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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Mar 09. 2024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해 줬으면

스마트폰을 바꿔야 할 것만 같은 마음

친구가 나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아연한 표정으로 도대체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내느냐는 물음에 별안간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잠깐 확인한다. 눈길을 사로잡는 새로운 사건이 없으면 잠시 실망한다. 연인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노래를 들으며 출근한다. 출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는 스마트폰은커녕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기에도 빠듯한 상황인지라 눈을 감고 가사와 멜로디에 집중한다. 매일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마지막 곡에 이를 때쯤 회사에 도착하고, 충전기에 전화기를 연결하고 나면 퇴근할 때까지 다시 만질 일은 거의 없다. 중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간단한 연락을 제외하면 화면을 켜지도 않는다.

귀가 후에도 태블릿이나 데스크톱을 많이 사용하기에 스마트폰은 찬밥 신세다. 충전기를 꽂은 채 머리맡에 두기는 하지만 정말로 무언가를 위해 전력을 다해 전력을 사용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가만히 있어도 소비되는 기초 대사량처럼 나의 스마트폰은 딱 화면의 밝기를 잃지 않을 만큼만 먹고 숨을 쉬었다.

오래 사용한 전자기기는 주인을 닮는다더니. 6년이라는 세월을 지내 오며 우리는 함께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점점 더 멀어지기 어려운 사이가 되어갔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 스마트폰과 함께 땅 속에 묻혀도 이상할 것이 없을 듯했다. 누군가 내 묘를 도굴한다면 대단한 애장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려동물도 아니고. 내세에서도 함께 하고 싶은 질긴 인연이라며 혀를 내두를 수도 있다. 하지만 틀렸다. 관계를 이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강렬한 불꽃이 아니라 추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의 희미한 온기다.

그렇다고 갑자기 한파가 찾아왔다는 얘기는 아니다.

액정 화면이 깨진 것도 아니었고 이유 없이 갑자기 재부팅이 되지도 않았으며 버튼 클릭에 반응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현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야 할 것만 같았다. 정작 강아지는 가만히 있는데 주인만 초조해져 냅다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고심 끝에 나는 불편함을 찾았다.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배터리가 없어 난감했던 기억, 지갑을 두고 와서 마트에서 물건을 그대로 돌려놓고 왔던 민망한 기억, 중요한 순간에 화면이 꺼져 게임이 끊기는 바람에 패배했던 쓰라린 기억.

그렇게 생각하니 어떻게 6년의 세월을 버텨 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참 지독하지. 묘한 뿌듯함과 함께 나 자신에게 느끼는 대견함에 사로잡혀 이 고철 덩어리를 이번 기회에 바꾸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정보 탐색에 매진했다.

그러나 현명한 소비를 하겠다고 꼼꼼하게 이것저것 따져본 지도 반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정작 소비는 하지 못한 채 인터넷 커뮤니티와 오프라인 매장 방문 횟수만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진정으로 현명하다면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선택지일진대, 그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현명하지는 못하기에 반드시 소비를 해야만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 아래 탐욕의 굴레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사명감은 사명감을 낳고 불평은 불평을 낳는다.

사실 무선 충전도 간편 결제도 써 본 적이 없어 편리함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자연스레 그것이 없어서 느끼는 불편함도 없었다. 게임은 귀찮아서 요새 잘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모든 행동에 이유가 필요한 나로서는 단지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정든 분신을 떠나보낼 합리적이고도 분명한 명분으로 나는 기억을 조작했다.


내게 최신형 스마트폰이 과연 필요할까? 모르겠다.

그전에, 필요하다는 건 뭘까? 무언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본 적이 있었는지 싶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가 보다, 하며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 욕구라는 건 일종의 사회 활동이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 거나. 네가 먹고 싶은 브런치를 먹자.

받고 싶은 선물이 있어?

지금도 불편하지 않은데. 너의 마음이 들어간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리 회사에 바라는 게 있나요?

월급만 잘 주면 됩니다. 제가 이곳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십시오.

고도로 발달한 귀찮음은 따뜻함과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나 따뜻한 것이지, 나 자신과의 대화에서는 따뜻함마저 찾아볼 수 없다. 타자는 없는데 귀찮음만 가득하니 결정은 미뤄지고 불편함은 증식하기만 한다. 이게 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전보다 마음은 더 추워졌다.


쓰고 싶은 글과 써야 하는 글, 그리고 써야만 하는 글이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것도 제대로 손대지 못한 채 몇 달이 흘렀다. 꼭 스마트폰을 알아보기 시작한 기간과 겹치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기본과 플러스와 울트라의 차이가 점점 요원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어떤 글부터 손을 대야 할지 선뜻 감이 오지 않는다.

긴 글의 첫 문장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고, 수많은 첫 문장으로 이어진 짧은 글만 늘어난다. 글도 삶도 숏폼이 되어 가고 있다. 결국 나는 스마트폰으로 숏폼 밖에 보지 않을 터인데 뭘 이렇게 고민하고 있나 싶은 생각도 든다.


돌이켜 보면, 내적으로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바깥에서 변화를 모색해 왔다. 마음을 바꾸는 것보다 스마트폰을 바꾸는 게 더 간단하고 편리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지나치게 오래 생각했다는 것이다. 생각이 쌓이기 전에 행동으로 옮겼어야 했는데, 이미 머리 위에 쌓인 생각의 무게에 눌려 어느덧 허리춤까지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들이치는 파도에 꼼짝없이 갇힐 운명이다. 램의 용량이니, API의 수준이니, 광학 줌과 디지털 줌이 어떻고 하는 것들은 몰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한 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상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꼬리를 흔들며 내 옆을 맴도는 강아지를 코요테 무리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만 같다.


문득 나는 강아지와 함께 무덤에 들어가게 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강아지를 보호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가냘픈 강아지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은 더 어렵고 괴롭다. 귀차니스트와 휴머니스트 중에 고르자면 나는 조금 더 따뜻한 쪽을 묘비명으로 선택할 것인데 그 둘 중 어느 것도 나를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스스로를 들여놓을 것이다.

결국 나에게 필요한 것은 개학식이나 과제 제출 마감일 같은 데드라인이다.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차가운 마음에는 해동이 필요하다. 나는 전자레인지 안에 내 마음을 넣고 무작정 타이머를 돌려야만 한다.


이제 결정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반신의 감각이 점점 둔해지고 있고 아까보다 공기가 더 차가워진 것을 느낀다.

선택하자.

강아지는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혀를 내민 채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강아지의 표정을 바라보며,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손으로 얼굴을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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