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이야기
닥터 후 시즌 5 에피소드 10화는 온전히 반 고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 어떤 의사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외계인을 물리치고 지구를 지켜내는 이야기에, 뜬금없이 반 고흐가 등장한다. 이 외계인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 같으므로, 지금은 그 에피소드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서, 고흐는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에 도달해 오르세 미술관에 빼곡히 걸려있는 자신의 그림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림을 감상하는 누군가에게 묻는다. 반 고흐는 어떤 사람이었나교. 그는 반 고흐가 자신의 찢어질듯한 아픔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틀림없이 역사상 가장 위대하며 가장 사랑받는 화가라 말한다. 이내 고흐는 흐느낀다. 동생을 제외한 이에게 단 한순간도 이해받지 못했던 그가, 생애 단 한 점의 그림도 제대로 팔지 못했던 그가 운다. 가끔씩 이 장면을 돌려보며, 어떤 식으로든 후대의 평가를 들었더라면 그의 삶이 변하지 않았을까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그는 서른 일곱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의 눈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어왔던 세상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적어도 나는 그의 선택이 존중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중한다. 자신에게만 느껴지는 것들을 발화하다가, 끝내 자신마저 태우다 사그러든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막 수채화를 배웠을 무렵, 그러니까 세상이 조금 덜 눈부실 때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단락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껴안고 이해하는 방식이자 자신에게만 내리쬐는 빛을 더듬어가는 과정이었다. 비록 그 빛이 너무 강렬해 나중에는 동공을 잠식해 버렸고, 삶의 마지막 몇 년을 온갖 혼돈 속에서 고통받게 되었지만 어찌 됐든 그가 살아가는 이유 또한 그 그통이었다. 어둠 속에 잠겨있던 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환한 빛 밖에 없기에 확신할 수 있다.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는 그런 빛을 쫓아가는 설렘과 좌절로 가득하다. 그는 그렇게 한평생을 타인이 아닌, 수채화를 이해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는 앞 뜰에 피어있는 해바라기를, 자신을 감싸고 도는 밤의 풍경을 그렸다. 순간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슴 저 언저리에 빼곡히 채워두면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의 결말을 제외한다면, 그의 삶이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생각한다. 한평생 무엇인가를 이해하며 어우르려 노력하고, 또 그것에 홀려 설렘과 좌절을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은 보편적인 것이니 말이다. 물론 무엇을 한없이 바라보며 가슴 한 구석에 선명하게 조각할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당시에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언젠가 글 쓰는 일을 계속해서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2년 쯤 지난 지금은 언젠간 글을 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살고 있다. 그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지금쯤 어디선가 설렘과 좌절을 반복하고 있지 않을까.
그 때 그 에피소드를 보고나서, 어디선가 '별이 빛나는 밤' 포스터를 사와서 방에 걸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 그림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나는 건, 한 달에 한 두번 집에 갈 때마다 그림을 꺼내보며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잠든 것 뿐이다. 다시 몇 달이 지나 그 때 고흐가 눈물짓던 장면은 다른 기억에 묻혀져 갔지만, 그것 또한 무언가에 설레며 덤덤해지는 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가면, 다시 별이 빛나는 밤을 꺼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