 청장님의 말에 울컥하며 힘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드디어 무대 위에 올라섰다. 무대 위에서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삼엄한 경계 속, 마치 TV를 틀어놓은 듯 장관들과 대통령이 정말 내 눈앞에 있었다. 이미 외워온 대본은 백지상태였다. 그 엄청난 분들 앞에서 심호흡 크게 한 번 하고 그동안의 내 이야기를 해 나갔다. 어디선가 들은 좋은 말, 멋진 말들이 아닌 공대 진학에서부터 회사에 들어와 일하며 느꼈던 진심을 이야기해 나갔다. 시행착오는 많았지만 열심히 살아온 30년 내 인생을, 또 수많은 남자들도 서지 못한 이 자리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졸업 후 바로 회사에 입사한 지 어느덧 3년차, 개발 중인 실험조차 뜻대로 되지 않아 한참 슬럼프가 오던 시기였다. 아니 사실 공대에 온 내 선택이 잘못됐던 것은 아닐까 방황하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강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청중들의 박수를 받는 순간 태어나서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가슴 벅참을 느꼈다. 꿈을 이룬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정말 꿈이란 걸 구체적으로 꾸고 계획하니 이루어지는구나 하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지금도 가끔 지치고 무언가 내려놓고 싶을 때면 그날을 기억해본다. 내 분야에서 포기하지 않고 달려간다면 금세 또 그렇게 가슴 뛰는 순간이 오겠지라고, 누군가에게는 평생 갖기 힘든 기회가 그렇게 정말 기적처럼 서른 살의 어느 날 이루어졌다.
  
누구나 상상하고 희망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냥 막연한 생각으로만 둔다면 그것은 허무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적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를 계획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재미있게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하루하루 그냥 지나가는 시간에 맡겨 놓은 채 막연한 상상만 하지 말고, 시시하게 살기 싫거든 지금 당장 꿈과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백지원
어렸을 때부터 요리하는 것과 과학 실험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한때는 요리사가 되고 싶어,한식・양식 자격증과 궁중병과연구원, 숙명여대 한국음식연구원도 수료하였다. 성균관대학교 고분자공학과에서 공부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시절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위촉연구원으로 일했고, 현재는 (주)원케미컬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전자재료용 언더필 에폭시 수지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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