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이렇게 놀라지도 않고 무덤덤한 사람은 없었어. 트레이닝복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 입은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눈앞에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휘갈겨 쓴 글씨들로 빼곡한 A4용지가 놓여 있었다.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이 종이 한 장 위에 모두 쓰여 있다고 했다. 자신은 어디든지 가 볼 수 있으니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직접 가 보고 답을 해 준다고 그는 선심 쓰듯 말했다. 나라는 인간의 삶을 종이 위에 펼쳐 놓고 관망한다는 신은 60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기지개를 켜며 맨몸으로 체조를 하던 것으로 보아 신 치고는 꽤 불편한 곳이 많아 보였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더는 궁금한 것이 없었다. 내 삶은 이미 나 자신에게 수도 없이 물어보았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관식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그런 건 알 수 없다고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딱 잘라 거절했다. 결국 그가 답할 수 있는 건 '예' 혹은 '아니오'의 두 가지 선택지뿐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궁금함을 억지로 쥐어 짜내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는 시늉을 하며 나는 턱을 괸 채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지금처럼 '근데 근데' 하면서 시간만 흘려보내왔구먼. 2년씩이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혀를 끌끌 차는 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와 대비되는 동그란 눈동자는 내 얼굴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나도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금하지 않아도 일을 한다는 것을. 궁금함은 아껴뒀다 퇴근 후에 꺼내 먹는 것이 보편적인 세상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나에게 궁금함은 장난감 태엽과 같아서 뒤에서 감아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회사의 구성원으로 지내기에는 참 골치 아픈 성격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일인데 그냥 좀 하면 어디가 덧나서...라고 생각한 그대. 나도 지난 3년간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단히 궁금한 사람을 연기해 보기도 하고, 궁금함을 묻는 마음을 서랍 속에 가둔 채 일에 몰두해 보기도 하고, 다른 이의 궁금함은 안녕한지 정말 지금의 일이 궁금한지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궁금함이 없으니 금세 게을러지고 일할 의욕도 이유도 찾지 못했다. 무빙워크 위에 놓인 캐리어처럼 애써 바퀴를 굴리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던 환경에 있다 보니 궁금함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점점 안일함이 채우기 시작했다. 이대로 저 끝까지 가면 무사히 비행기에 도착할 거야. 힘들이지 않아도 하늘을 날 수야 있겠지.
정신을 차린 건 앞으로의 내 모습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그때까지도 무작정 비행기를 탈 생각만 했지 정작 여행을 즐기는 내 모습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비행기를 기다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어느덧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게 변해 버린 내 모습을 손 놓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근데 근데'를 멈추고 무빙워크의 비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사이렌 소리가 긴 통로에 울리고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나 자신이 궁금하지 않은걸.
그렇게 나는 3년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마지막 출근을 하던 날 자리를 정리하며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전날까지도 야근을 한 탓에 비몽사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한 편의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첫 출근 날 동기들과 함께 쭈뼛거리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시간, 실수 한 번에 크게 좌절하고 자책하며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날들, 쏟아지는 업무량에 비해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 느껴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던 오후, 승진하던 날 예상치도 못하게 팀원들에게 꽃다발과 함께 축하를 받던 순간, 그들과 함께 놀러 가서 게임을 하고 고기를 굽던 밤, 날벌레를 쫓다 못해 방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우던 새벽, 오늘은 무슨 궁금한 일이 있을까 기대하며 매일 회사로 향하던 아침.
사람은 죽기 직전에 인생의 파노라마를 본다고 하던데 이게 바로 그건가. 이찬혁의 〈파노라마〉에는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버킷리스트는 다 해 봐야 돼.'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나는 고작 달콤한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무모한인가. 그렇지만 죽을 각오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벼랑 끝에 나 자신을 내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잠이 부족한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떠날 채비를 하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내 자리에는 짐으로 한가득이었다. 승진 기념으로 받았던 장미꽃은 드라이플라워가 되어 있었고 나중에 먹을 요량으로 신입사원 시절 몰래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쿠키는 썩지도 않은 채 내 손길을 기다리다 이제야 빛을 보았다. 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은 켜켜이 쌓여 어느덧 지난달의 우리와 1년 전의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었다.
네 컷 스티커 사진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걱정 없는 듯 웃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나를 '근데 근데' 하게 만든 것은 이들과 마시는 한 잔의 커피였다.
화요일 아침이면 출근한 팀원들끼리 카페에 모여 커피를 시키고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는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서로의 얼굴에서 지난주와 달라진 점을 찾는다. 누구는 앞머리를 잘랐고 누구는 지난주보다 살이 빠져 턱이 갸름해졌다. 은근슬쩍 새 재킷을 봐주길 바라며 옷깃을 다듬어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날도 있었다. 쓰린 속은 방금 나온 뜨끈한 커피로 달랜다.
각자의 음료를 마시며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누구는 차를 끌고 국내 여행을 다녀왔고 누구는 끝내주게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고 누구는 공방에서 반지를 만들었다. 시시콜콜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주말이 진정으로 궁금했다.
한 시간 안팎의 담소가 끝나면 사람들은 약속한 듯 일어서서 빈 잔을 반납하고 사무실로 돌아간다. 자리에 앉으면 그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눴든지 간에 상관없이 다시 말이 없어진다. 그렇지만 조금 전까지 나누었던 대화는 네 컷 사진처럼 머릿속에 층층이 쌓인다.
회사를 다니며 유일하게 궁금했던 건 사람의 마음이었다.
우리는 얼굴을 말하고 주말을 말하지만 사실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나의 얼굴을 쳐다봐 주었으면 해. 나의 마음을 네가 조금은 알아주었으면 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앞머리를 턱선을 새로 산 재킷을 자랑할 수는 없으니. 내가 어디 가서 무얼 먹었는지 갑자기 얘기할 수는 없으니. 네가 나를 궁금해하는 만큼 나도 네가 궁금해. 우리는 말한 적 없지만 약속을 했고 화요일 아침마다 그 약속을 꾸준히 지켜 왔다.
당분간 화요일이 사라진다. 아니, 요일이 사라진다. 주말이 사라진다. 주말의 궁금함도 사라진다. 궁금함이 없는 삶은 둥글게 굴러갈 수 있는 걸까? 우리는 둥근 테이블을 기억할까? 천국을 기억하는 이들이 한 명도 없다면 사라지는 걸까? 테이블도 커피잔도 기억하지 못하면 사라질까? 또 다른 곳에 가서도 태연하게 나는 다른 이의 주말을 물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도 궁금할까?... 생각이 끊이질 않는 걸 보니 역시 잠이 부족한 모양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1층으로 내려온 나는 불이 켜진 카페 출입문을 바라본다.
노인의 방을 나오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거실 소파에 앉았다.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잠시 몸을 기댈 곳이 필요했다.
유리판이 덮인 네모난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탁자 위에는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넓은 바구니에 여러 종류의 사탕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장 동그랗고 큼직한 주황색 눈깔사탕 하나를 집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지금은 먹는 것보다 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바깥은 아까보다 바람이 차게 불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데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오느라 힘들었는데 내려가는 건 더 쉽지 않아 보였다.
허리를 숙인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내려가고 있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주머니에서 눈깔사탕이 빠져나왔다. 잡을 새도 없이 둥근 사탕은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저 멀리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깔사탕을 눈으로 좇았을 뿐이다
주차된 승용차 아래를 지나 전봇대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사탕은 골프공처럼 맨홀 뚜껑의 둥근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눈 깜빡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아깝다는 말보다도, 아까 먹을걸 그랬나,라는 말보다도, 먼저 떠오른 한 문장이 있었다.
주말에 참 재밌는 일이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