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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Sep 01. 2024

미룬 이의 이룬 것

도망친 사람들이 추는 춤

일반적인 연극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대본이 없다. 무언극인가 하면 아니다. 배우들의 대사로 가득 채워지는 공연이다. 그렇지만 공연을 위한 무대도 객석도 따로 없다. 관객이 배우고 배우가 곧 관객이 된다. 하지만 배우도 없다. 모임장인 나부터도 어린 시절 교회 무대에서 '도둑 1' 역할을 했던 게 연기 활동의 전부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특별한 연극이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딱 한 번만 열리는 연극. 거창하게 으스대는 것이 아니다. 참여자들은 모임 당일 자신이 연기할 인물에 대한 간단한 정보만을 전달받는 게 전부다. 극은 참여자들 간의 즉흥적인 애드리브만으로 완성된다.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판을 깔아주는' 일뿐이다. 춤을 정식으로 배워 보기는커녕 자신의 몸을 제대로 움직여 본 적도 없는 사람들끼리 춤판을 꾸린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춤을 춘다. 나는 판이 무너지지 않는지만 확인한다. 춤을 어떻게 출지는 온전히 판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의 선택이다.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춤이고 배를 바닥에 깔고 엎드려 있는 것도 춤이다. 눈을 지그시 감는 것도 춤이고 팔 벌려 뛰기를 하는 것조차 춤이다. 춤에는 정도正道가 없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모든 일에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으로서, 어른으로서, 자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으레 행해야 할 모범적인 언행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렇게만 하면 아무도 내 마음에 빗금을 긋지 않으니까. 횡단보도를 겅중겅중 뛰며 길을 건너는 것을 재밌어했던 이유는 검은 구덩이를 피하는 스릴이 아닌 흰색 선 안에 안착했을 때의 안도감 때문이었다.

애가 어쩜 이리 맞는 말만 할까.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 사람들은 마시멜로를 두 개, 세 개씩 주고는 했다. 나는 조금씩 달콤함에 취해 갔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 동시에 칭찬도 낳는다. 칭찬은 대체로 성공을 보장했다. 거짓말은 성공의 배다른 아버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자라왔다.

정답에 다가가기 위한 끝없는 자기 검열은 어느 정도 절제된 지금의 내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바로 그 단정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만큼 강한 중력은 매번 나의 발목을 잡았다. 무거운 옷을 벗어던지고 우주 공간으로 탈출하려 해도 자아라는 행성은 나를 강하게 잡아 끌어당겼다.

하지만 지면으로 곤두박질칠 때마다 나는 불쾌한 안도감을 느끼고는 했다. 중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추락은 달콤했고 핑계는 언제나 잘 먹혔다. 다들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다음 비행을 기리며 위로를 건넸다. 내게 비행飛行은 비행非行이었다. 자유로운 하늘길보다는 단단한 돌길을 선호하는 내게, 세상은 울퉁불퉁하고 까다로운 문제들의 연속이었다.

가족이, 친구가, 회사가 원하는 답을 말했을 때 그들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면 안심한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답이 틀릴까봐 늘 불안하다. 사람들과 관계 맺는 모든 순간을 <도전 골든벨>의 마지막 생존자처럼 보내왔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숨죽인 채 나를 지켜보고 있고, 화이트보드 위에 빼곡히 적힌 이름들은 답을 적을 비좁은 공간만을 남겨둔 채 내 손끝을 기다리고 있다. 짐작조차 가지 않는 문제라 하더라도 정답은 반드시 존재한다. 고심 끝에 답을 적고 칠판을 머리 위로 든다. 사람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어디선가 한숨 소리도 들린다.

답을 고른 이유를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해 보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한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사회자가 뜸을 들이는 사이 나는 다음에 이어질 장면을 상상한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까지 관객석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나에게 괜찮다고 말을 건넬 것이다. 헹가래까지 띄워 줄지도 모른다. 공중에 뜬 나는 모자가 떨어지지 않게 한쪽 손으로 붙잡으며 짐짓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짓는다.

사람들은 자리로 돌아간다. 나를 잘 모르면서 헹가래를 띄워줬던 사람들은 다시금 나를 모르게 되고, 책상 앞에 앉아 나는 다시 기출문제를 푼다. 다음 문제는 반드시 맞혀야 해. 눈에 핏줄을 세우고 답을 외운다. 오답노트가 글자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등짝 여기저기에 빗금처럼 긁힌 생채기가 따끔거린다.


당시의 나는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생채기를 비집고 시뻘건 피가 마그마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음이라도 먹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뒤따라오는 불길에 삼켜질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서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흰 선이 아닌 검은 구덩이 위로 발을 내밀었다. 미래에 관한 걱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린 지 오래였다.

꿈속에서 죽으면 실제로 죽어본 적이 없으니 꿈에서 깬다던데, 정말 새로운 도전을 해 본 적 없는 나는 이제 곧 저세상으로 가는 걸까? 한 번도 빠질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그 뒤의 상황을 상상할 만한 데이터 자체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뜨자 무대 위에 서 있었다. 한 마디의 대사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만 인지하고서 무대 위에 내던져진 채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과거의 걱정도 미래의 불안도 없이 오로지 이 순간만이 있는 공간에서 나는 마침내 뇌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 나갔다.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내가 알던 나와 낯선 누군가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애매한 자아로 연기를 하다 보면 묘한 쾌감이 들었다. 횡단보도의 선과 구덩이 사이에 발을 걸쳐놓은 듯한 짜릿함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적이 언제였었더라.

연기라고 하기에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무언가를 표출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해 보였다. 무언가 '되어 있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멀티버스의 또 다른 나를 '불러오기' 하듯, 나이면서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 몸을 움직였다. 다음 순간에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틀린 답을 말해도 한 글자도 적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노려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손에 든 펜을 내려놓고 화이트보드 위에 올라서서 춤을 췄다.


어느덧 상황극단의 여섯 번째 대규모 행사를 마쳤다.

대규모라고 해도 고작 여덟 명 남짓한 인원을 대상으로 한 연극이지만, 들이는 시간의 양과 쥐어짜내는 생각의 농도를 고려하면 적어도 내 삶에서는 초대형 이벤트다. 한바탕 파티가 끝나고 나면, 전국투어를 마친 가수처럼 다음날은 아무것도 못하고 누운 채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앵콜은 요청 금지.

회원으로 시작한 모임을 운영진으로서 운영해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넘었다. 처음 막이 열렸을 때보다 세 배가 넘는 숫자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비해서는 내가 직접 춤을 추는 빈도는 줄어들었다. 배우라기보다 기획자이자 진행자로서 사람들 발밑에 놓일 판을 준비하고 제각기 다른 모양의 춤을 지켜보는 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장소를 물색하고 예약금을 걷고 전체 메시지를 보내고 공지 게시글을 올린다. 단체극에 사용될 시나리오를 구상한다. 예상되는 어려움과 불필요한 요소들을 확인하고 논의하고 수정한다. 일련의 과정을 되풀이한다. 또 다른 내가 '되던' 처음의 설렘과 긴장감은 이제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춤을 추던 사람이 떠나갈 때마다 느꼈던 슬픔에도 무뎌졌다.

솔직히 이 활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조차 너무 많이 되풀이한 나머지, 클리셰가 되어버려서 이제는 주변 사람들도 모두 흘려듣는 것 같다. 박수 칠 때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 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머릿속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어느새 다음 시나리오를 구상하며 신규 회원을 맞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단 한 명의 사람도 박수를 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방을 뺄 날이 찾아오면 이삿짐을 꾸려야 하겠지만 퇴거가 두려운 나는 계약 종료일을 표기해 둔 달력의 페이지를 찢어 버린다. 눈을 감으면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믿는 어린아이처럼. 날짜를 세는 일도 그만두기로 한다. 0.99999......=1이 되듯이 끝을 무한히 유예하면 영원이 되는 법이다.

과정도 결말도 생각하지 않고 달리는 상황극이 내 삶의 장르가 되어버린 것일까. 아직도 배우고 읽고 써야 할 것들이 산더미인데 여전히 나는 미래에 대한 모든 걱정을 미뤄둔 채 도망을 다니고 있다. 2년 전 내디딘 발걸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는 방향을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일단 어디로든 달아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름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비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행기 티켓만 끊고 떠나는 배낭여행에 목표나 방향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어디에서 잠을 자고 누굴 만나 무슨 대화를 하며 어떤 음식을 먹을지 알 수 없다. 그저 다가오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그 모든 도망의 순간들은 한 편의 끝내주는 연극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한다고 하면 바로 하는 사람이네요.

H는 내게 같은 말을 세 번이나 건넸다.

할 건 해야죠,라고 말하며 퇴근 후 매일같이 헬스장을 다니는 모습을 지켜봤을 때도,

6년을 사용해 온 핸드폰을 바꾼다고 말하고 이틀 뒤에 정말로 당근마켓에서 미개봉 상품을 샀을 때도,

콘서트를 보러 가야 하는데 담양까지 내려가야 해서 고민이 된다고 말해놓고는 바로 그날 고속버스 티켓을 끊었을 때도.

미루고 또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 눈을 질끈 감고 냅다 도망쳤을 뿐이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정리해서 글로 쓰리라, 그렇게 생각했건만 결국 또다시 미루고야 말았다. 3개월에 100만 원인 트레이닝은 끝나 개인 운동만 하고 있고, 새 핸드폰이 주는 설렘도 식은 지 오래다. 애석하게도 콘서트에서는 장기하가 가사를 틀렸던 순간만 또렷이 기억나고 나머지 순간은 가물가물하다.

생각을 안 하고 살아서 그래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뭉쳐 있던 어깨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도망은 비장하지 않지만 용기는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만으로는 도망칠 수 없다.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고 다리에 힘도 줘야 한다. 붙잡히지 않으려면 근력과 지구력도 받쳐줘야 한다. 기꺼이 횡단보도의 검은 구덩이로 뛰어들려면, 온몸을 짓누르는 중력을 이겨내고 대기권 바깥으로 나가려면, 백지 위에서 춤을 추려면.

<무소음 파티>라는 테마에 맞게, 광장은 고요했다. 신발과 보도블록이 빚는 마찰음과 가끔씩 DJ가 사람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목소리만 들렸다.

헤드셋을 끼자 새로운 세계가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고 바깥의 세계와 단절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무슨 짓을 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세상. 엇박자로 손뼉을 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멋대로 웨이브를 해도 혼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춤을 췄다. 하지만 동시에 헤드셋으로 모든 이들이 연결되어 있는 세상.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고들 하던데, 그날 밤 나는 천국에서 신나게 춤을 췄다.




*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中, 장수연, 터틀넥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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