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흉터

<기생충>을 보고 난 후

by 찰란

우리 가족이 다시 흑석동으로 이사를 왔을 때 동네는 달라진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좁은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중국집 오토바이의 매캐한 매연 냄새, 게처럼 옆으로 기어가야 들어갈 수 있는 이웃 아주머니네 집의 구불구불한 입구, 후줄근한 차림에 한 손으로는 시멘트 바닥을 짚으며 딱지를 치는 아이들까지. 상계동 아파트에서 살았던 일 년이 꿈속의 일처럼 느껴졌다. 이웃들은 나를 어제 본 것처럼 편안하고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곳으로 돌아온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꿈이라면 깨고 싶었고, 꿈이 아니라면 다시 잠에 들고 싶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15층 아파트에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몇 번을 잠에서 깨도 크기가 절반으로 줄어버린 좁은 방에 누워있다는 사실과 방 안을 떠도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만은 변함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악은 아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집안 가구에 빨간 딱지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새벽마다 거구의 남자들이 방망이를 들고 찾아오지도 않았다. 밤에 머리를 감다가 물이 끊긴 적도 없었고 식탁 위에 간장 종지 하나만 올라와 있지도 않았으며 국가의 지원금을 받으며 하루하루 고비를 넘기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내가 불행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앞서 나열한 이미지들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가난의 상징이라고 인식한다. 이러한 상징이 생겨난 데는 미디어의 영향이 컸을 터이며, 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진짜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치부해버리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너희 집은 따뜻한 물도 나오고 밥도 잘 챙겨 먹고 부모님 두 분 다 멀쩡히 일하고 계시니 더 힘든 집에 비하면 살만하다'라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선이며, 개중에는 '그러니 불평하지 말고 지금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라'라고 덧붙이며 계급 구조의 정당화마저 자행하기까지 한다. (내 시야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내가 느낀 가난은 드라마처럼 단순하고 자명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함과 가난하지 않음의 경계는 모호해서 서로의 영역을 쉽게 침범한다. (가난의 객관적 지표라고 할 수 있는)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이 가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한편 그렇지 않은 가정이 전기세가 밀려 일주일 동안 촛불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 연기와 같은 뿌연 모호함 속에서 살아왔다.

끼니를 거른 적은 없지만 외식을 하지는 않았고, 유희왕 카드를 살 돈이 없어 친구가 갖고 놀다 버리는 걸 가방에 잔뜩 담아왔으며, 남들이 명절 때 받은 세뱃돈으로 최신 게임기와 비싼 가방을 살 때 나는 오천 원짜리 문화상품권 한 장을 손에 꼭 쥔 채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되풀이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난의 흔적들은 흉터로 남아 성인이 된 지금의 내 행동 양식에도 영향을 적잖게 끼치고 있다. 부모님과 식당에 가면 제일 저렴한 메뉴를 고르고, 같은 신발을 일 년 넘게 신고 있으며 교통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지금도 강남역에서 구반포역까지 한 시간을 걸어서 퇴근한다.


가난의 흉터는 행동뿐만이 아니라 나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누군가 내게, 너 정도면 잘 사는 편이지, 라는 식의 말을 들으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럴 때면 욱해서 내가 겪은 가난의 고통과 경험을 낯부끄러울 정도로 여과없이 쏟아낸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우리 집은 차도 없고 면허도 없어, 가진 게 집 한 채뿐인 하우스푸어야, 부모님 앞으로 된 마이너스 통장이 몇 개나 되는 줄 알아, 등의 유치하고도 치졸한 논쟁(이것도 논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이다. 무의미하고 소모적일 뿐이다. 나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잘 사는' 기준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제각각일 수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해당 문장이 참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절대적인 기준에 비추어 가난의 여부를 증명하려고 언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다. '너 정도면 잘 사는 편이지' 라는 말을 통해 나는 가난 그 자체가 아닌, 가난이 남긴 불행이라는 흉터를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아물지 않은 그 흉터가 없던 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흑석동에서 살았을 때 우리 집은 한강 옆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여름 장마로 한강 수위가 올라가면 고지대로 대피해야 한다고 어머니는 내게 몇 번이고 일러주었다. 비가 오는 날, 동네에 사이렌이 울려퍼지면 이불과 베개만 가지고 옆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야한다며 자세한 위치까지 알려줄 정도로 어머니의 표정은 진지하고도 사뭇 심각해 보였다. 한강의 수위는 빠르게 차올랐고 뉴스 화면 속 한강은 평소에 산책을 하던 길목마저 집어삼킨 괴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겉으로는 괜찮은 척 했지만 귀는 잠시 후 울려퍼질 사이렌 소리에 곤두서 있었다.

저녁이 되어 빗소리가 잦아들었지만 성난 한강의 물살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꿈속에서 사이렌 울음을 내며 창문과 문틈으로 물살이 밀려들었다. 수천 장의 유희왕 카드와 문화상품권이 수면 위를 둥둥 떠다녔고 나는 그것들을 붙잡을 새도 없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고지대로 향했다. 언덕 위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는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웃으며 축구를 했다. 나는 콧구멍과 목구멍으로 밀려들어오는 한강물을 삼키며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밑으로 가라앉지는 않은 채 애매하게 둥둥 떠 있었다. 눈부신 햇살에 나는 꿈에서 깼고, 어젯밤에 비해 잔잔해진 한강의 모습이 아침 뉴스 화면에 반복해서 비쳤다.


누군가가 내게 가난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불행했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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