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란 Sep 07. 2023

꼬리 없는 사람들




사라진 꼬리 대신 사람들은 새로운 기관을 하나씩 얻게 되었다.


정형외과 의사에게는 입이 하나 더 주어졌다.

여기를 보면은? 보면은. 뼈에? 뼈에. 금이 가 있죠? 예? 예. 방법이 없죠? 없어요. 가만히 있으세요. 예? 예.

거북목의 의사는 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며 엑스레이 사진을 확대하고 축소하기를 반복했다. 사진 속 꼬리뼈에는 가느다란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사라진 꼬리가 다시 잘려나가는 것처럼 아팠던 원인이 저기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무얼 해야 하나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예? 예. 짧게는 6주에서 길게는 두 달까지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의사는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강조했다. 며칠 전에 연장해 둔 필라테스 수강권이 머리를 스쳤다. 이제 막 재미를 붙여 가던 차에 강제 휴식이라니.

내게 꼬리가 있었다면 빗물로 젖은 계단에서 미끄러졌을 때 꼬리뼈부터 부딪힐 일이 없지 않았을까. 층계참이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아니, 내 발이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발을 헛디디지 않았을 텐데.




나는 꼬리 대신 커다란 발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큰 발은 콤플렉스였다. 신발을 고를 때도 디자인이 아닌 재고 수량이 중요했고, 새 신발을 신을 때면 발이 꽉 끼는 탓에 발등부터 발볼까지 빨갛게 부어오르기 일쑤였다. 건조한 날씨에는 보기 흉할 정도로 살갗이 쩍쩍 갈라졌다. 모기는 또 왜들 그렇게 신나서 달려드는 건지. 신체의 다른 부위에 비해 유달리 크고 못생긴 발을 고깝게 생각해 온 나는 그 살갗처럼 무뚝뚝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왔다.


연인은 그런 나의 발을 씻겨 주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자신의 발을 씻겨 달라는 것도 아닌 다른 이의 발을 씻겨 주고 싶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당황했었다. 소원일 것까지? 그럼 그냥 씻겨 줄래. 나는 망설였다. 더럽잖아, 크고 거칠기만 하고. 거 봐, 그러니까 소원이라는 거야.

건대입구의 한 족욕 페를 찾은 우리는 신발을 가지런히 정렬해 놓고 카운터 앞 벤치에 걸터앉았다. 병원에서 가만히 있으랬다면서. 어느새 맨발이 된 연인은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태어난 아이를 받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발을 감싸 쥐었다. 살결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연인은 종종 작은 손의 고충을 토로했다. 옥타브를 넘나드는 건반은 동시에 누르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나는 사뭇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한계를 극복한 실력자의 겸손함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그래서인지 연인의 피아노 연주는 늘 원곡과 다른 심상을 품고 있었다.


연주에 몰입할 때 연인은 마치 다른 세계에 다녀오는 듯 보였다. 오선지 악보가 지도라면 그녀의 작은 두 손은 곧 두 발이 되어 세계의 구석구석을 누볐고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냈다. 슬픈 곡을 밝은 음색으로 바꾸거나 경쾌한 곡에 주저하는 발걸음을 더하며 새로운 곡으로 재탄생시키는 식이었다. 연주를 들을 때마다 연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던 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연인이 내게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커다란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이라면 나도 그 위에 살포시 얹혀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돌이켜 보면 그때도 나의 발을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마치 꼬리처럼 깊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을 건넸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도 끄떡없이 버텨줄 것 같은 나의 발이 믿음직스럽다며.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연인의 작은 두 손과 발이 더없이 큰 의지가 되었다. 섬세한 손길로 투박한 나의 영혼 구석구석을 씻겨 주고, 보드라운 발바닥을 내 발등 위에 올릴 때면 구름 같은 안정감을 선물해 주었다.

없어진 꼬리 대신 생겨난 기관들은 이제 서로에게 없는 마음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먼 옛날 꼬리의 역할이 각자의 몸을 지탱하기 위함이라면, 꼬리 없는 사람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간다. 나의 발은 커졌고 연인의 손은 작아졌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연인은 내가 지나친 작은 꽃의 이파리를 어루만진다.




연인의 작은 손이 발바닥과 복숭아뼈와 발가락 사이를 오가는 사이 어느덧 내 두 발은 풋크림으로 촉촉해져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욕조에 발을 담그고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연인의 보드라운 발이 내 두 발바닥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꼭 들어맞는 감촉이 좋았다.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 좋았다. 꼬리 대신 자라난 따뜻한 마음이 좋았다.


욱신거리는 꼬리뼈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몸을 천천히 일으키는데 어느새 욕조 밖으로 나온 연인이 손을 내밀었다. 그 어떤 살결보다도 단단하고 또 부드러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능한 기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