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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Dec 20. 2020

잔향

2020. 12. 20.

 언젠가부터 글을 쓸 때 습관 하나가 생겼는데, 알게 모르게 '잔향'이란 단어를 쓰게 된 것이다. 처음 잔향이란 단어를 마주한 것은 어떠한 감성적인 글이 아닌 평범한 참고서에서 만났다. 스치듯 지나친 단어였지만 한두 번 써보니 마음에 들어 계속 쓰게 되었다. 트레이드 마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부드럽고, 아무 의미가 없다기엔 단어가 담고 있는 무게가 분명히 있다.


 어떤 단어들이 '잔향'으로 대체되었는지 생각해보면, '후회'와 같은 단어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면 '어젯밤 그 일에 대한 후회로 오늘도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라는 문장이 '어젯밤 그 일에 대한 잔향으로 오늘도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라는 조금은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문장이 되곤 했다. 단어 하나 바꿨을 뿐이지만, 어젯밤 일은 깊은 괴로움에서 여운을 남긴 기억이 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향이란 것은 후각을 자극한다. 후각은 특히 금방 피로해져서 몇 번 앓고 나면 순식간에 무뎌지는 감각이다. 어떠한 기억에 대해서도 그렇다. 트라우마가 되지 않는 한, 그것들은 금방 무뎌져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그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는 순간만큼은 괴롭고 때론 무아지경으로 취하곤 한다. 며칠 아니 단 몇 시 간만 지나도 신경 쓰이지 않을 기억조차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진한 향기로 흔적을 남긴다.


 너무 많은 잔향은 하루하루를 힘들게 할지 몰라도, 잔향조차 남기지 못하는 순간들로 채워나가는 삶 또한 다른 의미로 괴롭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속에 깊이 남은 잔향을 온 힘을 다해 즐길 필요가 있다. 애써 코를 막거나 팔을 휘휘 저으며 쫓아낼 필요가 없다. 그것들이 무뎌지는 만큼 성숙 해질 것이며, 언젠간 그 향기를 다시 느꼈을 때 진한 그리움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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