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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Aug 18. 2023

유능한 기분




택시 기사는 날씨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삼 억 원을 날렸다고 했다.


태풍이 어떻게 한 개도 안 올 수가 있나. 못난이귤만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던 그는 아무도 못나지 않던 그 해에 빚더미에 나앉았다. 망한 경험담은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하는지 늘 고민이 된다. 웃자니 울 것 같고 울자니 웃을 것 같다. 다행히 그는 웃었다. 강남역에서 학동역까지 가는 동안 계속 웃었다. 잼버리 공연에 차출된 뉴진스를 걱정하면서, 코로나 시기에 문을 닫은 자신의 당구장을 추억하면서, 삼 억 원을 잃으면 내년에 오 억 원을 벌면 된다는 제주도민의 말을 전하면서도 웃음을 잃는 법이 없었다. 동승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접고 창밖만 쳐다봤다. 고개를 들자 조수석 천장에 붙어 있는 운전면허증이 눈에 들어왔다. 발급 연도가 작년이었다. 나는 접을 웃음이 없어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태풍이 잔뜩 오기를 바랄게요. 택시에서 내리자 후텁지근한 열기가 온몸을 덮쳤다.


직장 동료와의 회식은 달갑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삼키지 못할 정도로 쓰지는 않았다. 그래도 두 시간을 삼키는 데는 값비싼 두 잔의 화이트와인이 필요했다. 분명 앉아 있는데 서 있는 것 같았다. 현대 속담 중에 뭐든 중간만 가면 된다고 누가 그랬는데, 중간에 앉으라는 뜻은 아니었나 보다. 너희는 왜 이렇게 폭삭 늙었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모두 웃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는 던질 농담이 없어 애꿎은 스테이크만 조각냈다. 와, 죽었는데 진짜 살아있는 것 같아요.

코스 요리라는 점을 감안해도 음식은 느리게 나왔고 우리의 대화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꽉 막힌 강남 한복판에서 십 인승 택시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요새 무빙이 그렇게 재밌더라. 그건 그렇고 콘크리트 유토피아 보셨어요? 한국형 어벤저스라던데. 이병헌 연기가 진짜 미쳤어요. 두 세대의 네 마디를 하나로 잇는 정답이 있는 걸까.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제삼의 대답이었다. 글쎄 어떤 택시 기사가 삼 억 원을 날렸다는데요.


백주대낮의 음주는 오랜만인지라 졸음이 쏟아졌다. 식당에서 돌아오는 길, 택시 기사는 우리를 오 인조 혼성 아이돌 그룹이라고 추켜세웠다. 이 양반은 적어도 귤밭을 산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밀짚모자 같은 내 갈색 버킷햇이 공연 의상 같아 보였든지, 혹은 내 걸음걸이가 춤을 추는 것 같았든지. 어디로 모실까요. 무시할 기운조차 없었다. 우리를 기다리는 멋진 무대로 가 주세요. 동승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피식 웃었다.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으로 변했다. 졸렸지만 당장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멋진 활약을 한 것만 같은 기분. 기능하는 기분.


집에 오니 거실에서 아빠가 죽은 아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능한 사람이었어.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냥 무턱대고 했어, 장사를, 내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족발의 굵은 뼈를 뜯으며 말하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늙은 독수리를 연상케 했다. 살아 있는 아빠가 죽어버린 아빠의 기억을 불러오는 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쉬운 일이다. 파란색 필라이트 캔만 있으면 강림하는 값싼 영혼. 나에게 성(姓)과 유전자를 물어다 주고 날아간 아빠 위의 아빠.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죽은 아빠가 마침내 죽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죽었어, 무능하게, 아무것도 못 해 주고, 나한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새의 말로는 어떤 표정으로 들어야 하는 건가. 웃자니 정말 웃길 것 같고 울자니 우스울 것 같다. 어떤 아빠는 뼈를 뜯었고 어떤 아빠는 뼈만 남았다. 뼈에는 표정이 없다.


내년 여름의 풍경을 상상했다.

두 잔의 화이트와인도 십 인승 택시도 없을 테지만 태풍은 반드시 올 것이다.

어떤 귤나무 밭은 초토화가 되지만 어떤 택시 기사는 웃을 것이다.

나는 죽어 가는 아빠와 살아 있던 아빠를 반씩 닮은 사람, 삼 억 원을 잃고 오 억 원을 바라는 무능하지만 유능한 하나의 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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