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의 총량을 시각적으로 환원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는 '예수 믿으세요'라고 쓰인 공기를 빨아들이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대기층과 내리쬐는 햇빛에 절대자의 이름이 알알이 박혀있을 수도 있고. 어찌 됐든, 무신론자에게는 그렇게 살기 좋은 세상은 아닐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믿지 않는데 타인이 믿어서 그 모든 것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망막을 투과해 들어오는 세상이라, 생각만 해도 눈이 시리다.
'밀양'이 딱 그런 세상의 이야기이다. '신애'는 남편과 사별한 후, 아들 '준'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피아노 학원을 차린다. 그러던 어느 날, 준은 유괴당하고 사체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요는 아들이 죽고 그 죽음에 넋이 나간 어머니의 처절한 모성애가 아니다. 이야기는 아들이 죽은 후 신애가 하느님을 믿으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아들이 죽기 전, 보이는 것만 믿는다 말하던 신애는 하느님을 믿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신애는 자신이 주님의 은혜를 입어 아들의 죽음을 극복했으며, 이제는 그 범인 마저도 용서할 수 있노라 말한다. 그리고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면회를 간다. 그런데 웬걸, 범인 또한 주님을 믿어 용서받은지 오래다. 스스로 용서를 받은건지 아니면 주님이 자신을 믿는이에게 은총을 내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신애의 용서를 당연스레 받아들인다. 면회를 같이 간 사람들은 그녀의 신앙을 칭찬하지 못해 안달이지만 정작 그녀는 나오면서 쓰러진다.
신애의 절규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며칠 간 사라졌다가 처참한 시체로 발견이 됐는데, 범인이라는 놈은 주님의 은혜를 받아 평온하다. 자신에게 따스한 햇빛 같은 은혜를 내려준 누군가가 자신이 증오하고 저주해야 마땅할 인간을 용서했다. 그런데 또 자신에게 종교를 권한 이들은 그것마저 주님의 뜻이 담겨있는 것이라 말한다. 저 햇살 한 줄기에도 주님의 뜻이 서려있는 것이라 말한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이내 신애의 믿음은 불신으로 변한다. 그녀는 이제 신을 저주한다. 그리고 그를 혐오하는 행동만을 반복한다. 교회 권사를 유혹해 섹스를 하는 도중에 하늘을 바라보면서 보고있냐고 속삭인다. 사과를 깎아먹다가 자신의 동맥을 가로로 죽 긋고 밖으로 뛰쳐나와 저 위를 노려본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은혜로움에 짓뭉개진지 오래다. 이제 그녀의 동공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를 본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그 두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각종 믿음에 반하는 것을 하면서 자신이 믿음을 줬던 이에게 냉소를 보내는 장면들 말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을 지탱할 수 있을만한 것인가. 결론은 이미 내려놓은 상태이지만,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꼭 맞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증오하는 대상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껴안고 어우를 수 있을만한 능력이 절대자가 아닌 인간에게는 없다고 믿는다.
요컨대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것을 애써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신애는 종교를 가지기 전에도 믿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기 전에 바람을 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남편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뭉뚱그려진 믿음만을 동공 저 깊은 곳에 새겨두었다. 사실을 외면하고 믿음을 신봉하면서 그녀는 밀양으로 도망쳐왔다. 아들이 죽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아들까지 잃어버린 고통을 하느님이 구원해 줄 수 있을거라 믿었고, 자신이 증오하는 범인마저 용서함으로써 평온할 수 있을 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의 크기만큼 허물어졌다.
그렇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에 대한 확신은, 절망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이다. 도대체 세상 어디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오아시스같이 달콤한 진리가 있단 말인가. 신기루는 있을지언정, 그런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믿으면 길이 보이리라'를 되뇌이다보면, 어느새 사실에 난도질당한 자신을 보게 된다. 불신으로 바뀌는 믿음은 비참한 사실만 못하다.
'밀양'은 파란 하늘을 비추면서 시작하고, 하수구에 내리쬐는 햇빛을 클로즈업하면서 끝을 맺는다. 자연을 비추는 그 어떤 장면에도 대놓고 '하느님을 믿으세요'라는 글씨는 박혀있지 않다. 그냥 하늘이고, 땅이고, 햇빛이다. 아무런 진리 없이 존재하는 것들, 그게 사실이다. 만물에 누군가의 뜻이 어려있다고 믿게 되면 결국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나고 절망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비참하더라도 사실을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 변함없이 늘 내리쬐는 햇빛같은 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