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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쓴이 Feb 15. 2024

워어어어어어어어얼급

왜 안 와.

이번달은 유난히 월급날이 기다려진다. 월급이 아무리 잠시동안만 내 통장에 궁둥이만 살짝 붙였다 얌체같이 사라진다 하여도 다달이 궁둥이를 붙여주는 월급이 있느냐 없느냐는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12월과 1월에 이사를 준비하며 잡다한 물건도 많이 사고, 비용이 많이 들어갔는데 덮어놓고 돈을 쓰다 보니 내 돈이 아닌 것 같아서 본의 아니게 펑펑 샀다. 그것도 뭔가 나를 위한 물건이라기보다는 식칼, 주방 발매트, 비닐봉지 같은 것들을 구매했더니 지갑이 얇아진 만큼 기분이 두터워지지도 않는다. 그런 기분 아는가? 크게 쓴 돈이 없는데 큰돈이 명세서에 찍혀있을 때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oo마트 새송이 버섯 3천 원

다2소 수저받침 5천 원

다2소 반찬통 2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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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 예정금액 1,723,580원 같은 그런 기분. 괜스레 쓸쓸하다.



월급날은 매월 25일. 이번달은 유난히 월급날까지의 날이 길게 느껴진다. -월급날.-이 아니라 -우어어어어어어어얼급날- 같이 느껴진달까. 시간이 빨리 지나 23일에 당도하여(2월 25일은 토요일이라 23일에 월급을 받는다!) 잠시 스치는 월급의 냄새라도 맡고 싶은 심정이다. ‘돈, 돈’하니까 조금 그렇기야 하지만, 이제 곧 연봉협상 시즌이다. 돈 많이 받고 싶다. 누구나 그렇듯이.


어렸을 때는 내가 크면 당연히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고 당연히 좋은 차를 타고 서울에 삐까뻔쩍스리한 집 한 채는 당연히 있고 서울을 누비며 완전 캡짱울트라 멋있는 커리어우먼이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엄마한테 다이아몬드 몇 캐럿짜리 반지를 턱턱 사주는 그런 여성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파김치가 되어 무표정으로 지하철을 오르내리고, 오늘 점심엔 도시락을 먹을지 구내식당을 갈지 고민하고, 저녁엔 우삼겹덮밥을 먹을지 짜장면을 먹을지 고민하고 워얼급날을 기다린다. 퇴근하면 집에 누워 도파민에 절어 숏츠나 릴스를 무한 스크롤하고 다시 잠에 들고, 다시 씻고, 다시 파김치가 되어 또 일상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나. 때때로 특식이야! 라며 맛집에 찾아가 마주 앉은 이와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별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를 친구, 애인, 동료와 하며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팀장이 스리슬쩍 건넨 동전 크기의 초콜릿에 기쁘고 앞서가는 타인의 문을 잡아주는 다정함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지하철에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을 보면서 뭔지 모를 ‘마음 두터워짐’을 느끼게 된다. 집 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안도감과 편안함이 나를 내일로 뉘이게 한다.


괴로운 일도 있고 속상한 일도 더러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지 않는가? 일상의 틈새에 작고 소박한, 그래서 더 기분 좋은 순간들이 있다는 걸 말이다. 월급처럼 스치는 행운이 우리에겐 있다. 그것도 매달 꼬박꼬박 온다. 궁둥이를 잠시 붙였다 내게서 멀어지고, 또다시 다가온다.


아침 베란다에서 거리를 내다본다. 파란색 희망 버스가 지나간다. 저 파란 버스는 오늘도 하루 종일 정거장마다 도착하고 떠나고 또 도착할 것이다. - 아침의 피아노 /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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