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마를 새로 했다. 새로운 스타일은 아니다. 전에 했던 파마의 컬이 풀려가고 있었다. 목소리가 늘어진 장난감 인형의 태엽을 감듯 눈썹 아래까지 내려오는 흐느적거리는 머리칼을 다시 말아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고 나면 당분간은 머리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새로움이 아닌 안정감을 위해 미용실을 찾았는데 예약 순번이 꼬여 예상치 못하게 시간이 떴다.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안정감을 잃어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용실 안에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길고 집까지 다시 다녀오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급한 대로 미용실 옆에 있는 책방으로 피신했다.
책방은 웬만해서는 배신하지 않는다. 책들로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서면 항상 일정량의 안정감을 느낀다. 너무 강하지도 너무 희미하지도 않은 적당한 햇살이 비치는 오후처럼 딱 말라죽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데워준다. 이 마음의 기저가 무엇인지 몇 번 생각해 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중 대부분을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읽지 않은 책들은 늘 미지의 존재인 상태로 그곳에 꽂혀 있으니 두근거리는 마음의 장작불은 계속 타오른다. 꺼지지 않으니 온기는 일정 수준을 유지한다. 게으름이 가져다준 따뜻한 행복인 셈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집어 들었다가 책수레 위에 놓여 있는 <문학동네>의 과월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잡지. 나는 언젠가 편집자로서 잡지를 기획하는 모습을 꿈꾸고 있다. 지금 하는 일과는 출발 지점부터 달라 박봉을 받는 신입으로 취직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십 년 넘게 위기라고 하는 출판업계에서 외줄 타기 하듯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꿈을 네 글자로 늘리면 이런 모습일까.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해야만 하는 일을 해 온지도 어느덧 3년이 흘러가고 있다. 이것만 하고 그만해야지, 여기까지만 하고 때려치워야지, 하며 꾹꾹 속으로 삼킨 마음이 욱 하고 터져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내 몸은 소화력이 좋은 모양이다. 뛰다 보니 뛸만해졌고 곁눈질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발밑만 보고 달리고 있다.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일도 더는 하지 않고 있다. 권태를 느끼는 데도 에너지가 적잖게 쓰이는 법이다.
쇼츠의 화면을 넘기듯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있다 보니 이렇게 책에 눈길이 갈 때는 한 권이라도, 한 장이라도 읽는 게 낫겠다는 마음에 소설은 원래 자리에 두고 묵직한 잡지를 챙겨 자리에 앉았다.
반가운 이름과 낯선 이름 몇 개를 지나자 두 페이지 정도의 글이 나왔다. 작가론, 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거창했고 작가 초상, 이라는 잡지의 분류도 직관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나라는 사람은 이런 작가입니다, 정도가 어울리는 가벼운 밀도의 자기소개서였다.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화를 내야 할 때 타이밍을 자주 놓친다... 어떤 일 때문에 격렬한 감정을 느끼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별로 없지만 시간이 지난 뒤 문득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느낄 때가 있다... 그리 재미도 없는 일을 시작하고 금방 그만두겠지 생각했는데 그만두지 않고 몇 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지속하는 경우가 있다. 옛 친구에게 평범하고 일상적이지만 애정 어린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문득 사무치고 또 사무치는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문득 깨어난 새벽. ¹
이거 완전... 나잖아?
모두 붓을 들고 채색을 할 때가 되어서야 연필을 들고 스케치를 시작하던 아이는 커서도 구상만 하고 있다. 정작 도화지에 물감이 엎질러지는 줄도 모르고 연필 끄트머리에만 온 정신을 쏟는 사람. 도중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아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원래 스케치대로 일단 그림을 완성하고 보는 사람. 옆자리의 친구가 도화지에 그려진 파란 얼굴을 보고 놀라고 나서야 내가 놀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임을 알게 되는 사람.
반가운 마음으로 글을 다 읽고 앞 페이지로 넘겨 주인공을 확인했다. 표지에 그려진 원 안에는 뿔테 안경을 쓴 채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남성의 사진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이장욱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장욱은 첫 수업부터 몇 권의 소설과, 소설에 대한 책들을 소개했다. 끝에는 항상, 다 읽어보셨겠지만, 이라고 덧붙였다. 그 책들을 모두 읽었다는 전제 하에 진행되는 강의였고, 명성에 걸맞게 흠잡을 곳 하나 없이 탄탄한 커리큘럼이었다. 딱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내가 그 책들을 읽어보기는커녕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곳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4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지만 나와 같은 비전공자들도 섞여 있으니 당혹스러운 표정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잠자코 앉아 있었다
나는 고민했다. 포기할 것이냐 돌파할 것이냐. 어느 것을 골라도 뼈아픈 선택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옷 가게 점원에게 건넬 법한 짧은 한 마디의 말과 함께 나는 사라졌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이장욱이 서 있는 교탁 앞으로 튀어나가 준비한 말을 건넸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문을 열고 강의실을 나갔다. 나는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준비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서 '재도전'을 하는 것이다. 그게 내가 내린 제3의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동일한 커리큘럼의 수업을 다시 신청한 것은 글을 더 잘 쓰게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나는 그가 필독서로 지정한 책들을 읽지 못했다.
뭐랄까... 그 시절의 나는 독서라는 분야 자체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가롭게 소설이니 시 같은 달콤한 감상에 빠져 현실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현실은 언제나 책에 쓰인 글씨보다 더 씁쓸하다는 착각에 빠져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요원했다. 내 삶의 마지막 문학 수업, 내 삶의 마지막 이장욱이라고 생각하니 최하점을 받더라도 괜찮지 싶었다.
다시 만난 이장욱과의 기억은 네모로 남아있다. 네모난 화면 속에 갇혀 있는 이장욱. 가끔 와이파이가 불안정할 때면 네모난 픽셀로 깨져 보이는 미잠묵. 네모난 종이를 들고 네모난 서재 앞에서 '공기 반 소리 반' 목소리로 합평을 하는... 파마머리의 이장욱.
네모의 꿈이라도 꾼 것처럼 그 시절의 기억은 어렴풋하다. 분명 대학생 시절 마지막 학기를 함께 보냈는데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밥 먹듯 끊기는 통신 연결과 1초씩 지연되는 의사소통 탓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도 한 사람에게 할당된 시간은 제한되어, 마치 스피드 퀴즈를 하는 것 같았다. 3분 안에 오늘 느낀 점을 모두 표현하시오. 손짓발짓과 표정까지 동원해 설명을 해도 사람들은 말뜻을 오독했고 바로잡을 시간은 없었다.
수업은 늘 쫓기듯 진행되다 보니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새 학기가 끝이 났다. 만났지만 만나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의 만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대면 수업을 녹화한 파일뿐인데 그마저도 온라인 강의 자료실에서는 더 이상 다운로드할 수가 없어서 내가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파일 몇 개가 전부이다.
파일들 중 하나는 내가 쓴 소설을 그의 목소리로 합평을 해 주는 시간이 담겨 있는 영상이었다.
이제 와서 읽으면 부끄러운 졸작이지만-글은 원래 완성하고 나면 부끄러워지는 법이다-당시의 나는 이장욱이 나의 글을 읽어주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장욱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시, 소설, 평론 세 분야를 모두 석권한 소위 문학계 '트리플 크라운'의 대명사 아닌가. 요식업계로 비유하면 미슐랭 3 스타와 월드 베스트 50에 모두 이름을 올린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르 꼬르동 블루 출신의 셰프에게 내 요리를 대접하며 피드백까지 받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그 귀한 기회에 선보인 요리가 주먹밥 수준이라는 게 흠이지만.
하지만 기를 쓰고 며칠 밤을 새도 내 손으로는 만들 수 있는 게 고작 주먹밥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맛있게 먹어주기만을 바라면서 정성을 다해 동글동글한 주먹밥을 빚어 그의 앞에 내었다.
먹을 만한데요?
당연히 정말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네모난 시절의 기억은 다소 변형되고 마모되어 지금 내게는 주먹밥 같은 동글동글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당신의 입맛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그럭저럭 식감이 살아있고 풍미도 어느 정도 있다는 유의 말이 내게는 최고의 칭찬으로 들렸다. 내가 만든 음식이 그의 입에 들어가 혀를 훑고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 마침내 그의 뱃속에서 소화되어 그의 피부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되겠구나. 나는 이장욱의 '샤라웃'을 받은 그 영상을 한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려 보았다.
독서니 문학이니 하는 것들은 다 배부른 소리일 뿐이라고 등한시해 왔지만 사실 누구보다 그것을 좋아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뒤통수를 맞았는데 달콤함이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글을 좋아하고, 어쩌면 사실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음을, 이장욱은 내게 일깨워주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해.
얼마 전, 나보다 몇 살 위의 사람에게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내가 진짜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빠져들어야 지금보다 적게 고민하며 살 수 있을지를 물었고, 나와 정확히 같은 고민을 했었던 그는 몇 해 전에 자신의 담당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들었던 말을 내게 전해 주었다. 대학 교수라면 자신의 분야에 통달한 사람, 그 일이 곧 자신을 설명하는 삶을 살고 있을 터이다. 그런 사람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 자체만으로도 덤덤한 위로가 되었다.
과거의 말이 현재의 나에게 도달하고 어느 정도 마음을 보듬어준다는 점에서 그 대화는 마치 책을 읽는 듯했다.
이장욱은 어떨까.
교수로서도 문인으로서도 나는 그가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어느 곳을 찔러도 예술사의 기조나 러시아 문학의 글귀가 줄줄 흘러나올 것만 같은, 문학으로 둘러싸인 사람. 그런 그도 자신에 대해 지금도 고민하고 있을까.
러시아가 아니라 남미 문학을 선택할걸. 지금이라도 일을 관두고 유튜브나 해 볼까. 내가 정말 문학을 잘하고 있는 것일까.
잡지에 실린 그에 대한 정보가 모두 사실이라면 그는 나와 꽤 닮은 구석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했던 답이 없는 고민을 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나마 먹을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게 주먹밥뿐이었고 남들보다 조금 더 동그랗게 주먹밥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별생각 없이 계속 만들다 보니 어느덧 식당을 차리고 셰프가 되고 미슐랭과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에 주먹밥 전문 레스토랑으로 족적을 남기는 지경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주먹밥은 역시 내 길이 아니었어,라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후였을 것이다. 이제 와 그만 두기에는 세상 모든 이들이 나를 주먹밥의 제왕이라고 부르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주먹밥만 만들고 있으며 세간의 어느 주먹밥보다 낯선 참신한 레시피를 수십 가지나 개발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웃으며 박수를 치고 때로는 너무 맛있다며 눈물까지 흘려도 묵묵히 주먹밥만 동그랗게 빚는 그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지금 이 선택이 맞는 것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시간은 주먹밥처럼 등 뒤에서 굴러오고 있고 나는 그저 달리고 있다. 뒤를 돌아보는 게 힘들고 지칠 뿐인데 어쩌다 보니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
산책하는 사람들은 내 뒤를 따라 굴러오는 주먹밥을 가리키며 묻는다.
키우시는 건가 봐요. 이름이 뭔가요.
나는 그제야 당황하며 대답한다.
앗 깜짝이야 뭐야 이거.
다음번에는 어떤 스타일로 하시겠어요?
파마 시술을 마친 미용사가 물었다. 이전보다 더 빠글빠글해진 머리 스타일을 한 내가 거울 안에 있다. 이 정도 곱슬거림이면 한 달은 거뜬히 버틸 것 같다.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막 원래 상태로 돌아왔는데 미용사는 빙글빙글 웃으며 벌써 다음을 물어보았다.
아직 생각을 안 해 봐서요.
일단 한 달을 살아보고 나서, 평소보다 어쩐지 시야가 좁아졌다고 느낄 때쯤, 앞머리가 눈썹 주위를 자꾸 찌를 때쯤, 내가 지금 따끔거림을 느끼고 있구나, 불편함을 느끼고 있구나, 그 원인은 머리카락의 파마가 풀렸기 때문이구나,라고 느낄 때쯤.
그때가 되면 생각을 시작하지 않을까.
문득 파마를 하러 미용실을 찾은 거울 앞의 이장욱의 모습을 상상했다.
늘 먹던 걸로 주세요.
₁ <작가 초상 - 이장욱 - 오늘의 캐릭터 노트> 中, <문학동네 - 2022 가을 통권 112호>, <문학동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