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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Mar 30. 2024

원피스 정주행을 포기했다

유행에 뒤처진 자의 발버둥

90년대생들에게 만화 <원피스>는 IMF의 여파나 그날의 학교 숙제보다도 중요한 이야깃거리였다.

온몸이 모래로 변하는 강적이 나타났다는 둥, 고무인간에게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둥, 악마의 열매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돌이 있다는 둥, 루피의 형이 죽었다는 둥, 그래서 너무 슬프다는 둥.

학교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신이 나서 만화 속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만화라는 장르 자체를 유치하다고 생각했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이런 작품은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의 흥분 섞인 목소리를 흘려들었다.


한참이 흐른 지금에서야 원피스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한 가지였다. 작품이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작중 핵심 요소인 '원피스'의 정체가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요새 유행하는 '도파민 찾기' 대신 나는 '원피스 찾기'를 위해 거대한 닻을 올린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이십 년도 넘는 시간 동안 찾아 헤맸을지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솔직히 사람들이 열광하는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나도 같이 소리 지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만화책으로 볼 것인지 애니메이션으로 볼 것인지부터 정하는 데 한 세월이 걸렸다. 어느 한쪽을 고르고 나면 다른 쪽으로 넘어가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화책으로 보면 불필요한 전개 없이 원작의 흐름과 작가의 의도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정사파'의 의견이 끌렸으나, 화려한 액션과 성우의 호연이 백미인 애니메이션을 추천한다는 '야사파'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쪽도 가리지 않고 둘 다 보는 듯했다.

장고 끝에 만화책을 골랐다. 10초짜리 숏츠 영상도 길다고 느껴지는 요즘 나의 미디어 소비 패턴으로 보아 20분이 넘는 20년 전의 영상을 보는 일은 취미가 아닌 숙제처럼 느껴질 게 눈에 훤했다.


만화카페에 가서 다섯 시간을 한 번에 결제했다.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는 만화책 다섯 권을 호기롭게 한 번에 가져왔다. 소설이나 인문학 서적도 아니고 그림으로 가득한 만화책 다섯 권이라면 한 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백 년의 고독>을 읽을 때 느꼈던 위압감이 다시금 나의 머릿속을 덮쳤다.

새로운 인물이 한 권에 많게는 십 수 명까지 등장하다 보니 누가 누구였는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주말에만 만화책을 펼치는 직장인에게는 너무 고된 노동이었다. 바로 옆 팀 직원의 이름도 종종 잊어버리는 판국에 6개의 문어 다리가 달린 괴인과 팔에 상어 지느러미가 돋아난 괴인의 이름이 머릿속에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한 시간은커녕 세 시간 넘게 걸려 다섯 권을 겨우 읽고 나머지 두 시간은 제대로 다 쓰지도 못한 채 줄행랑을 쳤다.


그럼에도 나는 꿋꿋이 주말마다 만화 카페에서 똑같이 다섯 시간을 지불하고 다섯 권의 책을 빼들고 와서는 자리에 앉기를 반복했다. 오늘이야말로 원피스를 깨부수겠어. 그러나 언제나 깨부숴지는 건 나였다.

주중에는 시간도 체력도 없어서 일주일 혹은 이주일에 한 번씩 가다 보니 어디까지 읽었는지 그 앞에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 완전히 초기화가 되어버린다는 것도 걸림돌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두 번 세 번 다시 읽으면서(덕분에 적어도 1권은 빠삭하다) 본격적인 모험을 떠나기도 전에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고전 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한 기시감이 드는 것은, <원피스>가 어느덧 고전 만화의 반열에 들었다는 의미인 걸까? 어느 순간부터 만화카페에 가는 일이 숙제처럼 느껴졌다. 재미는 포기한 지 오래였고 약간의 괴로움마저 들었다. 재미를 느끼는 것은 만화카페 사장님 뿐이었을 것이다.


같이 읽는 친구가 주위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경쟁하듯 정주행을 하거나 같이 이야기를 하며 작품을 깊이 있게 탐구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해적이며 해군이며 열매 이름까지 줄줄 댈 정도로 원피스를 즐겨 보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기에 바쁘다. 바다를 떠난 친구들은 저마다 섬의 이름을 하나씩 말한다. 나는 <와노쿠니>에서 탈출했어. 나는 <임펠다운>에서 멈췄어. 각기 다른 섬에서의 모험이 하나의 거대한 챕터가 되는 구조인데, 읽어도 읽어도 나는 그들이 멈춘 곳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었고 도무지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만학도는 오늘도 서럽다.




나는 태생적으로 유행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물고 뜯고 씹다 단물이 다 빠져 딱딱하게 굳은 껌을 뒤늦게 집어 들고는 입에 넣어 맛을 보는 사람, 모두 관객석을 빠져나간 뒤에야 텅 빈 극장에 들어서서 반복 재생되는 영상에 빠져드는 그런 사람.


해체를 한 밴드의 음악에 꽂히고 펜을 내려놓은 작가의 글에 빠져든 사람의 비극을 아는가? 다음 작품을 기대하며 설렐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을 나눌 사람도 이미 자리를 떠난 지 오래라 혼자 조용히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탐닉해야만 하는 슬픔. 그럼에도 그들이 남긴 유산이 너무나도 좋기에, 너무 깊게 파고들다 보면 금세 질릴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 마음을 아는가?


좋아하는 마음이 천천히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울 때쯤이면 함께 좋아하고 호들갑을 떨 사람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언제나 혼자 좋아하고 혼자 설레고 혼자 식었다. 그러니 아직 온기로 가득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 같은 <원피스>를, 다른 이들과 함께 질릴 때까지 쓰다듬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쓰다듬고 싶었던 건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였다. 다들 강아지 주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떨떠름함을 참으면서까지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야 할 필요는 없음을 이제는 안다.


결국 나는 중도하차를 선언했다.

원피스 하나만을 보고 무작정 책장을 펼쳤던 건 주인공 '루피'도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만의 뚜렷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해 온 그와 달리 나는 그저 보물에만 눈이 먼 사람이었다. 매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단 한순간만을 바라보며 항해를 하는 자에게 순풍이 불 리 없는 것이다.


원피스 그 자체보다도 원피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만으로 시작한 여정은 이렇게 일단락이 되었다. 물론 다시금 정주행을 시작할 수야 있겠지만 앞 내용을 복습하고 인물의 이름을 기억해 낼 때쯤에 작품은 이미 완결이 나 있을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하지만 아쉬움은 없다. 

이제 나와 그들이 처음부터 가까워질 수 없는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안다. 루피는 루피의 모험을 하고 나는 나의 모험을 해 나갈 것이다. 해적은 해적선을 탈 때 빛나고 해군은 군함을 탈 때 빛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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