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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하 Jun 03. 2016

호랑이와 물고기 사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는 사강의 훌륭한 세월 중 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또다시 고독하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거기엔 또다시 흘러가버린 1년이라는 세월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가 개봉한 건 2003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2016년이다. 13년 사이 누군가는 많은 것을 경험했으며 끝내 고독해지는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적어도 사람을 만나는 일에 있어서는 그렇다.

 자존감 없는 이의 사랑은 비루하다. 사실은 모든 관계가 그렇다. 깊은 심연에 잠겨있는 자신을 찾아와주는 이와 흔치 않게 사랑에 빠지고 흔하게 헤어진다. 그 사이에 둘 만의 정원에서 서로를 위한 진심어린 기도가 오가고 말간 꽃이 피어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원을 감싸고 있는 대기의 농도는 짙어지고 서로를 향한 믿음은 굳건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누군가는 정원에서 걸어나올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자신이 그 혹은 그녀를 평생 책임질 수 있을까 생각에 잠긴다. 대개 이런 문제는 자존감 없는 이를 사랑하는 이의 몫이다. 자존감 없는 이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또다시 자신을 깎아내리고 채웠던 자존감을 비워내며 마지막을 준비한다. 중간에 사랑을 애원하거나 결론을 정확히 내리지 못해 관계를 지속할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어쨌든 둘은 다시 고독해진다. 그리고 흘러가버린 얼마 간의 세월을 추억한다. 애써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하지만 특별한 과정을 거친 이의 자존감은 이전보다 더 채워져있기 마련이다.

 자존감이라는 건 상대를 대할 때 꽤나 중요한 문제다. 다리를 쓸 수 없는 조제가 그토록 자존감이 무너진 여자였던 것처럼 누구나 치명적인 결함 하나 쯤은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 결함마저 이해하고 포용해줄 수 있는 이를 찾는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고독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조네는 츠네오를 만난다. 츠네오는 조제가 바깥을 구경하는 수단인 유모차에 스케이트 보드를 달아주고 세상으로 인도한다.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조제에게 접근했던 그가 이제는 그녀를 사랑한다. 츠네오는 조제의 두 다리로써 그녀의 일부가 되어 자존감을 채운다.

 그러나 정작  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의 과정은 영화에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1년 후'로 뭉뚱그려지는 검은 화면이 그 공백을 메꾼다. 그리고 등장하는 일련의 장면들은 조제에 지친 츠네오의 모습이다. 둘은 서로 이별을 직감하고 있다. 츠네오의 집에 들러 인사를 하기로 했던 조제는 뜬금없이 물고기가 보고싶다 말하고, 둘은 방향을 돌려 수족관으로 향한다. 하지만 조제가 그토록 보고싶었던 물고기는 휴관으로 인해 볼 수 없었고 어느 모텔에 당도해서야 그들은 조명 아래 천장을 부유하는 물고기들을 보게 된다.  

 나는 이 영화가 비장애인인 남자가 장애인인 여자를 사랑하다 지쳐 도망간 이야기가 아닌 무엇인가 결함이 있던 두 남녀가 만나 소중한 것을 교환하고 서로의 결함을 메꾼 뒤 그 혹은 그녀가 없는 일상으로 회귀하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천장을 부유하는 물고기를 보며 무언가 읊조리듯 말허던 조제의 모습이 자존감을 내려놓은 채 관계를 구걸하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다. 모텔에서 조제는 츠네오에게 자신을 떠나가도 좋다는 암시를 보낸다. 여태껏 자신은 저 깊은 바닷 속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자신은 더이상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당신이 떠나가면 빈 조개껍질처럼 홀로 심연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을 거라고 말이다.

 1년 전에, 조제는 츠네오와 함께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던 호랑이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것들을 하나 둘 씩 츠네오와 함께 겪어나가며 그녀는 점점 심해와 멀어진다. 그리고 자신도 세상의 일부임을 자각하게 된다. 1년 뒤 그녀가 물고기를 보고싶어 했던 이유는 가장 사랑하는 이와 가장 바라던 것을 이루기 위해서였을 거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가 관계를 애원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호랑이와 물고기 사이에서 그녀는 이미 홀로 심해에서 떠오를 수 있을 만큼의 부력을 얻었다. 조제가 자신과 물고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녀는 이제 스스로 헤엄친다.

 영화의 초점은 조제가 한 인간으로써 어떻게 자존심을 회복하고 멀쩡히 살아가느냐에 맞춰져 있지만, 나는 츠네오 또한 그녀 못지 않게 눈부셔졌다고 생각한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그가 그녀를 만나며 단정한 양복을 입고 그녀 곁을 지키며, 그녀와 헤어진 뒤에는 또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새로이 시작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 앞에서 지나간 조제를 생각하며 흐느낀다. 그녀로부터 받은 것들과 자신이 그녀와 끝까지 함께할 수 없다는 자책감에 엉엉 운다. 어쨌거나 그를 구성하고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값진 것이 들어온 것이다. 조제 만큼이나 츠네오도 변했다.

 항상 자존감에 대한 생각을 할 때, 누굴 얼마만큼 만났느나냐가 아니라 시작과 끝 사이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작정한 것이 아닌 이상 또다시 고독해지고 지난 세월을 곱씹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는 그러면서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되느냐이다. 나는 조제와 츠네오가 서로를 생각할 때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들을 수없이 꺼내볼거라 생각하기에 그들의 세월을 '1년 후'라고 뭉뚱그렸을 수 밖에 없을 거라 믿는다. 이별 뒤에 찾아오는 게 꼭 절망과 자책일 필요는 없다.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소중해 두고두고 가져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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