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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하 Jul 25. 2016

너를 그리며

데몰리션

 무언가 사라지거나 잃어버리는 건 분명 슬픈 일이다. 그런데 당장 그 슬픔이 도무지 구체화되지 않을 때가 있다. 온갖 감정들은 둥둥 떠다니는데 그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현실감이 생긴다. 예컨대 지금 글을 쓰기 위해 만년필을 꺼냈는데 찾아보니 없다. 생각해보니 몇 달 전 필통을 잃어버렸다. 때마침 글 쓸 일이 없었고, 별 생각없이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못내 아쉽다. 내 손에 익은 촉의 느낌과 쓱쓱 번져나가던 글씨가 선명히 기억난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한 것들이 현실로 다가온다.  

 이건 비단 사라진 '것'에 대한 이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라진 게 물건이 아니라 곁에 있던 사람이라면 문제가 삼차원으로 넘어간다. 좀 더 복잡해진다. 한 번쯤은 슬퍼야만 하는 상황인데 도무지 감정이 정리되지 않는 때가 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슬픈게 아니라 멍하다. 형식적인 애도를 표하긴 하지만 다른 세계의 일 같다. 제 8지구 쯤에는 나와 같이 변함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그 혹은 그녀가 있을 것만 같다. 이건 그냥 만년필을 잃어버린 것처럼 잊고 살아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텅 빈 자리가 감정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워둔 채 살 수는 없다. 결국에는 슬퍼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데몰리션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감정의 이유를 찾아나가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예고 되지 않은 죽음이라고 하면 명확히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나는 그걸 흐느끼다 못해 혼이 나간 여자들과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망스럽게 넥타이를 고치며 장례식장에  들어오는 남자들의 모습으로 기억한다. 그 풍경에는 분명 멍하니 울지도 못하다가 어느샌가 사라지는 사람이 드물게 있다. 주인공은 후자에 속한다. 아내가 죽었고 모든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슬프지가 않다. 자신도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지만 장례식 다음 날 바로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 일상에서 그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한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그는 아내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주인공이 보기 드물게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슬퍼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방법은 더없이 명확하다. 그는 말 그대로 모든 사물을 분해한다. 그 잔해 아래에서 그는 자신이 왜 자신이 슬퍼하지 못하는지 뒤져나간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싸이코 쯤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해체해나가면서 결국 답을 찾고 모두를 납득시킨다. 그리고 누구보다 가장 진심어린 눈물을 쏟아낸다. 그가 지난 결혼 생활을 파헤치면서 찾고자 했던 것은 자신을 설득할 단 한 조각 뿐이었으므로 정직했던 방법만큼이나 정직한 결과를 얻은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작스런 죽음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일단 눈물부터 쏟고 본다. 정작 슬퍼해야 할 순간은 떠난 이의 익숙함을 더이상 느끼지 못하는 일상에서 파고들텐데 말이다.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흐느끼고 나서는 어느샌가 잘 살고 있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은 이들을 변호하는 가장 훌륭한 격언이다. 틀린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고통이 그렇게 갑작스레 느껴지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가끔씩 감정은 현상이 일어난 한참 뒤에야 찾아오곤 한다. 현상에 약속이라도 한듯이 똑같은 반응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주인공이 분해를 통해 슬픔에 이르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될 수 있을 때 가장 성숙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변하지 않을 줄 알았던 주인공이 변하게 되는 이야기는 항상 좋다. 대개 그런 이야기의 경우 주인공은 결말과 상관 없이 자신을 설득시켜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설득시킨 사람은 감정에 솔직하며 지난 일을 의심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회전목마가 등장한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결국에 영화에 등장한 모든 인물은 죽음을 애도한다. 출발점에 그대로 서 있던 사람이든 주인공처럼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다시 돌아온 사람이든 마지막 장면에서 꺼내놓는 감정의 형태는 균일하다. 그러나 그 감정을 가장 오래 가져갈 사람은 주인공일 것이다. 가장 절절한 이별의 방식은 순간을 슬퍼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떠난 일상에서 누군가를 한참 그리워할 때 우리는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진심어린 애도가 된다. 슬픔이 꼭 이별 뒤에 곧바로 찾아올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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