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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란 Mar 20. 2024

보이지 않는 손

퇴고 없이 단번에 쓰는 글

복도 가장 안쪽 방에서 녹음된 음악이 흐르고 있다

어린 시절을 흉내 낸 목소리가 들린다

놀이터 흙바닥에 꿀벌을 파묻으며

집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있다며 운다

형들은 요구르트 병을 손에 쥐어준다 생일 선물을 주는 것마냥

병의 입구는 좁고 입술을 닮았다 삼키지 못한 채 목구멍에 매달린 알약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린다

사진에는 병을 손에 쥔 채 울상을 짓고 있는 내가 있다 형들은 뒷모습만 남았다

날갯짓은 모래처럼 까끌거리는 소리를 낸다


무슨 말을 해도 믿는 방의 주인은

앞이 보인다고 믿고 있다 발가락에는 신장이 있고 겨드랑이 안쪽에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다리가 있다

눈을 뜨지 않아도 너에게는 손이 있다고 믿는다

어깨를 그러잡던 악력과 발바닥을 주무르던 압력이 메아리처럼 떠돈

보는 눈이 없어도 이 방에서 일어났던 일은 커튼처럼 천장 위에 가만히 걸려 있다

나는 날개뼈로 뒤를 볼 수 있다 너는 그 말을 믿는다

밖으로 나가 옷을 갈아입으면 그제야 눈을 뜨기로 한다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당신은 거짓말의 귀재

그럴싸한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만 이번엔 잘못 걸렸다

어깨엔 쥐와 용이 그려진 문신도 없고 머리를 다듬은 지는 한 달도 더 됐다

침대 밑에는 숨죽인 채 숨어 있는 선생님도 없고

늦은 밤에 혼자 서서 그네를 타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해본 적도 없다

나는 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당신은 웃으며 손바닥을 쫙 펼치고는 나의 등을 꾹 누른다 날개뼈가 매트리스처럼 평평하다


머지않아 나는 어른이 된다 나이는 매분 매초 들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발에 흙을 넣고 놀고 있다 입을 벌린 채 힘겹게 숨을 쉰다

음악이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줄로만 믿어 왔는데

방의 주인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다

옷을 갈아입다 주머니에서 모래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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